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정원 Jan 03. 2021

길 잃기 안내서

길은 나아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가


처음 가보는 마을을 산책 중이었다. 더 나아가는 것이 의미 없어졌을 때 우리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인데 반대방향으로 걸으니 낯설어 보인다’고 그가 말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잃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책의 첫 챕터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긴 호흡으로 쓰인 문장 틈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제목이 길 ‘잃기’ 안내서인데 길 잃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 안에서도 나를 이끌어줄, 내가 진행해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작가가 안내문구처럼 걸어둔 문장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열린 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주저하다 용기를 내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곱씹는 것을 그만두고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소에 생각 없이 보고 있었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평소 운전하던 길을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 둘러보면 낯선 곳을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항상 알고 지내던 먼 곳의 푸름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과 인지하는 것은 다르다. 의미를 부여하고 받아들일 때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내게 길 잃는 방법을 알려줄 것 같았던 작가는 내내 자신이 길을 잃었던 이야기만 해주었다. 작가가 잃었던 길을 함께 걸어보며 그 누구도 함께 길을 잃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장소, 시간, 상황에 처하더라도 각자가 길을 잃은 타이밍과 방향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잃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저 나도 이렇게 감정적인 길, 물리적인 길, 사랑과 사람을 잃어보았으니 독자들도 과감히 길을 잃어보라고 끌어당긴다. 당황하거나 걱정의 늪에 빠지지 않은 채 완벽하게 길을 잃은 상태를 인정한 후 나 자신과 현재에 집중하라. 그러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몰랐던 것도 인식하게 되며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길을 잃기 전과는 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하는 길 잃기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냥 나를 소멸시키는 일 일뿐이다. 목적지가 있는 길 잃기만이 의미가 있다.


그와 나는 그날의 산책 중에 패닉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길을 잃었고 그로 인해 한쪽 방향에서는 볼 수 없는 길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겁내지 않고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가볍게 또는 깊게 길을 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방향을 찾을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