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받았다면 아파하라
* 영화의 분량이 방대하여 글이 깁니다. 그만큼 느낀 점이 많은 영화였다는 뜻이겠죠. 참고하셔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상처가 있을 것이다. 다시는 기억 바깥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순간 말이다. 나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 터지면 외면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여길 때가 많다. 지금 순간만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를 받은 개인 스스로가 그 상처를 똑바로 마주하고 들여다봐야만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흔히 '시간이 약이다'라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랄까. 상처를 받았다면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화도 내고, 절망하기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하면서 그 시간들을 겪어내라고,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그 주제를 이끌어내는 이야기가 매우 독특하면서도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말미에 와서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두 번 연달아서 보고, 시간 텀을 두고 세 번째 관람까지 마쳤다. 그리고 꼭 후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영화였다.
*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1. 프롤로그
먼저 영화의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사건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가후쿠와 아내 오토는 오래전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픔을 가진 부부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들의 섹스 장면이 나올 때만 해도 부부의 관계는 좋아 보이지만, 섹스 도중에 오토가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음 날이 되면 오토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가후쿠가 다시 오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오토는 각본을 쓰고 있다.
어느 날 해외출장을 가려 공항으로 갔다가 비행기가 결항되는 바람에 시간이 붕 떠버리게 된 가후쿠는 그냥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에, 조용히 다시 그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가후쿠와 오토,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죽은 아이의 기일에, 가후쿠는 어쩐지 조금 화가 난 듯이 오토와 섹스를 한다. 자신이 외도를 목격했을 때와 같은 체위로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섹스 도중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오토. 다음 날에 오토는 가후쿠에게 '이야기'에 대해서 묻지만, 그는 잊어버렸다고 말해버린다.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만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 오토와, 그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하게)하고 싶지 않은 가후쿠. 오토는 가후쿠를 배웅하며 무언가 결심이 선 듯 '할 말이 있다'고 말한다. 가후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밖에서 배회한다. 그리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건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는, 아내 오토의 시체였다.
2. 세 가지 이야기
장장 40분여의 이 프롤로그 뒤에 영화는 2년 뒤의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데,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으로 영화의 메인 스토리라인을 이루는, 연극 연출자이자 배우인 주인공 가후쿠가 히로시마 연극제의 연출을 맡게 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이다. 연극제 무대에 '바냐 아저씨'를 올리기 위해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연극을 연습하는 과정이 그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아내 오토의 외도 상대였던 젊은 남자 배우 '다카츠키'가 연극 오디션에 등장을 하고, 캐스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본인이 연기했지만 아내가 죽고 난 후 트라우마 때문에 더 이상 맡을 수 없게 된 주인공 바냐 역까지 다카츠키에게 내어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오토가 생전 가후쿠와 섹스를 하면서 내뱉었던, 바로 그 이야기이다. 한 여고생이 짝사랑하는 남학생 야마가의 집에 몰래 찾아가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물건을 은밀히 그의 방에 놔두고, 야마가의 물건을 훔치기까지 하는,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의 '징표'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인데, 처음엔 그저 부부가 나누는 외설적인 이야기겠거니 했던 생각은 이 이야기의 발화자인 오토가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 때문에, 굉장히 특이한 지점을 지니게 된다. 본인이 지어낸 이야기를 이야기의 관객으로부터 전해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기억을 못 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토가 죽기 전 날 가후쿠에게 했던 여고생 이야기를 잠깐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여고생은 어느 날 자신의 전생을 떠올리게 되는데, 여고생은 전생에 '칠성장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칠성장어처럼 물고기에 붙어 체액을 빨아먹는 것이 아닌, 바닥의 돌에 입을 대고 해초처럼 파도에 흔들리기만 하는, 고귀한 칠성장어였다고. 언제나처럼 남학생 야마가의 집에 몰래 들어와 시간을 즐기던 여고생은 자신의 전생과 지금의 상황이 다를 바 없다고 깨닫게 된다. 돌에 딱 붙어있던 것처럼 야마가의 방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고생은 여태 자신만의 규칙 때문에 절대 하지 않았던 자위행위를 야마가의 침대 위에서 하게 된다. 여고생은 눈물을 흘리며 이번에는 이 눈물이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와는 달리 집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야마가의 방으로 올라오는 계단 소리까지 들린다. 여고생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박탈감과 그래도 이제 멈출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오토가 죽던 그날 아침, 가후쿠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물어봤을 때에 그가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하자, 할 말이 있다고 가후쿠에게 무언가 예고된 고해성사를 하려 하는 태도에서 적어도 이때 한 번만큼은, 그녀가 여고생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본인의 외도를 가후쿠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본인의 외도를 고백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후쿠 또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을 테고 말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사실이고 싶어 하는, 모르는 사실이어야만 하는 가후쿠의 심정과, 여고생의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본인의 외도를 알리고자 했던 오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후쿠가 여고생의 이야기를 외면해버린 그날에, 오토는 죽게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이제는 정말 알면서도 모르는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단절되어 버린 것만 같다. 오토의 죽음은 이야기의 죽음으로 묘사된다.
