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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현 Mar 15. 2018

영화 <그랜 토리노>

세월이 흐를수록

영화 <그랜 토리노>

 본다 본다 하면서 최근에서야 보게 되었다.

물론 극장에서 본 것은 아니고 블루레이로 보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최근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웰 에이징(well-aging)의 대명사랄까. 익으면 익을수록 맛있어지는 와인 같다고나 할까

감독이며 배우이기 이전에 이스트우드 옹은 그런 닮고 싶은 사람이다.

 정치인이고 명사들이건 간에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롤모델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서 난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보면 그가 보인다. 그란 토리노는 그것을 확인시켜 준 작품이다. 

 그란 토리노는 주인공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부인 장례식에서 시작한다.그에겐 자식도 둘이나 있고 손녀들도 있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자식들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월트에게도 있지만 자손들도 역시 그를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외톨이다. 가족들로 부터도 이웃들로 부터도 배경은 중서부... 아마도 백인 커뮤니티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새 마을에는 유색인종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이웃으로는 몽족(월남전 때 미국을 돕다 고향에서 쫓겨난 부족이란다) 일가가 이사를 온다.

 그 가족들과 친해지면서 월트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된다.

스토리는 대략 이런데... 이영화의 주제는 진정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월트는 고집불통이고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자다. 하지만 진짜 군인이고 남자다. 

 그는 힘없는 약자는 지켜야 하고, 어른이라면 이래야 된다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가치를 위해서 그는 목숨을 바친다. 이 과정을 이스트우드는 정말 담담하게 그려낸다. 

월트의 신세는 한심하다. 건강도 좋지 않고 가족들도 외면하고 외로움에 술만 들이켜지만

한 쇼트도 그 고독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마치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을 보는 듯 냉정하다.

그런데도 그 어떤 신파극보다 가슴이 아프다. 왜일까?

아마도 내가 나이 들어서 일까? 아마 내가 20대 때 이 영화를 봤다면 이렇게까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그의 대표작도 대단한 걸작이랄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 내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총탄 세례를 받으며 담담히 죽어가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는 라스트씬이 그래서 가슴에 남는다.

그래서 앞으로 과거에 보았던 그의 영화들을 다시 챙겨볼 생각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을 다시 봐야겠다.

영화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이 늙어가는 것이겠지만....

과거 고교시절에 열광했던 홍콩영화를 지금 다시 봐도 그때만큼 행복할까?

아니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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