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사람에게 전달하는 긍정적인 감정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계절 가을이 돌아오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선선한 가을바람에 우리들의 마음은 편안하다 못해 공허해진다. 이런 공허한 마음은 환절기에 비염으로 고생하는 것처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변화에 따른 후유증이 아닐까? 혹은 연초 시작과 함께 열심히 달리고 살아온 우리의 몸과 정신이 피폐해 진건 아닐까? 이러한 시점에선 휴식과 일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충전하고 나 자신을 더욱 알아갈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분명 눈으로 가을을 감상하기엔 조금 일렀지만 살결에 닿는 바람과 기운은 가을의 정취를 가득 담고 있었던 변산반도는 발걸음이 닿는 그 어느 곳이 든 산과 바다가 여행자를 맞이해주는 천혜의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장이었다. 이곳에선 1~2시간의 배차간격이 기본인 버스를 놓친다고한들 다급하거나 불행하지 않다.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나 역시 자연이 전달하는 풍경을 감상하며 여행 계획을 변경하면 그만이다. 그만큼 내가 보고 느낀 변산반도는 모든 게 자유롭고 행복해졌다. 자연이 나에게 전달하는 감정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이었다.
여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변산반도가 있는 전라북도 부안은 기차가 오고 가지 않기 때문에 자차 또는 버스를 통한 여행만 가능했다. 뚜벅이인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주말의 차도는 주차장인지 고속도로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차가 많았고 결국 도착 예정시간보다 무려 1시간 30분 연착됐다. 부안 터미널에서 바로 여행이 시작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곰소항이 있는 곰소리까지 가기 위해선 다시 또 버스를 타야 했다.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했기에 미리 계획해뒀던 일정과 버스시간표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여행의 시작부터 일정에 착오가 생기다니... 뚜벅이는 서러웠다.
마음을 잘 추슬러 곰소 앞을 지나는 내소사행 버스를 타고 40분여를 달려 곰소항에 도착했다. 5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버스에 있다 보니 몹시 피로했었다. 하지만 피곤함도 잠시, 곰소항과 가까워질수록 솔솔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몸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설움으로 가득 찼던 내 모습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 이주는 행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바다 구경을 마치고 항구 바로 앞에 위치한 곰소 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시장 안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형성돼있었다. 가을이 제철인 생선들도 줄줄이 진열돼있었고 곰소 소금으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맛이 뛰어나다는 젓갈들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해산물이 너무나도 싱싱해 시장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뭐 하나 사야 할까??'고민했다. 결국은 먹지도 않고, 사지도 않았지만 싱싱한 해산물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보통 여행지에서 먹는 한 끼 식사는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명소들을 다 둘러본다고 한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다면 아쉽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번에 도전할 음식은 꽤 강력한 녀석이었다. 평소 젓갈이라고는 새우젓, 낙지, 오징어젓까지만 먹어봤던 내가 젓갈정식에 도전한다니! 호불호가 강한 음식이기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 그냥 해물짬뽕 먹을까?? 아... 그래도 곰소까지 왔는데 젓갈 먹어야겠지?? '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불끈!)
두근대는 마음으로 젓갈백반을 주문했다. 잠시 후 맑은 국물의 바지락탕을 시작으로 여덟 가지의 젓갈과 아홉 개의 반찬이 테이블 위로 깔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전라도 인심'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금세 끓기 시작하는 바지락탕, 바지락이 만들어낸 진한 국물 맛이 정말 예술이었다. 바지락 국물에 밥을 말아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나에겐 메인 음식인 젓갈이 무려 여덟 종류나 기다리고 있었기에 꾹 참았다. 젓갈은 다소 덜 비리다고 생각하는 낙지, 꼴뚜기, 창난젓에 먼저 도전했고 비린맛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도전한 황석어, 어리굴젓은 입맛에 맞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미식가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 같다. 하지만 평소 젓갈을 즐겨먹지 않거나 생소하게 느껴지더라도 젓갈로 유명한 곰소를 찾았다면 한 번쯤 먹어봐야 할 음식임에는 분명한듯하다.
젓갈백반 1인 기준 10,000원
사실 곰소를 찾은 진짜 이유는 이 소금 염전 때문이다. 이유가 뭔데?라고 묻는다면 '그냥 염전이 궁금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작고 조그마한 항구마을의 깨끗하고 투명한 염전 위를 뚜벅뚜벅 걷고 싶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가 상상했던 염전의 모습이 실제로 나타났다. 푸른 바다 색상과 같은 맑은 하늘이 염전을 감싸고 있었고 바람 한점 없는 선선한 날씨를 맞이하는 순간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염전에 발을 내딛는다. 푸른 하늘만을 보여주던 염전 속 세상에서 또 다른 내가 태어났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넷이 되는 아주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이 소금같이 깨끗한 세상에서 지금껏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잡념들을 흘려보내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여담이지만 염전을 구경하며 소금 생산과정을 잠시 살펴볼 수 있었는데 염부의 엄청난 시간과 노력 끝에 생산되는 생산되는 금쪽같은 소금이기에 앞으로는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갖고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금 이외에 모든 식재료들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자연의 모든 모습을 좋아하고 애정 하지만 그중에서도 해가 질 무렵,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좋아한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장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이 전달하는 풍족한 여유와 시간에 평소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고 숨겨왔던 마음속 생각과 고민들을 단번에 펼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일상들은 잠시 접어두고 오로지 나 자신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귀중한 시간 말이다.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든 게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그래 잘 살아가고 있어,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이렇듯 자연이 주는 긍정적 효과는 생각보다 크고 힘이 된다.