마지막 이야기는 가후쿠가 연출하고 주연배우까지 맡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조차도 단순히 가후쿠의 직업을 소개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 대사로서 은유되거나,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복선이 되거나, 혹은 중요한 상징처럼 쓰이기도 한다. 희곡의 주인공인 '바냐'는 본인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절망적인 사건들 앞에서 비관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런 바냐를 연기했던 가후쿠가 읊는 대사들은 묘하게 그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의 바냐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차를 타고 다닐 때 대사를 녹음을 해서 외우곤 했었는데, 바냐가 아닌 다른 역할을 오토가 녹음해준 것으로 영화에서 나온다. 이 습관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차에 타면 마치 안전벨트를 매는 것처럼 당연히 대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하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오토가 죽은 후부터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바냐 역할을 할 수 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3. 가후쿠와 다카츠키
다카츠키는 왜 가후쿠를 찾아온 것일까. 오디션에 합격하고 대본 리딩 과정을 진행하면서 다카츠키는 가후쿠와 두 번 술자리를 가진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 다카츠키에게 '오토를 사랑하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가후쿠. 다카츠키 또한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후쿠는 오토의 내연 상대가 다카츠키라는 것을 알고, 다카츠키 또한 오토와 자신의 불륜을 가후쿠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너무나도 덤덤해 보이는 가후쿠와 당당해 보이는 다카츠키의 모습이 비친다. 두 번째 술자리에서 다카츠키는 가후쿠의 차를 타고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까지 가게 되는데, 이때 그들의 대화가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으로 나온다.
오토가 가후쿠에게 하던 여고생 이야기의 뒷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이야기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가후쿠에게만 한 줄 알았던 그 이야기를 다카츠키에게는 뒷부분까지 했다는 사실이 특이한 지점이었다.
여고생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고생 이야기의 뒷부분은 이러하다. 언제나처럼 남학생 야마가의 집에 몰래 들어와 시간을 즐기던 여고생,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와는 달리 집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야마가의 방으로 올라오는 계단 소리까지 들린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야마가도, 그의 부모님도 아닌 강도였고, 여고생을 발견한 강도가 그녀를 강간하려 하자, 여고생은 펜으로 강도의 눈을 찔러 죽이게 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른 여고생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죄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다음 날이 되어도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특히 학교에서 마주친 야마가조차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고생은 기시감을 느끼고 다시 야마가의 집에 찾아가 보지만 그 집 역시도 여느 때와 똑같이 평화로운 일상 그대로임을 알게 된다. 다만,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그것은 집 현관 앞에 새로 생긴 CCTV였다. 결국 여고생은 CCTV에 본인의 얼굴을 똑바로 들이대고선 말하면서, 이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여고생은 몇 번이고 힘주어서 똑똑히 말한다.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라고..
여고생의 이야기에선 여고생이 죽인 것이 야마가의 집에 침입한 강도였지만, 이 이야기가 죽은 오토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가후쿠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영화에서 여고생이 비유하는 것은 이야기의 발화자인 오토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오토가 죽인 것은 자신의 외도로 인한 '부부관계'일 것이다.
