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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vs 진보, 누가 옳을까?

선거철에 드러나는 시점의 본질

by 관음

선거와 진영

선거철이 되면 세상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이 격해진다. 보수니, 진보니, 좌빨이나 극우니 하면서 서로 진영을 나누고, 다양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며 격렬히 대립한다. 조금의 차이로라도 이기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경쟁이기에, 한 치의 우위라도 점하기 위해 내뱉는 말들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각 진영은 더 단단히 뭉치고, 자기가 속한 진영의 주장에 감정이입하며 싸움에 참전한다.


모임에서 진영이 다른 사람과 정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칫 싸움이 되기 쉽다. 처음엔 건전한 토론을 하자며 시작하지만, 대화가 흘러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지면 안 된다는 이상한 승부욕이 발동되면서 언성이 높아지고 감정도 상하기 마련이다. 결국 "너 몇 살이야?"로 끝나면 볼장 다 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친목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를 금지하는 경우도 많다.


진영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보면, 얼마나 말이 안 통하는지 절감하게 된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증거를 쏟아붓고 논리를 내세워도 상대는 요지부동이다. 상대도 나처럼 똑같이 한다. 서로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TV에 나와 각 진영을 대표해 토론하는 사람들도 결국 자기 말만 하다 가버린다. 보다 보면 답답하다.


어떻게 같은 사안을 두고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저쪽 진영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데,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고 저 당을 지지할 수가 있지? 정말 바보 아냐? 미친 거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진보 쪽 진영에 있는 아들이 나름 합리적인 논리로 무장하고 오랫동안 보수 쪽에 표를 주시는 경상도 토박이인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하다보면 논리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버지와 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말이 안 통한다. 전라도에 사시며 진보 쪽에만 표를 줘온 아버지가 보수 쪽을 지지하며 극우 집회에 다니는 아들에게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득하려 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아버지는 아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나무라고 아들은 아버지가 고리타분해서 변하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탓한다.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런 시각 차이를 잘 들여다보면, 세상의 상대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 생각만 옳고 저쪽은 틀렸다고 여기는 순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된다.

우리 진영의 관점만이 참이고, 반대편은 무조건 거짓이라고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이 '상대적'이라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거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이해할려면 세상의 상대성을 알아야 한다. 시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상대적 세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첫걸음은 타인의 시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오해하지 않게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이 글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도록 안내하려는 글이다.

정해진 옳고 그름은 없다.
모든 가치는 하나의 시점으로 존재한다.


기준은 나!

선거 때면 유난히 우리 진영의 후보는 선해 보이고, 상대 진영의 후보는 악해 보인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 사람 자체의 선과 악일까? 아니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렇게 보이는 걸까?

만약 선과 악이 그 사람 자체에 있다면, 시기나 상황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선하거나 악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에 선해 보이는 후보를 반대 진영 사람들은 악하다고 말하고, 내가 보기엔 악해 보이는 상대 진영 후보를 그들은 선하다고 추켜세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선과 악은 각 후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점이 바뀌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질문을 고구려의 연남생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자.

연남생은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명을 받아 고구려의 장수로 활약했다. 이 시기 당나라는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침공을 감행했고, 연남생은 이러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는 국경지대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고구려의 방어선을 수호했고, 당나라를 침략자이자 철저한 적으로 인식하며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에게 당나라는 명백한 침략자인 악이었고, 고구려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정의로운 나라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한 뒤,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2대 대막리지에 올랐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의 반발에 부딪혔다. 형제 간의 권력 다툼은 격화되었고, 결국 연남생은 정권을 빼앗긴 채 고구려에서 쫓겨나 당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당나라는 망명해온 연남생을 환대하며 그를 ‘낙랑군공(樂浪郡公)’에 봉하고 귀족으로 예우했다. 고구려 내부 사정에 정통한 그는 당나라에 매우 유용한 존재였고, 당은 그를 고구려 정벌을 위한 선전과 군사작전에 적극 활용했다. 관직과 명예를 부여받은 연남생은 점차 조국에 대한 충성심보다, 새로운 진영에서의 생존과 정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그는 당나라의 시각을 자신의 시각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세계도 송두리째 뒤바뀐다.

당나라는 더 이상 침략자가 아닌 자신을 받아준 우호적 국가가 되었고, 고구려는 정벌의 대상이자 ‘악’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그는 당나라 군에 협력하여 조국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게 된다. 668년, 그는 당나라 장수 이세적과 함께 평양성 함락 작전에 참여하였고,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 연남생은 고구려 내부 사정을 토대로 전략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고구려는 마지막 저항의 힘마저 잃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당나라와 고구려라는 세상 그대로였으나, 연남생에게는 그가 서 있는 '진영'이 바뀌면서 적과 아군이 바뀌고, 그에 따라 선과 악의 기준도 완전히 달라졌다. 어제의 선이 오늘의 악으로, 어제의 악이 오늘의 선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변화를 자주 경험한다. 다니던 회사가 좋다가 퇴사하면 단점이 보이고, 세금 정책도 수입과 재산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주식도 사기 전엔 떨어지길 바라다가, 사고 나면 오르기를 바란다.

내가 선 자리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니편 내편, 아군과 적군, 선과 악, 그 기준은 결국 ‘나’다.

나의 가치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기를 바라는가?
괴로움은 여기서 시작된다.



