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가 드러내는 고담의, 혹은 우리의 붉은 속살
스크린에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타입. 그래서 <조커>를 보러 가기 전에도 몇 가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공개된 트레일러들을 몇 편 찾아보고, 외신의 평들을 힐끔거리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 영상들을 다시보기했다. 일종의 예방주사였다. 조커가 얼마나 잔인한지는 이미 알고 있다. 고담은 우리가 살아가는 거지같은 현실의 은유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조커가 접수할 고담은, 다크 나이트가 구할 고담이기도 하다. 다 알고 있으니까 무엇을 보든 걱정하지 말자.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커>의 내상을 꽤 세게 입었다. 모든 장면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고통을 눈 돌리지 않고 바라봐주는 것만이, 가해의 공범인 것만 같은 내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기 때문이다.
(이하의 글은 영화 <조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아서 플렉Arthur Fleck. 아서 왕King Arthur을 연상케 하는 이름과 부스러기Fleck 라는 성은 그 자체로 우스운 결합이다. (부모로서 1 페니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그의 어머니는 페니 플렉Penny Fleck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부스러기 같은 존재.)
두 번째 이름은 해피Happy. 망상장애를 가진 페니(어머니)는 그를 늘 행복한 아이, 해피라고 부른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살면서 단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인 페니가, 광대 에이전시의 "Don't stop smiling" 사인이, 머레이 쇼 대기실의 "Put on a Happy Face"라는 낙서가 끊임없이 그에게 웃음을 강요한다. 웃을 수가 없는 '해피'는 자꾸만 입술을 양 옆으로 추켜올리면서 웃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하지만, 웃는 얼굴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는 웃음은 그로테스크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서'와 '해피'를 죽이고 스스로에게 'Joker'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꿈에도 그리던 <머레이 쇼>에 서게 되고, 머레이를 직접 만났을 때 그는 머레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When you bring me out, can you introduce me as Joker?" 그렇게 그는 Joker로서 당당히 세상과 조우하고, 그때부터 모든 것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웃음과의 고약한 관계는 해피, 혹은 아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어린 시절 페니의 학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부 외상 때문에, 그는 때로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것을 통제할 수가 없다. 느닷없이 터뜨리는 웃음은 그의 첫 번째 살인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갈망했던 첫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를 망치고, 존경하고 사랑했던 머레이의 비웃음을 사게 한다.
사회가 원할 때는 웃을 수 없고, 원치 않을 때는 웃음을 멈출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뒤틀림은 그와 사회의 관계 그 자체이자, 그 관계를 끝내 돌이킬 수 없도록 뒤틀어 버리는 촉매가 된다.
하지만 아서와 해피로서 웃지 못했던 웃음을, 조커가 된 그는 마음껏 웃을 수 있다. 가로로 찢어진 입으로 그는 영원히 웃게 될 것이다.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지만, 조커는 말한다. "이제까지는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희극Comedy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찰리 채플린의 <Smile>은 무거운 현악기 사운드가 지배하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멜로디를 가진 배경음악이다.
사회에서 '높은 곳'은 모든 것을 가진 자리이거나 모든 것을 잃은 자리다. 아서의 자리는 후자에 있었다.
한국의 여느 달동네가 그렇듯, 높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곳에 그의 집이 있다. 엘리베이터마저 줄곧 멈춰서는 쓰레기 같은 아파트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병든 어머니 페니 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옆집 여자를 대상으로 행복한 만남을 꿈꿔 보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망상일 뿐이다.
아서의 고통은, 혹은 고담 시의 부조리는 수직과 수평으로 그를 촘촘하게 옭아맨다. 수직적 고통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는 부모에게 네 번 버림받았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친부모에게, 그를 입양한 엄마 페니에게, 코미디언으로서의 정신적 아버지였던 머레이에게, 그리고 잠시나마 육체적 아버지라고 믿었던 토머스 웨인에게.
