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을 마주하기 위한 준비
청년 문화 불모지, 청년 인구 7천 명이 안 되는 시골에서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건 ‘청년낭만살롱’. 우여곡절 끝에 20명의 멤버가 모집 완료되었다. 멤버 모집만으로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기분이었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모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리엔테이션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에 없던 모임이 생겨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고, 약간의 경계가 내포된 그 호기심은 참여 의사를 표시한 이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용기를 내어 다가와준 18명의 청년들에게 우리가 수상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의심에 가득 찬 시선을 받고 어떠한 사익도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모임임을 해명하는 일은 이후에도 지난한 과정으로 반복된다.)
반대로 우리 역시 모여든 청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고 싶었고, 우리의 방향성을 명확히 알게 된 이후에도 함께하겠다고 할지가 궁금했다. 호기심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에 실망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친목모임이라길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흥성의 만남을 바랐는데 깊이 있는 대화를 요구하는 모임 방식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이런 애석한 일은 모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희망자들은 오리엔테이션을 한 번 경험한 이후 완전한 참여 의사를 밝히기로 하였고, 우리는 심판대에 오르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얼음을 깨듯 가볍게 서로를 알아보자는(혹은 탐색해 보자는) 의미로 오리엔테이션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고려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최대 20명의 청년들이 수용될만한 공간을 찾아야 했다. 첫 만남이니만큼 공간의 분위기는 밝고 탁 트인 느낌이 났으면 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나누기 좋되, 진행자에게 집중할 때도 불편하지 않았으면 했다. 빔 프로젝터와 스크린이 필요했고, 마이크와 음향 시설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이런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이 군에서 운영하는 청년센터 1층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두고두고 행운으로 생각한다. 이후에 겪게 될 공간을 찾아 헤매는 어려움을 이때부터 느꼈더라면 처음부터 커다란 장애물을 느껴 겁먹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성군 청년센터 1층에 위치한 다모아홀은 깨끗한 하얀색 테이블보가 덮인 둥근 탁자가 여러 개 있었고, 파스텔톤의 의자가 테이블마다 다섯 개씩 둘러 놓여 있었다.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공간이어서 다양하게 조명을 활용할 수 있었고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이 미리 설치된 곳은 아니었지만 이동식 설비를 설치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청년센터의 담당 주무관은 우리 모임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먼저 우리를 팔로우하고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도움을 구했을 때도 흔쾌히 나서 준 고마운 이였다. 이때 시설 대관을 위해서 연락을 했을 때도 기쁜 마음으로 맞으며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했던 그녀에게 새삼스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딱 알맞은 공간을 구했으므로 진행할 콘텐츠를 명료하게 그려가기 시작했다. 예정된 오리엔테이션 날짜까지 그리 긴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조금도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모임에 대해 가지게 될 인상이 앞으로 함께할지 말지를 결정할 것이었고 어쩌면 고성 청년들이 꾸려가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단정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면서도 꽉 찬 시간을 보낸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준비하고 싶었다. 웃고 즐기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그런 시간. 그 시간을 위해 머릿속으로 모임 당일을 여러 번 상상해 가며 밤잠을 줄였다.
일단 자기소개는 필연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으레 하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 발표하듯 긴장감 속에서 정해진 정보를 읊는 시간을 가지긴 싫었다. 게다가 우리 모임의 콘셉트는 나이, 학벌, 직업을 밝히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스스로를 소개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모임에 참가자로 참여한 적이 있을 때 첫 만남에서 받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요즘의 자신을 해시태그로 표현해 보세요.]