또한, 여고생을 가후쿠에게도 대입해볼 수가 있는데, 이 경우엔 아마 본인이 조금 더 일찍 집에 왔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오토의 죽음에 해당이 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엔 일종의 영화적인 장치로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오토의 죽음 이후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덤덤하게 살아가는 가후쿠 내면에 숨겨진 죄책감과 후회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여고생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은 다카츠키에게도 이 경우가 해당될 수 있다. 원래 다카츠키는 미래가 촉망되는, 젊고 잘 나가는 배우였었다. 그러나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그는 결국 터지고만 스캔들 때문에 커리어를 망치게 되고, 연극무대에 서기 위해 히로시마까지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본인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 대해 과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가후쿠와의 두 번째 술자리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는 사람과 시비가 붙게 된 다카츠키는 결국 폭행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라고 말하는 다카츠키의 표정에서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것만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다카츠키는 이 사건으로 결국 연극 리허설 도중 들이닥친 경찰들에 의해 끌려가게 되고, 연극의 주인공인 '바냐 아저씨' 역할은 갑작스레 공석이 되어버린다. 연극제 스태프들은 주인공 역할을 가후쿠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오토의 죽음 이후 연기를 할 수 없게 된 가후쿠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이틀 정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오토의 여고생 이야기는 다카츠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발화된다.
'자신은 자신이 한 일의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 일도 없던 듯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위에 설명했듯 오토, 가후쿠, 다카츠키의 상황에 대입해본다면, 그들이 마주하지 않고 외면했던 사실들과, 그로 인한 비극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다카츠키는 이번에는 본인의 생각을 가후쿠에게 담백하게 전달한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마음과 능숙하게 솔직하게 타협해가는 것 아닐까요? 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4. 가후쿠와 미사키
미사키는 히로시마 연극제의 특이한 전통으로 인해 연극제 기간 동안 가후쿠의 차를 몰게 된, 일종의 '기간제 운전기사'였다. 히로시마 연극제는 과거의 사고 때문에 연출자에게는 항상 운전기사를 따로 붙여주는 조건이 있었고, 그것을 미리 듣지 못한 가후쿠는 본인이 애지중지하며 관리하던 차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 한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소개받은 운전기사는 딱 봐도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어린 여자. 시범 삼아 테스트 드라이브를 맡겨보라는 연극제 관계자들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운전대를 내어주는 가후쿠. 숙소까지 가는 길 동안 깔끔한 운전을 해낸 후로는 본인의 차를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처음 맡기게 된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모습반 보여주던 가후쿠와 미사키 사이의 관계는, 가후쿠가 연극제 스탭인 '윤수'를 그의 집에 데려다주던 날에, 윤수가 자신의 집으로 가후쿠와 미사키를 초대해 저녁을 먹으면서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윤수는 가후쿠에게 미사키의 운전 실력은 어떤지 묻는다. 가후쿠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며 미사키의 운전에 대한 칭찬을 하는데, 머쓱해진 미사키는 자리를 슬쩍 뜨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미사키는 식사 자리가 좋았다며 연극 연습하는 걸 보러 가고 되냐고 가후쿠에게 묻는다. 가후쿠는 흔쾌히 보러 오라고 하지만, 미사키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죄송하다며 그 말을 취소한다. 황급히 말을 돌리며 가후쿠가 늘 듣던 대본 연습용 테이프를 틀겠다는 미사키. 그러나 항상 테이프를 틀어놓고 아무 말이 없던 가후쿠가 이번에는 미사키에게 말을 건네게 된다. 테이프의 목소리가 누구냐고 묻는 미사키에게 아내 오토의 목소리라고 말하는 가후쿠. 그는 아까 운전에 대한 칭찬은 진심이었다며 어디서 운전을 배웠냐고 그녀에게 묻는다. 미사키는 고향에서 중학교 때부터 운전을 배웠다며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가후쿠에게 하게 된다.
미사키의 고향은 홋카이도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차가 없으면 생활이 어려운 곳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삿포로에서 술장사를 했고, 그런 어머니를 삿포로까지 가는 전철역까지 태워주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운전을 배워야만 했던 것. 폭력적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차를 타는 동안 잠을 자고 싶어 했고, 조금이라도 잠을 깨울만한 운전을 하면 운전석을 발로 차기도 하고 그녀를 때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는 맞기 싫어서 운전을 잘하게 된 것이었다.
다카츠키가 같은 연극에 출연하는 여자 출연자와 노느라 연극제의 연습 시간이 지각을 한 날,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어디든 바람 쐴만한 곳으로 가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가후쿠를 데려간 곳은 쓰레기 처리시설. 그곳을 둘러보고 난 후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어떻게 히로시마에 오게 됐는지 묻는다. 그녀는 5년 전에 자신의 고향에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 집이 묻히게 되었고, 그 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차를 끌고 무작정 달려오다 히로시마에서 차가 고장 나 버려 이곳 쓰레기 처리시설의 차를 몰게 되어 정착하게 된 사정까지 가후쿠에게 말하게 된다.