그런가 하면 일상적 고통은 수평적 관계와 장소에서 발생한다. 광대일을 하던 아서의 간판을 빼앗고, 사정없이 두들겨 패던 이들은 그보다 나을 것 없는 길거리의 불량 청소년들이다. 그를 조커로 만드는 지하철 사건의 가해자들은 화이트칼라 금융사 직원들이지만, 그들을 거대한 권력이나 악의 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배신하는 것은 광대 에이전시의 동료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부조리를 아우르는 고담 시가 아서를 버린다. 복지예산 삭감과 함께 그와 사회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정신 상담은 허무하게 끊어져 버린다. 비슷한 처지의 서민이자 고담의 대리인이라는 양면적 존재인 상담사는, 그의 말을 한 번도 귀 기울여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상담에서조차 기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할 뿐 아서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입장立場은 말 그대로 '서 있는 자리'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지켰을 뿐이다. 하지만 누구도 아서의 자리를 지켜주지는 않았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수 있는 한 뼘의 설 자리마저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굽은 등의 아서로서 올라간 계단을, 그는 춤추는 조커가 되어 내려온다.
(존재를 알 수 없는 친부모를 제외한) 세 부모는 모두 조커에게 죽임을 당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입양 후 아동학대로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후유증을 남긴 페니가 먼저 죽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서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이는 조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상의 페니를 짓뭉갠다. 어린 시절 라디에이터에 묶여서 당했던 폭행을 침대에 메어 있는 어머니에게 그대로 가하면서, 관계는 역전된다. 어머니를 죽인 그는 더 이상 약자가, 아서와 해피가 아니다.
다음으로 죽는 부모는 TV 속의 아버지인 머레이다. 아서는 코미디언으로서의 그를 동경하며, 공상 속에서 그를 아버지처럼 여겨 왔다. 하지만 머레이는 아서의 망쳐버린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을 방송에서 틀며, 그를 전국적인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깊이 사랑했던 가상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욕은, 그의 생방송 쇼에서 머리에 총알을 날리는 것으로 되갚아진다. TV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TV속에서 죽는다.
이제 육체적 아버지(일 것이라고 믿었던)인 토머스 웨인이 남았다. 웨인은 '고담 시의 아버지'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정의롭고, 진심으로 고담 시를 걱정하는 훌륭한 시장 후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신을 아버지로 믿는 아서가 나타났을 때, 웨인은 아서를 위로하기보다는 그의 면전에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한다. 그는 고담의 아버지가 아니며, 그에게 중요한 것은 친아들인 브루스 뿐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웨인은 권총강도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조커>에서는 광대 가면을 쓴 조커의 추종자, 그러니까 조커의 정신적 아들이자 고담의 아들이 웨인에게 총을 겨눈다. 가상의 육체적 아버지는 가상의 정신적 아들에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살인을 지켜본 '진짜 아들' 브루스 웨인이 있다. 그렇게 가상의 형제인 조커와 배트맨의 관계가 시작된다.
가짜 부모들이 죽은 자리에는, 조커와 나머지 고담의 자식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 남았다.
붉은 조커의 잔해가 지나가고 난 스크린에는, 흰 벽의 정신병원과 흰 옷을 입은 아서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잡혀 들어간 것인지, 처음부터 아서가 그곳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모든 이야기는 정신병원 안에서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핏빛 발자국을 남기며 도망치는 아서와 그를 잡으러 다니는 정신병원 직원의 (마치 채플린의 무성영화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게 뭐야? 끝이야?" "헐!" "쿠키 없어?" 같은 웅성거림과 찝찝한, 혹은 다소 복잡한 표정의 관객들이 쏟아져 나가고, 나는 멍하니 타이틀을 바라보다가 거의 마지막으로 상영관을 나섰다. 밖에서는 팝콘과 음료수 잔해를 정리하시는 아저씨 두 분이 손을 바쁘게 놀리며, 5관에서 대체 뭘 했길래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나와?, (그러게 말이야), 지금 걸려 있는 게 뭐지?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조커>에요, 자리가 꽉 찼었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침을 삼키고 화장실로 간다.
그 모든 걸 함께 목격한 우리는 공범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지인이 "<조커> 재밌어?"라고 물어보면, 나는 "그냥 가서 한번 봐"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렇게 공범을 늘리는 것만이, 이 영화가 안겨준 정체 모를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 수 있는 수단일 것 같으니까.
삶에서 수없이 마주쳐 온 아서들의 고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한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너도 같이 봤잖아" 뿐이니까.
그냥, 여러분도, 가서, 한 번 보세요.
+이 리뷰는, 어느 영화 제목처럼 <아주 긴 변명> 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