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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콩밭에 Jul 09. 2024

능동태, 수동태의 철학적 이해

(독서) 중동태의 세계 / 고쿠분 고이치로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삶, 수동적으로 당하는 삶. 요즘 화두다. 과연 어느정도 비율로 내 삶을 끌어가고 있나 해서. 결국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고 운명처럼 정해진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나이들수록) 들어서. 그래서 ‘능동태·수동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책의 접근이 무척 흥미로웠다.      


능동태는 행위하게 하는 것, 대상(Object)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행위의 산출을 일으키는 것이다. 반면 수동태는 ‘행함’을 당하는 것으로 주어(Subject)의 자리에 ‘당하는 자’가 ‘당하는 것’을 나타낸다.       

 

능동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어떤 사태가 어떤 시점에 주어에 의해 일어났고, 그것에 의해 야기된 상태가 힘을 미치고 있어서다. 그 힘은 완료됐는지, 진행됐는지에 따라 시제의 분화로도  이어진다.      


의지와 행함을 일으키는 능동태는 지금은 익숙하지만 고대·중세 세계관에선 없는 개념이었다. 특히 고대인의 세계관에 ‘의지’란 상상하기 어려웠다. 주어에 ‘나’를 두고 어떤 일을 성취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바깥(자연, 신)의 초월적인 무엇으로부터 끊임없이 상태 변화를 당하는 존재, 예속된 존재로서 ‘스스로 주체를 재구성할 수 없’었다.      


중세도 마찬가지. 종교에 억압과 지배가 심하던 시, 신만이 유일한 능동태의 주어로서 존재했다. 다만 신은 지멋대로, 무한대로 능동할 수 있는 유일 존재다.     


<예시>

신이 인간을 재물로 바쳤다. (신, 주어/인간, 대상/능동) 

인간이 재물로 바쳐졌다. (인간, 주어/수동)

인간은 신을 믿지 않는다. (인간, 주어/능동)     


근대에 들어서면 과학, 자본주의 혁명으로 ‘주체’의 자리에 마침내 ‘인간’이 새롭게 등극한다.  하지만 이때도 이념, 민족, 국가에 예속 ‘당하기’ 다반사였지만 탈근대, 현내에 들어서면서 더더욱 ‘주체’로서 인간이 집중 조명되는 것 같다. 인간의 자아가 너무 비대해졌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 사고의 변화에 따라 언어 역시 고대·중세 때는 수동이 대세였고, 지금은 능동·수동이 분화돼 쓰이고 있는 것이란 설명이다. 인도유럽어에는 타동사가 많은 것, 서구인들은 여전히 우리보다 더 동사를 쪼개서 생각한다는 것, 뭐 그런 얘기를 하는 책.       


강제와 자발, 원하는 삶과 당하는 삶에 대해 깊게 사유하게 만드는 내용이고 무엇보다 ‘수동태로서의 삶’, ‘피동적 삶’의 어려움을 나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주는 지점도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능동’자체가 없었다고 하니까. 그 시대를 사는 인간들은 (지금 관점이지만)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많았을까.      

한편으론 탈근대를 살아가는 지금, 너무나 ‘능동적 삶’의 지향이 과대해져버린 지금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겸허하게 바라보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지만 자기생각대로, 자기가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주어진 과거로 물려받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든다’는 대목을 생각해보자. 태어난 장소, 성별, 가족 모두 다 ‘정해진 상태’에서 내가 행위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란 생각도 들게 함.      


‘인간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지만 능동을 지향한다’는 말을 기억한다.     


*행위는 의지를 원인으로 한다. 스피노자. 

*사고한다함은 언어기호를 다루는 일이다. 

*언어란 형식을 갖춘 의미작용의 구조이다. 

*세계는 언어에 의해 분절된다. 

*언어야 말로 가능한 것들의 주형이다. 

*사고를 내용, 언어를 ‘용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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