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에 대한 단상
손을 꼼지락거리고 시선 둘 데를 몰랐던 헤아릴 수 없는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쭈뼛거렸던 지독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타고나길 내성적이어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늘 어려웠다.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의 놀이에도 끼지 못해서 다 같이 부르며 고무줄을 넘나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지도 못한다. 어린애는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어대기 마련이라는데 내 세상엔 웃을 일이 없어 웃음에도 박했다. 남들은 나를 조용하고 어쩌면 어두운 애라고 생각했고 나는 나를 서툴고 어쩌면 모자란 애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과 마주하는 훈련을 했다.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기상천외한 종류의 사람들을 차례로 겪었다. 어린 여자 알바생에게 최대한 무례하게 구는 것이 그날 자신의 하루를 멋지게 마무리하는 방법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내가 취할 수 있는 방어책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맞서거나, 피하거나. 어쩐지 불의에는 맞서야만 정의인 것 같아서 용기를 내 덤비기부터 시도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기술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던 이들에게 맥없이 눈물만 보이기를 여러 번. 그 길은 내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고 결심했다.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리니. 그리하여 어색할지언정 늘 미소 지으려 애썼고 시키는 일에 고분 하게 굴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착하거나 어쩌면 만만한 애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나는 나를 비겁하거나 어쩌면 기특한 애라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애는 쓰고 있으니까.
하루는 일하던 호프집에 알바생이라곤 고작 나 포함 세 명이었는데 30명 단체 손님에 더해 50명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오버 부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게에 없는 시간이 더 길었던 사장님은 나몰라라였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최고참인 내가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 참이었다. 그때 나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거나 그 언저리쯤이었다. 일단 나도 들은 바가 있어 예약한 것이 확실한 팀을 룸 안에 밀어 넣고, 늦게 온 50명의 단체에게 홀 전부를 내줬다. 음식을 만들 주방 이모들과 뛰어다닐 알바생들이 죽어날 뿐 딱히 그들에게 억울할 일은 없었는데,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보곤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어른들은 무지막지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서비스 안주를 내놔라, 담배를 사와라, 맥주는 거품 없이 따라와라, 사람이 몇 명인데 안주 양을 늘려줘라. 도무지 받아칠 기분이 나지 않는 조롱 섞인 농담 투와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나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고 웃으며 고분 하게 굴었지만 능숙하거나 아무렇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내 눈엔 소음 덩어리로 보이는 이 취한 사람들이 혹시나 내게 쏟아부을지 모를 무례와 비난이 견딜 수 없이 두려울 뿐이었다. 가장 그런 모양을 즐기던 어떤 사람이 자리가 끝나자 내게 와 말했다.
“혹시 직원이세요? 그냥 알바예요?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요? 여기 사장님이 알바 하나는 잘 구했네.”
그 말 한마디가 내게 주었던 모멸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저 말은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 알고도 어린 여자애에게 그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는 뜻이다. 그러고도 고분고분하게 구는 여자애가 퍽이나 갖고 놀기 좋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언제까지 착하게 구는가 본인들끼리 내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웃었다. 입꼬리를 내리면 종일 시달리는 동안 꾹 눌렀던 많은 감정들이 더해져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고, 차가워질 분위기가 두렵기도 했다. 내 속이 어떻든 당장 그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런 일들이 쌓여갈수록 사람 대하는 일이 훈련되기는커녕 겉과 속이 달라지는 일만 늘어갔다.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려워 쭈뼛거리는 것이 병이 되면 스스로를 죽이는 일과 같은 맥락이 된다.
그런 뒤로 몇 년이나 흘렀지만 나는 조금도 쾌차하지 못했다. 여전히 사람을 마주할 때 내 것이 아닌 웃음을 지었고 내 기분보다 상대방의 기분을 살폈다. 덕분에 나이 든 사람들의 여유는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노력의 산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그런 노력을 할 기운은 없었던 모양인지 그 여유라는 걸 터득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익숙해지긴 해서 어색한 웃음을 짓거나 한바탕 쭈뼛거리고 나서 자책하는 일이 적어졌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는 생각에 능숙해지길 포기했다. 그 포기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겉은 멀쩡해 보인단 얘길 많이 했지만 예리하거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진즉 파악했을 것이다. 내 속이 얼마나 혼자 전전긍긍인지.
