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자유이다
나는 나비가 되기를 꿈꾼다. 눈에 띄지 않는 나비가 되어 너무 높지 않은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기를 꿈꾼다.
처음 구성은 좋았다. 자신이 현재 걷고 있는 길을 예전에도 걸었을 과거의 여자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교차하여 진행한다. 어디부터가 현재이고 어디부터가 과거인지 모호하게, 흡사 그녀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듯한 방식이 좋았다. 나도 그 상상의 대화에 끼어 함께 도시를 걷는 것 같았다.
과거의 여성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래서 거리를 그들의 시선으로 음미하고 느낄 수 없었다. 여성의 산책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산책자라는 프랑스 단어는 남성형뿐이다. 작가가 새로이 창조한 여성형 산책자, 플라네즈.
나는 언제나 플라네즈였다.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내 산책길의 작은 변화와, 길의 일부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관찰하는 것을 사랑한다. 도시에 존재하는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내겐 개개인을 스토킹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한 남자를 따라다니며 그가 본 것을 보고 그가 찍은 장소를 찍고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는 부분은 자신의 자유를 갈망한 나머지 남을 구속하는 방종으로 느껴졌다. 한 발 더 들어가 그 의도를 보자면, 나의 눈으로 보는 도시와 다른 이의 눈으로 보는 도시가 어떻게 다른지 경험하고자 함이었으나 그 남자가 관찰당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삐뚤어진 사랑처럼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도시에 존재하는 사람은 도시의 일부로 볼 때 의미가 있다. 그들이 존재는 그 도시의 색채를 드러내고 그때 그들은 흥미로운 대상이 된다.
내가 모르는 많은 이들과 함께 플라네즈가 되어 도시를 자유로이 느끼던 작가가 동양의 한 도시에 왔을 때 드러낸 히스테리컬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역겨운 인종차별주의자인가 아니면 동양인 속에서 관찰대상이 되어버린 플라네즈의 히스테리인가 아니면 자신만 남겨두고 도시에 녹아든 남자 친구와의 관계 때문이었을까. 다수의 일본인이 파리 여행에서 걸린다는 파리 증후군처럼 동양의 낯선 도시에서 걷기를 거부하는 도쿄 증후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교토는 좋았다는 뒤늦은 고백이 있었으나 그녀가 서울을 걸었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사랑하는 파리에서 버려진 후 돌아간 뉴욕에서 더 이상 뉴요커도 이방인도 아니었던 그녀는, 결국 파리에 거주할 자격을 얻지만 그 도시에 속하겠다는 마음은 없어 보인다. 현대를 걷는 우리는 예전보다 자유로워졌으므로 그 기쁨을 잊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조금 껄끄럽다. 어쩌면 어느 도시에도 속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속하지 않으나 언제든 걸을 수도 떠날 수도 있는 상태와 완전히 스며든 현실을 사는 것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꿈꾸는 나비의 삶도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추락하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