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_박웅현
현재에 기대어 삶을 바라보다
#. 근처에 낮은 산이 있다. 신중한 고민거리가 있을 때, 종종 산을 오른다. 어릴 땐 정상을 향하는 걸음에 무게를 싣고 올라감에 집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산을 올라가는 순간의 경험에 집중한다. 산의 초입에서 맡게 되는 흙냄새, 새소리 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도시 속에서 경직된 사고를 유연하게 이완시켜 준다. 그렇기에 나는 정상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단 능선의 바람을 맞는 것을 좋아하고, 산 중턱 계곡의 적당한 자리에 앉아 가능한 멀리 볼 수 있는 곳까지 바라보려 애쓴다. 정상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나만의 공간이 아니지만 내가 의미를 부여한 그곳은 나를 특별하게 감싸준다. 이런 습성이 독서 습관에도 새겨져 있다 생각한다. 책을 빠르게 읽는 것보단 단락마다 문장마다의 의미에 신경을 쓰며 독서를 했다. 스스로 습득한 이 방법을 '감각하며 읽기'라고 칭하며 많은 서적들을 읽어 나갔다. 나의 이런 독서법과 박웅현 작가가 제시하는 촉수를 예민하게 뻗는 느낌이 제안하는 방향이 같다고 느껴졌기에 강한 공감을 느끼며 반가운 마음으로 독서를 이어나갔다.
#. 삶의 의미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행복을 위함일까? 편안함을 위함일까? 꼭 무언가를 위해야 하는 게 삶의 의미라면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언제쯤 완성이 되는 걸까? 박웅현 작가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는 순간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가 제안해 주는 시집이나 작품들은 현재의 감각들을 나열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누군가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일상이 나에겐 지루한 반복들로 이루어진 고통으로 살아가고 있는 않을까라고 성찰하게 되었다. 혹자는 긍정적인 소리 하고 앉아있네 하며 치부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소리 하고 앉아있어 보면 실제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내 꿈같은 소리라고 하게 되어도 그 꿈을 이루는 누군가가 실재하는 세상이다. 어린 시절 등산의 끝은 정상에 닿음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등산 중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을 때 끝이 난다. 올라가는 길에 보지 못한 그 꽃을 볼 수 있는 내리막길은 언제나 편안하다.
#. 작가는 오늘 하루의 햇살을 소중히 여기며 꿈의 창문을 열고 찬란한 순간들에 집중하라고 이야기한다. 맥락은 다르지만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창밖의 미세먼지가 심하고, 너무 추워서 집에 창문을 닫고 살고 있은지 꽤 되었다. 다만, 가끔 볕 좋고 맑을 때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한다. 공간의 환기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는 알면서 왜 마음의 창은 환기하려 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요즘의 나는 전문직 공부를 병행하며 책도 보고 있고 일의 성과에도 집중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세 가지 중 하나만 잘해보자 싶어 두 개의 창을 닫고 하나만 집중했고 결국 폐쇄된 하나의 공간엔 이산화탄소만 가득하게 되었다. 답답함에 창을 열었고 바람이 불어 스산한 바람이 공간의 온기는 빼앗았지만 얼어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있었다간 질식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있다. 긍정적인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당장 오늘 일을 마치고 독서실에 앉아 책에 대한 에세이를 적고 있는 이 순간의 가치를 회의적인 태도로 떨어 뜨리고 싶지 않다.
#. 나 역시 파리는 다녀왔지만 유독 우중충했던 날씨와 그로 인한 감기, 믿음직한 여행 파트너인 스마트폰은 고장 났기에 파리의 아름다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그곳에서 있었던 3일은 특별했다. 그 이유는 누군가에겐 꿈같은 시간이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너무 엿같았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 중 몇 안될 것이다. 파리를 안 좋은 기억으로 갖고 있는 사람, 파리에서 감기에 걸린 사람, 파리에서 갤럭시 핸드폰을 산사람.. 파리는 나를 어여삐 여겨주었나 보다. 슬픈 경험 때문에 딴 길로 샜지만, 위의 문장은 반갑게도 내가 일본 여행 중 동행한 유학 중인 친구에게 해준 이야기와 닮아있다. 당시 오사카 여행을 혼자 가기로 계획 중이었지만 유학 중이던 친구가 함께 여행을 제안해 함께 3박 4일가량을 지냈다. 그곳에 있으며 나는 여행자로서 도시를 바라보았고 친구는 내가 바라보는 여행자로서의 시각에 신선함을 느꼈던 것 같다. 낯선 공간 속에서 편안함을 제공해 준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이곳은 너에게 익숙함이기에 때때로 지루해질 거다. 그때 나의 이방인으로써의 시선을 떠올리기 바란다. 매일 마주하던 지루한 시야 틈에 특별함이 분명 너의 삶 곳곳에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 친구는 나를 하명 스님이라 부른다. 가끔 드는 생각이 떠드는 얘기에 절반만 실천하면 살면 더 훌륭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의 한 구절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 글이 모국어에 대한 존경이고 영어단어 하나 없이 세렴 됨과 기품이 흘러넘친다.' 한다. 작가의 해석에 강렬히 동감하며, 위 문장을 읽으며 개념을 컨셉이라 말하고, 모양을 쉐잎이라 하며, 덩어리를 볼륨이라 말하는 스스로에 반성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가 너무 불쌍했다. 이 문구가 파생한 나의 상념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려청자 매병을 본 적 있지만 고요의 아름다움은커녕 홈홈한 병 어깨의 곡선이 허리로 흘러서 다시 굽다리로 벌어진 안정된 자세라는 표현을 상상도 한 적이 없다. 바다 건너 일본인마저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을 텐데 난 왜 그러지 못했을까?]까지 생각이 닿았다. 아름다운 문장의 파장이 스스로에 대한 반성까지 닿았다. 문장의 힘은 무겁다.
#. 유독 이번 에세이는 두서없이 적었다. 작가가 제시한 독서법은 내가 즐기는 방식이었지만 보다 깊이 있고 다양한 독서를 하기 위해 감각을 자제하는 독서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가 다가와 그 제한을 풀고 마음껏 뛰어놀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오랜만에 신나서 책의 문장들을 씹어먹었다. 고은 시인의 언어에서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탄하고, 멍하게 문장 속 이미지를 공상했다. 법정스님의 어조, 김훈 작가의 문체, 어린 학생들의 감성, 모든 것을 감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 책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는 어린아이처럼 산발적으로 날것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떠드는 방식으로 글을 썼기에 읽는 누군가는 정신 사나울 수 있다.
#. 긴 글의 마무리를 위해 독서 중 발견한 작가의 메시지를 되짚자면 현실을 존중하라, 삶의 여유를 가져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감각들은 책을 통해 체감하라. 이런 메시지들이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다양하지만 이번 독서가 나에게 제시하는 방향은 무엇에도 정답이 없음을 향한다. 우리는 지독히도 정답을 갈구한다. 책에서 사과를 말할 때 그걸 바나나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하지만 때론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책도 있다. 책을 도끼라 말하며 머릿속 감수성을 찢으라고 말하는 이 책이 나에게는 차가운 얼음을 깨는 도끼가 아니라 기분 좋은 산책 같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