하지만 완전히 낯선 사람들 수십 명을 마주해야 했을 땐 멀쩡해 보이도록 포장하는 일도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책을 낸 뒤로 작가 초청 강연을 다닐 일이 생겨났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은 비교적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들 앞에서 내가 뱉을 말들이 우습게만은 들리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내가 겪어온 삶이 저들에게 조금의 희망이라도 심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그런데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요청이 들어왔을 땐 두려움이 왈칵 밀려와 토할 것만 같았다. 나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이들에게도 내 이야기가 가치 있을까, 고작 저런 이야기로 글을 썼냐고 하진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쩌면 사람들 앞에서 쭈뼛거리는 나의 고질병은 자기 확신의 부족에서 온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절했어도 될 일이지만 왠지 모를 호승심에 수락한 뒤, 강의 날짜가 되기까지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몇 번의 꿈을 꿨다.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아무 말 못 하는 나의 모습, 정돈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선, 벌벌 떨리는 손, 그런 작가를 바라보며 한심해하거나 당황해하는 낯선 사람들, 결국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강연 시간. 그 장면들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하기로 한 것, 유일한 장점이라곤 맡은 일에 책임지기 위해선 발버둥이라도 친다는 점이었던 나는 강연 자료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시간은 원하지 않을 때일수록 빠르게 흐르는 법, 강연 날은 무척이나 금방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갔는데도 생각이 송두리째 바뀐 경험. 이 모순의 사정은 그날 생겨났다. 당일,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창원에 도착했다. 마침 근처에 살아서 마중 나온 친구에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혹시나 토기가 올라올까 봐 아침밥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정신 차리려고 마신 커피마저 목구멍 언저리에서 언제든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마음 상태로 강연 장소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현수막이 나를 맞았다. ‘류주연 작가와의 만남’. 부담감은 더 커졌고 저 현수막에 비해 너무나도 볼품없는 내 본질이 들켜버릴까 봐 더욱 두려워졌다.
굳은 얼굴로 강연장소에 들어섰다. 크지 않은 공간에 빽빽이 늘어선 의자는 30개가 족히 넘어 보였다. 준비해 온 자료를 화면에 띄우는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이윽고 빈자리가 없어졌을 때 강연이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준비된 마이크가 없어 낮고 작은 목소리부터 들통날 참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달달 외운 인사말을 뱉었다.
“반갑습니다, <딸의 기억>을 쓴 작가 류주연입니다.”
너무나도 식상한 인사를 하며 용기 내 청중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려고 일부러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는데, 거기 있는 눈동자들을 본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지지 않으려 잔뜩 각오한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여성분들이셨는데, 모두가 눈짓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잘 왔어요.’
그 눈빛이 내게 전해진 순간 한 달 내내 바짝 곤두서있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준비해 온 얘기, 못할 것 같았던 얘기, 해도 되나 싶었던 얘기까지 모두 놀라울 정도로 거침없이 쏟아졌다.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책을 쓰기까지의 지난 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직면하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글쓰기가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에겐 다 아는 얘기일 수도, 아무런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일 수도, 흔히 듣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말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던지던 시선에는 ‘잘 살아왔어요.’라는 응원마저 담겨있는 듯했다. 그 정도로 따뜻하고 또 따뜻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눈빛만으로 없던 자기 확신까지 생겨난다는 것이.
강의가 끝난 후 직접 이야기 나누게 된 독자들로부터 어찌하여 그렇게 따스한 눈빛이었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혹은 한 명의 딸로서 내가 진심으로 잘 되길 응원했고, 잘 살아내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만나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고. 그런 마음이 눈빛에 담겼던 것이다. 마음에 우러난, 그래서 부담 없이 내게 다가온 ‘환대’였다.
나는 세상에 올 때 어느 정도의 환대를 받았을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그토록 쭈뼛거리며 살아온 것이 참 이상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분명 나의 존재에 대해 ‘잘 왔다.’고 말해준 사람이 그전에도 있었을 것인데. 태어나주어서 고맙다거나 잘 커줘서 고맙다는 눈빛을 던져준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런데도 어째서 그토록 머뭇거리고 흔들리며 살아왔을까. 스스로에 대한 확신 없이 지내왔을까. 수없이 존재했을 환대를 지나친 채 살아냈을까.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환대란 병들었던 사람을 낫게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이 자리에, 이 공간에, 이 세상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환대’란 얼마나 동아줄 같은 것인지. 얼마나 존재의 증명이 되어주는 것인지. 반겨주는 눈빛 하나, 잘 왔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환대를 낭비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가까운 사람들을 진심을 다해 맞이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내가 초대받은 자리일지라도 초대한 이를 환대할 것이다. 당신이 나의 삶에 들어왔음을 환영한다는 마음으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겠다. 남들은 나를 어색하게 웃는 애, 어쩌면 실없는 애라고 생각하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환대할 줄 아는 애, 어쩌면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애라고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