가후쿠 또한 미사키에게 오토가 2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미사키의 나이가 자신의 딸이 살아있었다면 꼭 같았을 스물세 살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시간이 다시 흘러, 미사키는 다카츠키가 가후쿠의 차 안에서 그가 머무는 호텔까지 이동하며 말했던, 오토의 '여고생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운전석에서 듣게 된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미사키는 가후쿠와 오토, 그리고 다카츠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셈이다.
다카츠키를 호텔에 내려준 후에, 가후쿠는 연극제 기간 내내 앉아있던 뒷자리에서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미사키와 차에서 담배를 같이 태운다. 그동안 그가 금기시했던 행위였던 차 안에서의 흡연을 어느새 낯선 곳에서 낯선 소녀와 같이 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들의 정서적인 거리가 한껏 가까워졌음이 느껴졌다. 선루프를 열어젖히고 하늘을 향해 내민, 손에 쥐어진 두 개비의 담뱃불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들의 관계는 마치 유사 부녀와 같이 그려진다. 미사키에겐 죽은 엄마가 있고, 가후쿠에겐 죽은 아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또한 미사키의 나이는 가후쿠의 딸과 같다. 그들은 직시해야 할 아픈 순간을 피해 도망쳐 왔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스스로의 아픔을 마주해야 할 순간은 다가오고야 만다.
다카츠키가 경찰에 연행된 이후, 다시금 연극의 주연인 '바냐 아저씨' 역할을 제의 받게 된 가후쿠는 이틀 간의 시간을 달라고 연극제 스태프에게 말한 후, 미사키에게 조용히 생각할만한 곳으로 차를 몰아달라며 그녀의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고 말하는 미사키, 하지만 단호한 그의 태도에 홋카이도를 향해 차를 몰아가게 된다.
한참을 달려 홋카이도로 가던 중, 가후쿠는 오토가 죽던 날 이야기를 한다. 오토의 외도를 알면서 모른 척했던 자신과, 그날 아침 오토의 결의에 찬 태도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살릴 수 있었던 오토를 죽게 한 것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미사키는 위로 대신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사키 또한 집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죽게 내버려 뒀다는 이야기 말이다.
마침내 도착한 미사키의 집. 그곳에서 미사키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꺼낸다. 그녀의 어머니에겐 한 가지 인격이 더 있었다는 것. 미사키에게 심한 폭력을 쓴 후 자주 나타났던 '사치'라는 어린아이 같은 인격과 노는 것이 좋았다는 그녀. 이유도 없이 자주 울던 사치를 미사키는 등을 어루만져주며 달래주기도 했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실제로 정신병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붙잡아두기 위한 연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후쿠는 자신의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자신은 제대로 상처받아야 했다며, 실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진실을 외면하고 못 본 척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자기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못했기에, 아내인 오토를 잃게 된 거라고 말이다.
결국 모든 진실은 오토가 말하는 이야기 속에 있었음에도,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한 가후쿠는, 오토가 죽음으로써 이야기를 상실하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한참 전에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 그리고 어쩌면 오토와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 딸의 죽음을, 유사 부녀 관계로 표현되는 미사키와의 만남과 이야기에서 회복함으로써, 진정으로 극복하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어쩌면 오토의 여고생 이야기 속에서 여고생이 외치는 '내가 죽였어'의 대상이, 오히려 딸의 죽음에 대한 오토의 죄책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홋카이도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우는 가후쿠와 미사키. 가후쿠 뿐 아니라 미사키 또한 도망쳐왔던 과거의 상처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고, 가후쿠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연극을 할 수 있게 된 가후쿠와 그 연극을 지켜보는 미사키의 모습에서,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나아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뿌듯해졌다.
