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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Sep 28. 2023

푸른 그늘에서 노란 햇볕으로, [애프터썬]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성인이 된 후에 아버지와 둘이서 보낸 추억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쩐지 아버지는 무뚝뚝한 가장인 채로 있는 것이 어울린다고 은연중에 여겨온 것 같아요. 그래도 아주 어린 시절에는 단 둘이서 야구장에 가거나 여행을 다녔던 행복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유년시절의 그 몽글몽글한 추억이 떠올랐어요. 정확하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도 않고, 어떤 것들은 왜곡되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사춘기를 지난 후 어쩐지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가까운 기억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의 유대가 어쩌면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의 저에게 영화 [애프터썬]은 그런 흐릿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더듬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주인공 소피가 31살의 생일에 문득 떠오른 아버지와의 추억을 더듬으려 소피가 11살, 아버지 캘럼이 31살일 때 다녀온 튀르키예 여행 영상을 틀게 되고, 그때를 회상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사실 소피와 캘럼은 부녀지간이지만 함께할 수는 없었습니다. 캘럼과 어머니는 이혼한 사이이고, 소피는 캘럼이 아닌 어머니가 키우는 상황입니다. 그런 캘럼과 소피가 모처럼 함께 해외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지요.


영화는 얼핏 소피의 입장에서 그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저도 처음 영화를 볼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고요.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다시 한번 감상하고 나면 그들의 여행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소피의 아버지에 대한 진한 감정이 깃들은 ‘상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 캘럼은 아마도 소피와의 여행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몇몇 장면에서 캘럼의 우울증을 암시하는 모습이 나오죠. 여행이 끝나고 공항에서 소피를 바래다주는 캠코더 장면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던 것입니다.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던 탓에, 아버지의 어두운 면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들떠있었던 소피가 몇 남지 않은 낡은 캠코더 영상을 보고 흐릿해진 기억의 조각을 끼워 맞추며,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11살의 소피의 입을 빌어 하게 됩니다. 당시의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싶은 심정을 담아서 말이에요.


영화는 당시에 찍은 캠코더 영상 장면과, 소피의 회상(혹은 상상) 장면, 그리고 중간중간에 잠깐씩 스쳐가듯 나오는 클럽에서의 깜빡이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캠코더로 녹화된 장면들은 당시에 있었던 사실일 것이고,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행 장면들은 아마 31살이 된 지금의 소피가 당시를 추억하며 ‘아마도 아버지는 이랬을 거야’ 혹은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와 같은, 소피의 회한과 간절함을 담은 상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장면 - 시끄러운 클럽, 깜빡이는 조명 아래에서 가만히 서 있는 지금의 소피와, 춤처럼 보이기도 하고 괴로움에 절규하는 것처럼도 보이는 몸짓을 하고 있는, 캘럼의 모습 - 이 나옵니다. 1회 차 관람 때에는 도대체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았어요(아마도 그렇게 연출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마치 꿈속 같은 이 장면이 꼭 필요했던 이유가 납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장면 때문에,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다시 시작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돼요. 2회 차 관람에서는 11살의 소피가 하는 말들이 실제 11살 당시의 소피가 아니라, 31살이 된 소피가 하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이 점이 [애프터썬]이 가진 가장 뛰어난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캘럼의 행동들, 이런 장면에선 항상 푸른 빛이 돈다.


