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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ul 04. 2022

나의 고향이 소멸한다

부디 알아주시라는 소망의 글

  내가 다시 고향에서 살게 된 것은 놀랍게도 8할이 자의였다. 애매한 2할을 남겨둔 것은 도통 끊을 수 없었던 도시에 대한 미련의 몫이다. 대학 생활을 보낸, 그래서 그때 당시 나를 지탱했던 대부분의 인연이 있는 부산은 앞으로의 생을 그곳에서 보내겠노라 다짐했던 도시였다. 그런 부산에서 나의 고향인 고성까지는 버스로 2시간 거리다. 마음먹으면 못갈 것 없는 거리인데다 여전히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음에도 그토록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더랬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사실에 기반했으나 너무 진부해서 종종 거짓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핑계를 죄책감 없이 내뱉곤 명절에마저도 대학교 앞 자취방에서 홀로 보내곤 했다. 그랬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고향집에서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던 까닭이 가장 컸다. 일단 부산에서 버스에 타 출발하는 순간부터 그 숨막힘이 미리 떠올라 쉴새없이 멀미를 했고 도착하고서도 이미 내게 없는 막내딸로서의 자아를 온 정신을 집중해 찾아대느라 숨이 가빴다. 엄마와 아빠, 언니 각자의 사정과 만나지 않았던 시간이 가져온 도저히 메꿀 수 없는 공백을 그저 버티어내다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듯 부산으로 돌아갔다. 우리 가족은 서로 앞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사이, 상처주긴 싫어서 본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사이, 그걸 서로 잘 알면서도 모르는척 또 연기를 해야 하는 사이가 된지 오래였다. 창호지가 다 떨어진 방문으로는 도저히 에어포켓을 만들 수 없는 그 숨막힘이 싫어서 나는 고향으로의 발길을 더욱 매몰차게 끊었다.


  그렇게 영영 살아갈 줄로만 알았는데 엄마의 투병이 시작되었다. 내 안에서 가족이라는 존재는 지도 어딘가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만 아는, 나랑 상관없는 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섬은 생각보다 가까웠던건지 엄마의 소식이 들려온 날 온갖 부정의 감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내가 발 딛고 있는 땅 위를 몽땅 쓸어갔다. 지난 날들이 온통 후회되어 일상이 버거워질 지경이었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거나 출근을 하는 소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죄책감을 묻힌 화살이 되어 나 자신에게 날아와 박혔다. 그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으므로 고성에 내려와서 가족들과 지내야 하지 않겠냐는 아빠의 말에 금방 고개가 끄덕여졌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가족과의 시간을 위해 나는 딱 2할만큼만 미련을 남겨둔 채 부산을 떠났다.


  다행히 경상남도 안에서 지역을 옮길 수 있는 직장인데다 타이밍까지 잘 맞았던지라 생업에 지장 없이 고성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고향 집은 고성에서도 면 지역으로 터미널이 있는 읍내에서 30분 정도 차를 몰아 들어가야 했는데, 버스가 하루에 4대밖에 다니지 않을 정도로 대중교통이 열악해서 자차가 없다면 움직이기 힘들었다. 데리러 나온 아빠 차를 타고 숨을 몰아쉬며 고향으로 향했다. 이제는 이곳에서 되든 안되든 숨 쉴 구멍을 만들어보아야 할 터였다. 앞으로 길다면 3년, 마음을 붙이고 살아야 할 고향의 모습은 내가 부산으로 떠났던 10년 전과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읍내에도 건물 사이로 푸릇한 논밭이 보이고, 금세 간판이 바뀌는 도시와는 달리 몇십년 째 자리하고 있는 가게들이 있는 곳. 그런 읍내에서도 놀이기구 타듯 격렬하게 흔들릴 만큼 꾸불꾸불한 산길을 지나야 도착하는 나의 고향 집. 자취방 밖으로 한발만 내디뎌도 사람 없는 곳이 없던 부산과 달리 30분은 걸어가야 이웃을 만날 수 있는, 대나무 숲을 뒤로한 파란 지붕집이 시간이 무상할 만큼 그대로였다. 


  공룡으로 유명한 고성에서도 유독 ‘공룡로’라고 이름 붙은 그 주소지에 전입신고를 하고 몇 달 뒤, 까맣게 잊어버릴 때쯤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전입축하금’으로 10만원이 입금됐다는 메시지였다. 돈을 줄 정도로 나의 전입을 축하하다니. 그때는 그저 신기해하며 웃어 넘겼지만 내 고향이 가진 절박함을 알아버린 지금은 그 십만원을 마냥 웃어 넘길 수는 없게 됐다.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새로 옮긴 직장에서의 적응, 엄마의 투병, 가족들과 풀어야 할 응어리들이 나를 쉴 새 없게 만들었다. 고향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내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의 연속이었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 자체부터 익숙한 공간을 지나는 출근길까지 모든 게 어색했다. 특히나 유년시절 나에게 있어 자주 들르진 못해도 충분히 친밀했던 공간인 도서관에 출근한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적응되지 않았다. 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묘한 기분은 ‘고성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정겹게 말을 붙이던 이용자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도를 그린 종이 위 어딘가 콕 박힌 섬 정도로만 여겼던 곳, 그만큼 애정도, 관심도 없던 고향이 나를 환대할수록 나는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고향에 왔더라도 모교를 방문하는 일은 어지간한 계기가 없다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 금의환향한다면 모를까,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괜스레 시간 내어 들르는 일이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나의 숫기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사려 깊은 상사는 업무차 관내 초등학교를 들르는 길의 동행을 권유하셨다. 학교들을 지원해야하는 입장에서 현장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과 함께였다. 감사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마음으로 상사의 차를 타고 학교로 출발했다. 나의 모교를 포함하여 다른 면 지역 초등학교들을 두루 들를 터였다. 면 단위가 넓게 퍼져있는 나의 고향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차가 필수인 곳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덜컹이며 도착한 학교들은 하나같이 방문객을 정겹게 대했다. 상사와 나는 선생님들과 마주 앉아 짧게는 10분, 길게는 2-30분씩 대화를 나눴다. 학교 도서관의 환경과 독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들이 오가는 동안 교장실 벽을 찬찬히 훑어보면 어김없이 학교 연혁과 현황이 붙어 있었다. 더 아기자기한 어느 학교에는 아이들의 활짝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시선을 조금만 옮기면 볼 수 있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또 한 번 고성출신이라는 소개를 하며 웃음을 주고 받고, 그러는 와중에 자꾸만 눈길의 한구석에 숫자들이 덜컹하고 걸렸다. 학교 현황을 나타내는 표에는 더 있어야 할 숫자가 빠진 것처럼 여백이 넓었다. 자릿수가 하나는 더 있어야할 것 같은데, 0이 하나 더 붙기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학년당 학생 수가 한 자릿 수를 넘어가는 곳은 꽤 여러 군데의 학교를 들른 후에도 찾기가 어려웠다.