5. 가후쿠와 유나
'유나'는 극 중 가후쿠가 연출하는 '바냐 아저씨'의 오디션을 보러 온 청각장애인 배우이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바냐 아저씨'는 굉장히 특이한 기법이 있는데, 배우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국적이 서로 다른 배우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연기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텐데, 청각장애인이라 수어로 연기를 해야 하는(게다가 영화에서 유나는 한국인이므로 '한국어 수어'를 사용한다) 유나가 오디션을 보는 장면은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몰입을 하게 만든다.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가 청각장애를 가진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가 '이야기'를 듣는 것에 있어 다른 언어라든지 심지어 장애까지도 넘어서는, 극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연극 '바냐 아저씨'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두 번째 챕터에서 언급했듯, 영화는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이 이야기들은 각각 서로가 서로에 상응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바냐 아저씨는 외조카인 소냐와 함께 매형 명의의 시골 별장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바냐의 매형(이자 소냐의 아버지)인 교수 세레브랴코프는 퇴임을 하고, 젊은 두 번째 부인인 엘레나와 함께 시골로 돌아온다. 그전까지 뛰어난 예술가라고 믿었던 자신의 매형을 존경하던 바냐는 시골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내는 모습에 실망하게 되지만, 사실은 매형의 두 번째 아내인 엘레나를 바냐가 흠모하기 때문인 탓이 더 컸다.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커져가던 와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세레브랴코프가 별장을 팔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버리게 된 것이다. 매형에게 본인의 사랑과 터전까지 뺏기고 모든 것에 낙담하고 절망해버린 바냐를 외조카인 소냐가 위로해주며, 극은 마무리된다.
필자도 체호프의 희곡을 제대로 읽어보거나 연극을 보진 않았기에, 생략된 부분도 많고 정확한 내용이 아닐 수는 있다. 중요한 건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와 외조카 소냐는 유사 부녀 관계로 나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후쿠가 연출하는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 역을 맡은 것이 바로 유나인 것이다.
오디션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 유나는 의외의 곳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연극제 스탭인 윤수가 가후쿠와 미사키를 본인 집으로 초대해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할 때 윤수의 아내로 등장하게 된다. 윤수가 오디션 때 유나의 수어를 통역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다. 저녁식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원래 무용수였던 유나가 연극 오디션에 지원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묻게 된 가후쿠. 사실 유나는 임신을 하게 되어 일을 쉬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유산을 하게 됐고, 다시 일을 하려고 해도 그 후로부터는 몸이 움직이지 않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남편 윤수의 추천으로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는 것.
아이를 잃고 춤을 출 수 없게 된 유나와 아내를 잃고 연기를 할 수 없게 된 가후쿠의 트라우마에 대한 공통점, 그리고 둘 모두 아이를 잃은 아픔이 있다는 것도 겹치는 부분이다.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난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유나가 소냐 역할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며 연극을 보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그렇다. 영화의 현실 파트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에서 가후쿠와 미사키가 유사 부녀 관계인 것처럼, 가후쿠가 연출하고 연기하는 '바냐 아저씨'에서 가후쿠(바냐)와 유나(소냐) 또한 유사 부녀 관계이다. 영화는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에 대해 처음 사적인 대화를 하는 시작부터, 미사키와 유나를 서로 대응하는 관계로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트라우마를 극복한 가후쿠가 바냐를 연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연극 '바냐 아저씨'는 모든 것을 비관하고 낙담한 바냐에게 외조카인 소냐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 장면을 시각적으로도, 영화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도, 심지어는 청각적으로도 감명 깊게 그려낸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앉아있는 바냐를 마치 뒤에서 백허그하듯 안은 소냐가, 자신의 언어인 수어를 통해 바냐의 눈앞에서 그림을 그리듯 말을 전한다. 사실 이 수어가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선 바냐와 소냐가 서로 마주 본 상태로 전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영화는 소냐가 위로의 말을 전달하는 대상이 바냐이기도 하면서 또한 이 연극(혹은 영화)을 보는 관객인 것처럼 말을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이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씬임에도 불구하고 몰두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훌륭한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6. 가후쿠와 오토, 그리고 칠성장어