행복해 보이는(그리고 행복해야만 할 것 같은) 부녀의 여행 장면과는 대조되는 어두운 분위기의 배경음악,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없이 밝은 11살의 소피와 반대로 어딘가 불안정하고 그늘져 보이는 캘럼의 눈빛, 평범하고 소소한 여행의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영화 내내 이어집니다. 치기로 가득한 소피에게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면서 불안해하면서 영화를 지켜보게 되더라고요. 이번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영화를 관람하니, 영화 곳곳에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장치를 해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밝은 ‘노란색’은 소피의 색으로, 우울하고 어두운 ‘파란색’은 캘럼의 색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노란색의 이미지는 소피가 아버지 캘럼에게 가진 감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많이 쓰입니다. 호텔에서 열린 작은 파티에서 ‘마카레나’를 추는 사람들의 옷 색, 캘럼과 소피가 수영을 하면서 서로를 찍어주던 수중카메라의 색, 아예 소피가 노란색 티셔츠를 입기도 하고요. 반면 호텔 수영장의 색, 스쿠버다이빙을 떠났을 때 바다의 색,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캘럼이 입는 티셔츠의 색은 모두 파란색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톤이 다르다. 캘럼은 푸른 배경, 소피는 아예 노란색 티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이 색상의 대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한 번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캘럼은 호텔의 화장실에 앉아서 팔의 깁스를 풀기 위해서 남은 한 손에 가위를 든 채 끙끙대고 있고, 하나의 벽을 두고 거실 소파에 앉은 소피는 11살이 읽기에는 조금 수위가 있는 잡지를 읽고 있습니다. 소피가 있는 거실 공간의 조명은 노란빛이고, 캘럼이 있는 화장실의 조명은 푸른빛입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소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거실과 화장실 사이에 있는 ‘벽’이라는 공간이 화면의 중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소통이 막혀있는 것이지요. 아버지 몰래 흥미로운 잡지를 읽는 것이 그저 즐거운 소피는 노란 조명 아래에서 아버지의 공간을 등 뒤로 한 채, 깁스를 자르려다가 실수로 본인의 팔에 상처를 냈지만 그것을 굳이 소피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어쩌면 알아줬으면 하는), 파란 조명 아래의 캘럼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들은 - 앞서 계속 언급했듯 - 현재 시점 소피의 상상의 산물입니다. 11살의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고 해서 어느 누가 그것을 탓할 수 있을까 싶지만, 어느새 당시의 아버지 나이가 된 소피에게는 그 순간들이 모두 붙잡고 싶은 안타까운 순간들일 것입니다. 캘럼의 그늘을 알아주지 못했던 스스로를 탓함으로써, 그렇게라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고 그리워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슬펐던 장면. 한 장면 안에서 색의 대비와 벽을 통해 두 사람의 감정선을 표현했다.


‘애프터썬aftersun’은 강한 햇볕에 화상을 입은 피부에 바르는 연고 혹은 로션이라고 합니다. 수영장에서 캘럼이 소피에게 애프터썬을 발라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있고, 첫 관람 이후에는 영화의 제목이 소피가 받은 유년시절의 상처 - 아버지 캘럼의 죽음 - 에 대한 치유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3회 차 관람까지 하고 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치유의 대상은 소피뿐 아니라, 아버지와 꼭 같은 나이가 된 소피가 당시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캘럼이 햇볕을 피하려 숨은 그늘(파란색)에서 벗어나, 햇볕(노란색) 아래에서 피부가 타버리더라도 치유받을 수 있도록 손을 건넨 것 아닐까요. 비록 20년 전의 진실에 영원히 닿지는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또한, ‘태양 이후after sun’의 시간, 즉 노란 빛의 낮이 지나고 어둠이 깔린 푸른 빛의 시간을 뜻하는 중의적인 제목인 것도 같습니다. 11살의 소피 시점이 아닌 31살의 소피가 다시 해석하는 여행은, 아버지 캘럼의 푸른 빛으로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 글을 보고 영화를 보실 분들이 ’노랑‘과 ’파랑‘의 이미지에 주목하면서 시청하신다면, 색다른 관점으로 보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바다는 푸른색, 햇살은 노란색, 맞잡은 손에 비추는 따뜻한 햇살.


2022년이 [드라이브 마이카], [헤어질 결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영화들로 기억되는 한 해였다면, 올해는 [애프터썬]으로 기억되는 해가 될 것 같아요. 여름의 강한 햇살에 타버린 피부처럼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 [애프터썬]이었습니다.




[애프터썬]은 넷플릭스에서 현재 시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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