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정원 Oct 26. 2021

잠결에 시작된 도전

애플 워치가 뭐라고


애플사에서 애플 워치 7을 발표했다. 3년째 사용하고 있는 4세대의 배터리 수명이 줄어 방전되는 경우가 잦아 새로운 애플 워치가 나오면 꼭 바꿔야지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 판매일인 8일, 아침 9시부터 애플 공식 홈페이지를 계속 새로고침하며 기다렸다. 본체 케이스 타입은 정해둔 상태였는데 내가 원하는 워치 밴드와 세트로 나온 모델이 없었다. 밴드를 바꿀 수 있는 메뉴를 찾느라 15분이나 지났다. 느린 선택으로 인해 배송날짜가 석 주나 밀려 11월 첫 주로 잡혔다. 공황장애만 아니면 애플스토어로 픽업 신청을 했을 텐데 아직도 30분 이상 차 타는 건 힘드니 매장 픽업은 애초에 포기했다. 그래도 배송해주는 게 어디냐며 아쉬운 마음을 다독였다.


지난 화요일 아침 근래 계속된 피로감 때문에 침대에 누워 폰으로 이것저것 보다가 갑자기 내 워치는 어디쯤 왔을까 궁금해졌다. 확인해 보니 아직 ‘처리 중’ 상태였다. 재미 삼아 재주문을 해보았다. ‘어? 재고 확인 중?’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매장에서 픽업할 시간을 고르라는 선택창이 떴다. 그날 오후 12시 30분에서 45분 사이로 픽업 시간을 잡았다.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갑자기 잠이 확 깼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앱으로 서울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5분이었다. 그다음 버스는 130분 후라고 쓰여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이미 떠났고 45분 후에 온다고 했다. 얼른 샤워를 하고 아침약을 먹었다. 차 타기 30분 전에 먹으라고 처방받은 비상약을 찾아 가방에 넣었다. 이제 15분 남았는데 택시가 안 잡혔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이웃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근처에 있다며 태우러 왔다. 차를 얻어 타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가 이미 승객을 태우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랐다.

‘30분 정도는 괜찮겠지? 아침약 먹을 때 비상약을 먹을걸. 괜찮겠지?’


버스 바닥만 보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나는 차에 타고 있지 않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다.’ 계속 되뇌었지만 버스가 너무 심하게 흔들렸다. 20분쯤 지나자 손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과호흡의 기미가 보였다. 핸드폰 화면으로 남의 정원 사진을 보며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 노력했지만 마스크와 버스 안은 너무 답답했다. 버스 기사에게 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계속 고민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창 밖으로 양재 IC가 보였다. ‘이제 5분만 가면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테니 5분만 참자, 5분만!’


다행히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았네.’ 마스크도 벗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였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후 지하철을 타고 신사역으로 이동했다. 지하에서 편의점을 발견했다. 음료수를 하나 골라 계산을 하며 물었다.

“저, 혹시 여기서 마셔도 되나요?”

폴리카보네이트 가림막 뒤쪽에서 계산을 하던 아저씨가 나를 째려보며 버럭 화를 냈다.

“거기가 2미터 넘어요? 저쪽 아무 데나 가서 먹어요!”

서울 인심이 이렇게 사나웠었나. 결국 약봉투와 음료수를 들고 지상으로 올라와 한쪽 구석에서 비상약을 먹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오랜만에 온 가로수길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알던 매장이 많이 사라졌고 보도블록을 바꾸는 공사로 어수선했다. 공황장애 판정받기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왔던 곳인데 이렇게 낯설다니, ‘촌년’이 된 기분이었다.


애플스토어 앞에서 열체크를 한 후 픽업 고객용 대기줄로 안내를 받았다. 바닥에 같은 간격으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앞뒤에 선 사람들과 간격을 유지하도록 스티커를 밟고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자 담당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코로나 때문에 매장 안에 머물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다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 재고가 들어왔는데 운이 좋다고 추켜 세웠다. 주문해 둔 워치를 기다리며 새로 나온 밴드를 구경했다. 픽업 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길어졌다.

“고객님, 매장 뒤쪽 길에 맛있는 마들렌 가게 생긴 것 아세요?”

“그런데가 있어요?”

“그 집 마들렌 유명해요. 나오신 김에 맛있는 점심도 드시고 마들렌도 사 가세요.”

그동안 다른 직원이 새 워치를 가지고 왔다. 항상 왼쪽 손목에 차고 다니던 애플 워치 4를 뺐다. 언박싱 동영상을 찍으며 박스를 뜯었다. 박스 내부 그림이 모던한 회색이었다. 흰색 종이에 싸인 본체를 꺼내니 매트한 블랙 티타늄 케이스가 보였다.

“너무 예뻐요.”

“고객님 손목에 잘 어울리네요. 고급스러워요.”

주문할 때 선택한 미드나이트 색상 가죽 밴드를 끼웠다. 새 워치는 왼쪽 손목에, 3년 동안 사용한 워치는 오른쪽 손목에 착용했다. 온 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밴드도 하나 구입했다. 이제 내가 나가야 다른 손님이 들어올 수 있는데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궁금했던 파란색 아이폰 프로와 보라색 아이맥을 구경했다. 화장실도 다녀왔다. 더 이상 머물 핑계가 없었다.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매장에서 나왔다.


마들렌 가게를 찾아가는 동안 친구 P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오늘 검진받을 게 있어서 병원에 왔어.”

“나 지금 가로수길인데 점심 사줄까?”

“누가 데려다줬어?”

“아니, 혼자 버스 타고 왔어. 오늘 매장에 워치 재고가 있다고 해서.”

“미쳤어? 그러다가 발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나 괜찮아. 그런데 집에는 못 가겠어. 내가 밥 사줄게. 집에 데려다주라.”

“다 끝나가니까 기다려.”

마들렌 한 박스를 사고 핸드크림 구경을 하는데 P가 도착했다.

“으이구,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남편은 알아?”

“모르지. 밥 먹고 얼른 가야 해.”

밥을 대충 먹고 차도 제대로 못 마시고 P의 차를 탔다. 졸음이 쏟아졌다.

“나 워치 개통해야 하는데.”

“너네 집 근처에 가서 하자. 우선 좀 자.”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리점을 네비로 찍어 주고 눈을 감았다.

친구 덕에 워치 기기변경까지 하고 집에 도착했다.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운동 갈 복장을 한 남편이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제 다섯 시 좀 넘었는데 언제 퇴근한 거지? 딱 걸렸다.

“어디 갔다 와?”

대답 대신 애플 로고가 그려진 종이가방을 들어 올렸다.

“서울 간 거야? 어떻게? 뭐 사 왔는데?”

양 손목에 찬 워치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버스 타고 갔는데 집에는 친구가 데려다줬어. 버스 타고 가다 내려달라고 앞쪽으로 뛰어가서 소리 지를 뻔했어. 기사 폭행 사건이 왜 일어나는지 알겠더라고. 이제 버스도 못 타겠어. 물욕이 병을 이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운동 가는 거지? 나 들어가서 좀 쉴게. 다녀와.”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남편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얼른 집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 죽을 뻔했네.




이뿌긴 하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