시점이 정하는 대상

아이가 뭔가를 보고 있다. 아이는 뭔가 동그란게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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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왼쪽에 서있는 어른이 보니 동그란 게 아니라 직사각형의 기다란 막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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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아이에게 "그건 동그란 게 아니야, 기다란 막대기야."라고 알려주니, 아이가 "아니야, 동그래~"라고 댓구한다.

어른이 아이 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면 아이는 상처받을 것이다. 나를 거짓말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어른 때문에 너무 억울하고 분통해서 어른에게 적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른이 경험이 많고 아는 게 많다며 아이에게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한다면 아이는 수긍할 수 없다. 아이 눈에 어른은 그저 사물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 자기 말만 옳다는 고집스러운 어른일 뿐이다.


아이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순간, 그건 설득이 아니라 강제가 되고, 때로는 폭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아이는 두려움에 잠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어도 자신이 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저 속으로 반발심을 키우고, 어른을 이상한 사람이라 여기며 멀어지게 된다.


사실 아이도, 어른도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시점에서 본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건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보는 것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데 있다.


이해 없이, 자기 시점만 옳다고 고집하면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조금 더 경험이 있는 어른이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너에겐 동그랗게 보였구나." 그러고는 아이 옆으로 가서 함께 바라본다. "아, 여기서 보니까 정말 동그랗네." 아이의 말에 수긍한 뒤, 어른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옆으로 돌아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 "이쪽에서 보니까 좀 다르지 않니?"

아이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네요! 여기서 보니까 기다란 막대기처럼 보여요. 앞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기다란 막대기 같아요." 아이는 이 변화가 재미있는 듯 즐거워한다.


잠시 후 아이가 묻는다. "그런데 아저씨, 이거 어디가 앞이에요?"

어른은 웃으며 답한다. "그건 우리가 정하기 나름 아닐까? 어디를 앞이라고 할까?"

보는 시점에 따라 사물은 다르게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 사물도, 의견도, 해석도 모두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우리는 왜 자주 간과하게 될까?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닫게 만들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걸까?

이해하면 된다.

상대 이해하기

요즘은 많은 이가 유튜브나 쇼셜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알고리즘이 보는 이가 좋아하는 영상을 주로 보여준다. 내가 좋아하는 영상만 주로 나오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에 갇히기 쉽다. 보면 볼 수록 점점더 시점은 한쪽 끝으로 치우치고 생각이 굳어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보는 시각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옳고 그름이 그 대상에게 있는 고유의 가치처럼 다가 온다.

선거철은 세상의 상대성을 살펴볼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다. 세상의 시각이 극과극으로 나누어지는 시기다. 같은 대상을 두고 어떻게 이렇게 극과극으로 나눠지는지 잘 살펴보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이 좀 더 넓어질 수 있다.

첫 걸음은 내가 속한 진영의 시각에만 몰두되지 말고 반대 진영의 시각도 어떤지를 살펴봐야 한다. 사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보는 시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알지만 지금 내가 온 몸으로 겪고 있는 현실로 들어오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다. 시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쁜 사람 같고 저쪽 진영 사람들은 그냥 틀린 것 같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진정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체감할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이건 당신의 진영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 진영의 시각을 이해하고 거기에 동조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할 뿐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좀 더 키우는 것이다.

한 번, 시간을 내서 반대 진영의 신문이나 영상들을 찾아 보라. 처음에는 듣기 힘들지도 모른다. 때론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마음으로 상대를 연구한다고 생각해보라.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패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나만 안다. 상대를 잘 모른다. 상대를 바보다, 미쳤다고만 치부하며 피하기만하면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칫 우리 진영이 선거에게 지게되면, 늘 바보 같거나 미친 사람들에게 패하면서 이런 저런 핑계로 자기 합리화만 하게된다.

상대 진영의 신문이나 영상을 보면, 그들이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된다. 거기에 달린 구독자들의 댓글을 보면 정말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결코 저런 내용에 동의할 수도 없는데, 다들 공감하고 동조하고 응원하고 지지한다. 거부감이 들 것이다.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거부감이 들지언정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시각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다.

상대 진영의 시각을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해한다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동의는 안되도 이해는 된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도 눈에 보일 것이다. 오래 살펴보고 이해하다 보면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때론, 이해가 깊어질 수록 연민이 생기고 안타까울수도 있다. 그러다 자칫 그들의 시각을 바꿔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한다. 이건 여전히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나의 시각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상대의 시각을 이해하는 일과 거리가 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된다.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할 테니 곧 싸움이 되기 일수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가 되고 심하면 폭력인 될 수 있다.

물론, 당신이 상대의 시각을 바꾸기 위해 도움을 주는 마음으로 노력해도 된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다. 다양한 세상의 시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내가 옳다고 믿는 시각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발전해왔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이 그들의 노력으로 이룬 가치들이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시각을 우리는 받아들이며 산다. 하지만 이때 늘 상대방의 시점을 존중하고 시점의 본질을 잊지 않기 바란다.


시점의 본질, 이해의 시작

선거철이다. 다양한 시각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시기다. 열정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되, 이 시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가치는 상대적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세상에 정해진 가치는 없다. 정해진 옳고 그름도 없다.

가만히 살펴보라. 선거를 단지 진영 싸움으로만 보지 않고, 다양한 관점이 부딪히는 현장으로 바라보며 흥미롭게 참여해보라. 그렇게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상대적인 세계의 본질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는 점점 깊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편견과 오해도, 마치 낡은 껍질처럼 하나씩 벗겨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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