그때 당시에 내가 어떤 해시태그로 스스로를 표현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걸 생각하는 과정에서 꽤 즐겁고 신선했던 기억은 생생했다. 이걸 좀 응용한다면 새롭고 재밌는 방식의 자기소개가 가능할 것 같았다. 고민하다 약간의 게임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해시태그를 오리엔테이션 전까지 미리 고민해서 제출하고, 그걸 호스트가 정리해 만남 전에 단톡방에 공유한다. 누구의 해시태그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로. 주인 모를 해시태그 다발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미지의 인물을 상상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 첫 만남의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당일, 모임이 시작될 때 해시태그를 다 함께 보면서 어떤 뜻일지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고,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해시태그 다발들의 주인이 누구일지 추리한다. 그리고 모임의 마지막에 가서 두 시간을 함께 지낸 동안 파악한 것을 토대로 해시태그의 주인을 맞추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해시태그란 것이 언더 바(_)를 활용한다면 몇 단어고 늘어날 수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수수께끼처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임이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해시태그 다발 속에 ‘#인싸중의인싸’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모임 내내 누가 가장 활발하고 낯가림이 없는지를 관찰할 것이다. 유난히 티 없고 밝은 사람을 본다면 저 사람이 혹시 그 사람은 아닐까 추리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었다. 이 게임의 이름을 “I Got Your Hashtag!”로 짓고 오리엔테이션의 콘텐츠로 확정했다.
자기소개가 해결되었으니 나머지 시간을 채울 친해지기용 콘텐츠가 필요했다. 불특정한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고 호불호가 없을 만한 내용이어야 했다. 고민 끝에 ‘5초 준다!’라는 보드게임을 선정했다. 어린아이들도 즉석에서 익힐 수 있을 만큼 룰이 쉬웠고, 무엇보다 적당한 긴박함과 신속함이 필요해서 어색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또 게임의 특성상 함께 게임하는 사람들이 어떤 관심사를 갖고 있는지도 가볍게 파악이 가능했다. 짧은 시간에 거리낌 없이 친밀감을 쌓기에 안성맞춤인 게임이었다. 실험 삼아 몇 번의 게임을 직접 해본 뒤, 테이블 수만큼의 보드게임을 구입했다.
함께 즐길 파티게임까지 확정했지만 한 가지 더 해결해야 할 고민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특별할 시간일 순 없겠지만 소외된 사람은 없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MBTI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속속들이 보내오기 시작하는 자기소개 해시태그에 ‘#대문자I’(아주 내향적이다는 뜻이다.)등 본인이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하다는 뜻의 아우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자 조금씩 불안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내성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으로서 그들이 낯선 사람들 속에서 갖게 될 부담감과 조금의 소외감이라도 느껴진다면 돌아서버릴 마음이 미리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자연스럽게 모임에 녹아들게 하고 용기를 북돋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역시 참가자로 참여했던 모임의 첫날 부여받았던 비밀 역할이 떠올랐다. 검색창에 ‘첫 모임 역할’ 등으로 검색을 해보니 으레 활용되고 있는, 효과가 보장된 장치인 듯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의 비밀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몰래 수행하게 한 뒤 마지막에 밝히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보일까 걱정이 큰 사람들도 주어진 ‘역할’이라는 정당성이 생긴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음을 노린 것이다. 그 심적인 알고리즘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효과에 의심이 없었다. 다만 우리 모임의 사정에 맞는 역할을 새로 구상해야 했다. 큰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역할. 고민 끝에 탄생한 역할은 일곱 가지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 역할 카드에 ‘배고픈 이’라는 역할이 적혀 있다면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낯섦을 무릅쓰고 이런 인사말을 건네야 한다.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이제 콘텐츠는 완료되었으니 진행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준비물이 필요했다. 모임의 정체를 명료히 밝힐 수 있는(수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 PPT 자료와 테이블 번호표, 참가자들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 비밀 역할 카드, 간단히 요기를 할 다과 등을 준비했다. 퇴근 후 졸린 눈을 비비며 노트북을 만지고 종이를 오리는 등의 과정이 지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결코 관두고 싶진 않았다. 미리 완성된 문화가 없어도, 누릴 것이 없어도 이만큼 우리끼리 멋진 모임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온통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참여할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모임 시간을 즐거워해줄까, 앞으로도 함께하자는 의사를 밝혀줄까. 모든 과정을 직접 진행하고 사비를 들이는 과정에서 돈도 시간도 체력도 많은 것이 쓰였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 출발한다는 느낌에 고무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고민하는 나를 걱정하고 종이 오리기 하나라도 함께하려고 해 주었던 언니에게도 새삼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의 글에서도 계속 감사할 예정이지만. 그렇게 설렘이 피곤을 압도하여 정신과 몸이 각성하는 밤들이 지나고, 첫만남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