변산반도 여행 당시, 날씨 운이 정말 좋았다. 곰소염전을 구경하면서도 '오늘 노을은 정말 예술이겠군!'이라 일찍이 예상될 만큼 날씨가 맑았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가을의 일몰은 따뜻하고 광활했다. '천혜의 자연경관'이라는 말을 딱 한번 사용할 수 있다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풍경에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풍요로운 경관이었다.
붉고 예쁜 색상을 뽐냈던 오늘의 노을이 빠른 속도로 떠나갔다. 짧디 짧은 노을을 보내는 게 아쉬워 나를 포함한 채석강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이 짜릿했던 순간들을 추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이는 카메라 안에 오늘의 추억을 최대한 담아내려 노력하고 또 어떤 이는 유유자적, 눈과 코 그리고 귀의 감각에 집중하며 깊은 사색에 잠긴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까?' 기대하고 상상하며 채석강의 노을을 추억 속에 새겨본다.
백합 정식,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지 주변 식당이었고, 또 개인적으로 해산물을 즐겨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함께였기에 이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진 않았다. 채석강 주변에 길게 늘어진 수많은 음식점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가 사시사철 언제 먹어도 맛있는 백합 정식을 주문했다. 비록 인심 좋은 전라도 백반이나 정식처럼 수십 가지 반찬과 음식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테이블 위로 차려진 찬 하나하나에서 깊은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두툼한 조갯살로 가득 찬 백합은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단짠(단맛 짠맛)의 조화가 기가 막혔고 백합 껍질에 고인 뽀얀 육수의 감칠맛 역시 훌륭했다. 조그마한 게로 만들었지만 속살은 알찼던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은 세상 이런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가을이 제철인 꽁치와 전어 역시 입안에 고소한 맛을 가득 안기며 식도락의 재미를 더해줬다. 진수성찬과 같은 풍족하고 신선한 음식들에 한 없이 행복하고 든든했던 순간이다.
백합 정식 1인 기준 20,000원
시골마을의 구수한 향기만큼이나 부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역시 구수하고 정이 깊었다. 서울에선 상상도 못 하였을법한 기사님과의 만담은 버스에선 다소 심심할 수 있는 나의 여행길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줬다. 만담의 주내용은 관광지 부안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구수한 사투리를 내뱉으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셨다. 깨알 꿀팁도 1박 2일간의 변산반도 여행이 끝나갈 때쯤 알게 됐는데 주말에는 변산반도 주변 관광지들만 돌고 도는 시내버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또르르 흘리고 다음 변산반도 여행 때 꼭 참고하겠다고 했다. 분명 나이 차는 크지만 친구가 하나 생긴 것 같은 기분에 버스에서 하차할 때 우정의 증표(?)로 우유 하나를 기사님께 건넸다. 고맙다고 우유를 흔쾌히 받아 들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가을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지만 변산반도 능가산이 품고 있는 대자연의 숨결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내소사 천왕문 앞까지 길게 이어진 100년 이상된 전나무길은 나무의 높이가 주는 웅장함과 기분 좋은 산소를 계속해서 제공했다. 천왕문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사찰 전각과 멋들어진 능가산의 암벽이 한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조화로웠다. 내소사와 능가산이 전달하는 푸른 기운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변산반도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 천년고찰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끔헀다. 아직은 푸른빛으로 가득한 내소사 자연이 붉게 물들면 어떤 풍경으로 내게 다가올지 궁금해졌다. 더해 시간이 한정돼있는 뚜벅이의 서울행 버스 시간 역시 뭔가가 아쉬웠다. 내게 내소사의 다음은 무조건 존재한다. 대자연의 숨결을, 붉게 물든 내소사의 자연을 즐기기 위해 꼭 다시 찾아볼 것이다.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는 여정이 끝날 때까지 자연과 내가 하나 된 여행이었다. 한없이 친절했던 자연이 전하는 맑고, 깨끗하고 , 푸르른 풍경들은 나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함께 약속했던 20대의 마지막 가을 어느 날, 꼭 변산반도를 다시 찾아 대자연이 주는 숨결을 마음껏 즐겨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