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 미식회 막국수 편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라 수십 년을 살아왔던 아버지에게 '메밀'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과거를 회상하고 맛볼 수 있는 소울푸드였다.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메밀음식을 찾았던 아버지, 나 역시도 자연스레 아버지의 뒤를 따라 메밀음식을 접하게 됐고 점점 그 맛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웃긴 건, 아직까지도 아버지 입맛에 들어맞는 막국수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는데 "맛있긴 한데 그때 그 맛은 아니야"라고 혼잣말을 내뱉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엥? 맛있기만 하고만... 도대체 무슨 맛을 찾는 거야?"라며 말을 건넸다. 도대체 아버지가 찾는 '그 맛'은 무엇일까? 이젠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그리운 엄마의 손맛일까? 아니면 기억과 추억 속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때 그 시절의 메밀음식이었을까? 혹은, 지나는 세월 속에 점점 흐릿해져 가는 옛 추억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현재, 아버지의 소울푸드인 막국수는 머나먼 미래에 있는 '나'에게 바통터치를 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 후엔 이별도 존재하는 법, 생각만으로도 슬프지만 '그때'가 된다면 나 역시도 과거를 회상하며 쌉싸름한 막국수를 곱씹고 있을 거라 상상해본다.
어쩌겠는가? 한낱 사람에 불과한 내가 지나는 세월을 막을 순 없는 법, 지금 소중한 사람과 함께 고소한 막국수를 즐기며 추억에 새겨 넣는 방법밖엔.
문뜩, 생각이 들었다. '막국수와의 첫 만남은 언제였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만으로는 그 만남을 찾아낼 수 없었다. 풀리지 않는 생각을 아버지에게 물으니 답은 1초 만에 돌아왔다. "너 6~7살 때쯤 강원도 화천에 있는 막국수집이 처음일 거야"라고. 나도 이 집일 거라 예상했고 그 답도 같았다. 나의 첫 막국수이자 지금은 1년에 1번은 꼭 먹고 오는 그곳, 강원도 화천의 천일 막국수집이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이사하여 낡고 허름했던 옛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막국수의 맛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하지만 이게 나만의 생각인지, 아버지는 옛날만 못하단다. 그래도 그 명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게 천일 막국수는 화천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고, 가장 자주 찾고, 또 그 입맛에 잘 맞는 막국수 집중 하나다.
새빨간 양념장이 들어가지만 생각보다 깔끔하고 심심한 게 이 집 막국수의 매력이다. 고명은 계란 반쪽에 돼지고기 수육도 올라간다. 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감칠맛이 없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빨간 양념 속에 숨어있는 간 돼지고기가 김가루를 대신해서 맛을 낸다. 강한 양념 맛을 즐기고 싶다면 육수를 붓지 말고, 은은히 퍼지는 메밀향을 즐기고 싶다면 육수를 부어먹는 게 좋다.
변경된 주소 : 강원도 화천군 중앙로 34-9
아버지의 고향, 화천을 찾게 되면 우리 가족은 두 번의 막국수를 먹는다. 바로 앞에 소개했던 천일 막국수를 가장 먼저 찾고, 그다음으로 맛과 양 그리고 가격까지 완벽한 바람골 막국수를 찾는다. 화천 군내에서 약 20~30분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지 않지만 바람골의 국수 맛을 본다면 단골이 아니 될 수가 없다.
화천 막국수의 특징은 양념이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람골은 천일보단 양념 맛이 강한 편이긴 하지만 보통의 막국수들보단 깔끔하고 담백하다. 또한 투박하게 썰어낸 동치미 무와 육수가 국수 맛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김가루와 잘게 썬 황태가 감칠맛을 담당한다. 그리고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닭갈비, 감자전과 같은 기타 메뉴가 준비돼있지만 막국수만으로도 배가 불러 주문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음식이 조리되는 주방 앞에 '많이 드실 분은 미리 말씀해 주세요.'라는 문구에서 시골의 인심과 주인장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집에서 막국수가 생각날 때면 가족들과 찾는 단골집이 하나 있다. 상호는 막국수집이라면 흔하디 흔한 '봉평 메밀촌'인데 전국적으로 막국수가 대중화되면서 물밀듯이 퍼져나간 메밀음식 체인점과 상호가 유사하다. 메밀촌의 간판에는 당당하게 '본점'이라고 쓰여있는데 그 옆쪽으론 조그맣게 체인점 문의 번호가 적혀있다. 개인적으로 맛이 참 괜찮다고 생각하기에 언젠가 분점도 생기리라 오지랖을 떨어본다.
사람의 얼굴보다도 큰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메밀면, 무절임, 오이와 삶은 계란 그리고 김가루만 뿌려져 나오는 다소 심플하고 깔끔한 스타일의 국수다. 눈과 혀를 자극하는 새빨간 양념을 포함하지 않은, 오로지 면과 육수로만 승부를 보는 음식점이다. 새콤달콤한 육수가 다소 심심할 수 있는 맛을 잡아주니 호불호는 크게 갈리지 않을 것 같다. 메밀촌의 유일한 찬인 '열무김치'가 시지 않고 딱 절제된 맛을 가지고 있기에 막국수와의 조화가 훌륭하다.
사진만 봤을 땐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허름하지만 이곳은 서울이 맞다. 그것도 3호선과 6호선이 그 앞을 지나다니는 나름의 번화가이기도 하다. 평범한 주택가들 사이를 걷다 보면 찜닭, 막국수, 만두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힌 가정집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찾는 음식점임을 직감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동네잔치라도 열린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내 두발은 음식점에 발을 들여놓는걸 어색해했다. 참 당혹스럽고도 친숙한 공간이었다.
시골 가정집을 연상시키는 건물 자체도 놀라웠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연갈색의 메밀면이 깨끗한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듯한 아주 요상한 막국수가 바로 그것이다. 혹, 수요 미식회의 황교익 아저씨가 이 막국수를 본다면 "음~ 아주 좋아요. 메밀,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어 좋아요"라고 할 것만 같았다.
고명은 오로지 오이뿐, 육수는 새콤과 달콤함이 적절한 동치미 국물을 사용했다. 군내가 살짝 나긴 했지만 맛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친숙했던 건물처럼 막국수의 맛 역시도 참 맑고 깨끗했다.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히 풍겼던 메밀향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꼭 처가집에서 막국수를 함께하리라.
메밀의 고장, 봉평을 찾았다. 맑디 맑은 하늘에 새하얀 메밀꽃의 만남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메밀꽃길도 마음껏 걷고 평화로웠던 봉평시장도 거닐었다. 그리고 시장의 끝에서 길게 늘어진 초록색 처마가 매력적이었던 현대막국수를 만났다. 허영만 작가의 '식객'에도 소개됐던 음식점이라 그런지 손님들로 인산인해였다. 손님이 많이 지면 많이 질수록 맛에 대한 기대치도 함께 상승했다.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 집만의 특색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양념은 과하지 않으며 육수는 조금 달콤하고 감칠맛이 아주 강했다. 어디선가 먹어본 듯하면서도 안 먹어본 것 같은 복잡 미묘한 맛이 느껴졌다. 처음엔 낯설지만 점차 그 맛에 익숙해져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국수였다.
봉평의 막국수를 맛으로만 평가하는 건 크나큰 곤혹이다. 9월의 봉평이 피어낸 메밀의 산뜻한 분위기를 더한 풍경과 맛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 맛을 평가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