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현 Mar 24. 2018

영화 <쓰리 빌보드>

신뢰의 가치

 

 이유 없이 끌리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 대해 사전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예고를 보게 되었는데 강력한 포스가 느껴졌다. 주연인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눈빛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화의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동력이 너무도 신선했기 때문이다. 

 세장의 옥외 광고판에 실린 묵직한 돌직구 같은 메시지와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갈등. 간단히 설명하면 이것인데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

 극장 개봉이 확정되어 있었지만 고맙게도 미국에서 한글자막이 수록된 블루레이가 출시되어 있기에 아마존으로 주문해서 집에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밀드레드 헤이스라는 여인이다. 밀드레드에게는 7개월 전 사랑하는 딸 앤젤라를 잃은 아픈 과거가 있다. 수사는 단서 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도넛이나 우물거리며 꾸물대는' 경찰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밀드레드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버려진 세 개의 광고판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메시지를 게시한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Raped while dying(죽어가며 강간당했다)',

 'And still no arressts?(그런데 여전히 체포되지 않았다)',

 'How come Chief Willoughby(뭐 하고 있는 건가 윌러비 서장)'  

 경찰서장 윌러비는 현재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게시판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윌러비는 밀드레드를 찾아가 단서가 없어 수사가 난항임을 설명하며 달래 보지만 이미 마음이 황폐해진 그녀의 마음은 요지부동. 광고판을 철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여기 와서 자신에게 질질 짜는 시간에 모든 성인 남자의 DNA를 전수 조사하고 또 다른 사건을 막기 위해 범죄자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라고 일갈한다. 

 서장은 막무가내인 그녀에게 자신의 건강상태까지 고백하지만 밀드레드의 반응은 차가울 뿐이다.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몇몇 마을 사람들은 직, 간접으로 밀드레드에게 압박을 가한다. 그중 하나인 치과의사는 밀드레드를 치료하며 설득하다,  오히려 그녀를 격분하게 해 엄지 손가락을 드릴로 찔리게 되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퀀스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주고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밀드레드의 적은 마을 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하나 남은 아들, 전남편. 모두 그녀의 광고를 비판하고 게시를 철회할 것을 종용한다. 심지어 전직 경찰 출신이라는 경력 때문에 이 사태에 더 민감한 전 남편은 폭력까지 휘두르며 그녀의 뜻을 꺾으려 하지만 밀드레드는 조금도 굴함이 없다.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그녀를 멈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이 부분까지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중반부를 넘어가는 데도 범인에 대한 이야기나 단서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상황이 전개된다. 스토리의 주요 축인 서장이 자살해버린다.

 아니 도대체 이야기를 어떻게 수습하겠다는 것인가? 혹시 서장이 범인인가? 아님 앤젤라의 죽음에 대해 뭔가 책임을 느끼고 자살한 것인가? 내 모든 예상을 비웃듯 서장의 죽음은 이런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냥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의 처지와 그로 인해 가족들이 받을 고통을 괴로워 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주요 인물 중 하나는 죽고 스토리는 계속 흘러가는데 범인에 대한 단서라든가 극적인 목격자가 발견되는 따위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게 뭐지? 과연 뭘까? 하는 중에 서장이 남긴 유서의 내용이 밝혀진다. 이것이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을 바꿔나간다.

 윌러비 서장의 유서는 가족에게 하나, 밀드레드에게 하나 그리고 서장의 부하인 딕슨을 위한 것 총 3장이다.

밀드레드에게 보내진 유서에는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미안함과 더불어 광고 게시를 위한 추가 비용을 자신이 대신 지불했다는 고백이 담겨있다. 재정적인 이유로 더 이상 광고를 게재할 수 없는 상황이던 밀드레드.

그의 진심에 조금씩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다.

 딕슨은 폭행을 일삼는 문제 경관이다. 그는 서장의 죽음을 밀드레드가 의뢰한 광고판 때문이라 여기고 아무 죄도 없는 광고회사의 사장을 폭행하다 해고된다.

 이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윌러비가 남긴 유서가 도착한다. 내용은 딕슨이 좋은 경찰이 될 거라는 것. 딕슨을 믿는다는 것. 이 작지만 의미 있는 메시지가 딕슨을 깨우친다. 딕슨은 해고된 상태지만 다시 수사를 시작한다. 

 중 후반에 접어들며 나는 드디어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겠구나 하는 기대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딕슨과 밀드레드가 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아 이제 드디어... 근데 영화는 거기서 그냥 끝나버린다. 심하게 허무하다. 이럴 리가... 이럴 수가...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쿠키영상이나 뭐 그런 거라도... 없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 과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나 그 과정을 보여주는 수사물이 아니구나 그럼 뭘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나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것은 다음과 같다. 

 크던 작던, 옳건 그르건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부르고(영화 속 전 남편의 젊은 애인이 이 대사를 스쳐가듯 읊조린다) 그 순환에 한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를 입게 되고 결코 아무는 일 없이 점점 더 깊은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고리를 끊는 것은 당사자 중 누군가의 변화이다. 성경말씀처럼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내미는...'의지적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을 한 인물은 딕슨이다. 그런데 딕슨의 그 변화를 이끈 인물은 서장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장의 믿음이 그를 바꾼 것이다. 좋은 형사가 될 거라는 믿음, 신뢰. 죽음을 앞두고 밝힌 진심에 딕슨은 정말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정리하자면 누군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은 정말 어려운 일도 하게끔 하는 큰 힘이 있다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 않는다던가?

 사건의 발단이 된 살인사건도 만약 밀드레드가 딸 앤젤라를 조금 더 신뢰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조금 다른 부분이지만 신뢰가 있었다면 광고판 따위로 경찰을 질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믿음과 신뢰의 가치는 크다' 아녔을까? 

 장황하게 줄거리를 썼는데 이유는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스토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나리오가 단선이 아니라 여러 함의를 응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꼭 그렇다 해서 영화가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경우는 두 명제 상호 간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는 좋은 예이다.

 또 한 가지 칭찬할 점으로는 대사들이 참 뛰어나다. 감정의 요동을 일으키는 적절한 단어의 사용. 그리고 문장의 강도와 온도의 적절한 배치가 뛰어나다. 시각적 스펙터클 이라고는 찾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박진감과 긴장감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이유이다. 물론 시나리오를 영화적으로 잘 표현한 감독의 연출력이 바탕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마치 수사물이나 추리물처럼 보이게 하는 마케팅이다. 그런 요소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오락적 요소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사기를 당한 느낌일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는 이 작품이 진정하고픈 말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뭐 영화란 기본적으로 비즈니스에 속한 것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하긴 요즘 관객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있으니 괜한 걱정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정말 이 영화를 즐기려면 예고, 줄거리 소개, 리뷰 같은 일체의 정보 없이, 즉 아무런 편향 없이 관람하기를 권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쓰리 빌보드>는 오히려 백지상태로 관람하는 것이 더 이 영화를 잘 보는 방법이다. 이 글도 꼭 관람 후에 읽으시길. 어떤 것을 느끼셨는지 댓글 써주시면 고마울 듯.


p.s : 글을 쓴 후 찾아보니 각본을 감독인 마틴 맥도나가 직접 썼네요. 

시나리오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감독을 했으니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거 아닌가 싶습니다. 

골든 글로브 각본상도 수상했네요.


 

 

 

 

 

  

   

    

 

 

 


작가의 이전글 영화 <그랜 토리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