다시 가후쿠와 오토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오토가 죽기 전 날 했던 여고생 이야기에서 여고생은 전생에 '칠성장어'였다고 했다. 다른 물고기에 붙어서 체액을 빨아먹는 다른 칠성장어와 달리 바닥에 돌에 붙어 해초처럼 흔들리다가 언젠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그런 존재. 그리고 여고생은 남학생 야마가의 방이 마치 전생의 돌과 같아서 떨어질 수가 없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딸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어긋나 버린 가후쿠와 오토의 부부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여고생은 야마가를 짝사랑하지만, 결고 야마가에 닿지 못하고 야마가의 방에서 자신의 징표를 남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야마가에게 이런 기괴한 행위를 들키면 안 되기에 몰래 집에 들어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물건을 야마가의 방에 남긴다던지, 없어져도 알 수 없을만한 물건을 훔쳐가는 행위는, 딸의 죽음 이후 무너져버린 오토가 가후쿠에게 보냈던 구조 신호였을 것이다. 우린 제대로 상처받지 못했다고,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고 덤덤해져 버렸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 괜찮아진 것처럼, 시간이 해결해준 것처럼 보이는 서로에게 그 일을 다시 꺼내어 상처를 헤집고 싶지 않았기에, 야마가에 직접 닿지 못하고 야마가의 방에만 머물러야 했던 여고생처럼, 상처를 마주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미끄러지기만 했던 가후쿠와 오토의 지난 이야기들이 애달펐다. 여고생이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전생의 돌바닥과 같은 곳에서 붙어있기만 했듯, 그래서 결국 자신의 규칙을 어기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해버린 것처럼, 오토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규칙을 어기고 외도를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여고생이 자신의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에 대해 안도하듯, 오토는 자신의 외도를 들키는 것으로 가후쿠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딸의 죽음까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딸의 죽음에 대해 가후쿠가 자신을 책망하고, 비난하고, 그럼에도 다시 감싸 안아주기를, 오토는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칠성장어는 끝내 돌에 붙어 해초처럼 흔들리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고, 여고생은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일상은 변화가 없었다. CCTV 앞에서 '내가 죽였어'라고 계속 외치는 것은, 오토가 죽던 그날 가후쿠에게 '내가 불륜을 저질렀어'라고 말하려고 했다는 것에 대응한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녀는 그녀의 전생일지도 모를 칠성장어처럼 돌에 붙은 채로 흔들리다 죽어버리게 된다. 이야기(진실)는 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입에서 전해지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입에서 전달되는 방식으로(다카츠키가 가후쿠에게 전달하는 것) 닿는다. 오토는 여고생의 이야기를 통해 가후쿠에게 계속 신호를 보냈고, 심지어 그것을 기억했다가 자신에게 다시 되돌려주기를 원했지만, 가후쿠는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한 죄로, 아내의 외도 상대에게서 이야기의 최후를 듣는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다.
7. 에필로그, 맺으며
영화에서 죽은 딸의 역할을 하는 미사키와 유나의 대사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후쿠와 오토의 비극의 시발점이자 근원은 어린 딸의 죽음부터였고, 오토의 죽음으로 단절된 이야기는 미사키와의 관계에서부터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미사키가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죽은 딸이 오토를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치환할 수 있는데, '가후쿠 씨는 오토 씨의 그 모든 걸 진짜로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가요?'라는 대사는 그래서, 죽은 딸이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된다. 가후쿠는 그 말을 들은 후에 비로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반면, 유나의 대사는 '바냐 아저씨'라는 일종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가 있을 것이고, 그 상처를 '영화 속 연극무대'라는 장치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유나의 대사는 그 무대를 어디까지 정하느냐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게 되는 방식의 연출을 취한다. 연극 무대로만 한정한다면 유나가 하는 대사는 그녀가 연기하는 소냐가 바냐 아저씨에게 하는 대사로만 볼 수 있겠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것은 가후쿠의 딸이 가후쿠에게 하는 위로의 말로 볼 수 있다. 공간을 한 단계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화를 보는 관객인 우리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듯 영화는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기만 했던 가후쿠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확장하여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물음을 던지고, 또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마지막에 '바냐 아저씨' 연극을 보는 미사키가,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영상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전혀 다른 캐릭터로 나오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을 미사키의 형상을 빌려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볼 때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였던 에필로그 장면이 두 번째 봤을 때 또 다르게 느껴지고, 세 번째 볼 때에는 그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이미 3시간 분량의 영화에 필요치 않은 것 같은 에필로그를 굳이 넣은 이유는, [드라이브 마이 카] 라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이야기에게 말을 건네는, 영화 외적으로도 이야기가 이야기에게 말하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지난 6월 말경에 1회 차, 2회 차 관람을 하고 바로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한참을 써 내려가다 머릿속에서 글이 정리가 되지 않는 바람에 한참 동안 글을 손대지 않고 있다가, 두어 달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졌다. 계절 하나가 지나 가을의 문턱이 되어서야, 꼭 완성하고 싶었던 글을 완성할 수 있게 되어서 후련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기분이다. 2022년에 관람했던 작품 중에선 단연 최고로 꼽을만한 영화였고,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좋은 감독을 알게 되어서 그의 다른 영화들도 찾아보게 되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소냐 역할을 한 유나가 바냐 역할을 한 가후쿠에게, 그리고 훌륭한 영화를 본 여러분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을 마지막으로, 영화만큼이나 긴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