  다섯 번째였을까, 그보다 더 되었을까. 마침내 들른 나의 모교는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도 추억이 되살아날 만큼 그대로이기도 했고, 생경하다 느낄 만큼 변한 구석도 있었다. 무엇보다 선명한 변화는 울타리를 기준으로 앞뒤로 붙어 있던 또 다른 나의 모교인 중학교가 폐교되어 다른 공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폐교를 막기 위해 애쓰셨던 선생님들, 그리고 그곳에서 멋모르고 마음껏 자라났던 한때를 떠올리면 못 먹을 음식을 삼킨 것처럼 속이 일렁였다. 그런 마음을 뒤로하고 들어선 초등학교는 모든 게 조금씩 작아진 느낌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높아 보였던 계단, 커 보였던 교무실 문이 내가 자란 만큼 낮아져 내 눈높이에 와있었다. 학교 도서관을 지나자 한쪽 벽면을 잔뜩 장식하고 있는 역대 졸업생들의 사진 속에서 내 모습도 찾을 수 있었다. 나보다 더 즐거워하시는 상사분의 맑은 웃음을 따라 나도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그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 사서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내가 소개되자 분위기가 한층 친밀해졌다. 웃음과 대화가 오가고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지는 열정적인 교장선생님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마저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번에는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벽면의 숫자를 찾기 시작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적힌 첫 줄 아래로 보이는 숫자들. 앞서 들렀던 어느 학교들보다 작은 숫자에 나도 모르게 뭉친 숨을 뱉었다. 특히 학년이 낮을수록 심각했다. 내 모교의 학생 수는 전교생을 다 합해야 31명, 그중에서도 2학년은 1명이고 1학년은 2명에 불과했다.


  “인구 절벽이 실감이 나네요.”

  “그렇지요.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와 같이 벽면의 숫자를 보고 나누는 대화 소리도 와닿지 않고, 그저 고개를 따라 끄덕이면서도 속으론 다른 생각을 했다. 


  ‘이거, 정말 큰일났구나.’


  그렇게 자리가 마무리되고 마저 남은 학교들을 들른 후 근무지로 돌아올 때까지 내 머릿 속엔 ‘큰일났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그 숫자들이 뇌리에 박혔다. 이 상태로 가면 이 학교가 얼마나 버틸까? 내가 다녔던 중학교처럼 초등학교마저 사라지는 건가? 내년에 입학할 아이는 있긴 한걸까? 이렇게 아이들이 없으면 이 작은 마을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이곳, 나의 고향에 미래는 없는걸까? 현장을 파악하러 갔다 우연히 맞닥뜨린 현실은 내 삶에 커다란 대사를 던졌다. 나의 모교가, 나의 마을이, 나의 고향이 곧 ‘소멸한다.’


  이후 전입을 축하한다며 십만 원을 보내던 관과 교장실 벽면에 붙어 있던 한 자릿 수의 숫자들이 모조리 절박한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왔다. 이쯤 되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왜 이 나라는 가만히 있는 걸까? 중앙의 사람들은 심각성을 알고는 있는걸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부산에 살 때까지만 해도 저출산 문제에 대해 그저 교과서에서만 읽히는 고리타분한 단어로 생각했지 피부로 와닿도록 느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지구 온난화, 세계 평화처럼 정답으론 찍히지 않는 객관식 보기 같은 거랄까.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몰랐는데 누가 알 수 있을까. 소멸 위기의 지방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나도 관심이 없었던 문제였는데 누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느냐는 말이다. 체감하지 못했고 몰랐다는 말로 무마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 뒤 나는 다른 시선으로 고향을 바라봤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을 보석을 보는 것 같은 심정으로, 드문드문 스쳐가는 청년들을 모조리 사랑할 마음으로. 그리고 또 생각했다. 우선 이 상황을 알려야겠다고. 불과 1년 전의 나처럼 주위에 가득한 건물과 사람들과 아이들로 인해 체감하지 못하고 있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방의 절박함을 알려야겠다고. 그러기 위해 또 글 쓰는 일을 택했다. 이번에는 나의 고향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2할 정도 남겨두었던 도시에 대한 미련을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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