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늙고 뒤끝 없이 가기 위해서는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안다. 아주 잘 안다. 그리고 노력 중이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새끼와 엮긴 일이면 시꺼먼 색안경부터 낀다. 난 내 새끼 지상주의자다.
오구오구
오이야, 오이야
누가? 누가?
2024년 학기 초 어느 월말
월말 팀 회의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가 지나도록 끝나질 않았다. 실적, 이것이 문제로다.
종합격투기 한 판을 해도 이렇게 깨지고 터지진 않을 텐데. 회의실 분위기가 무겁고 고요하다. 이 와중에 책소금 (중 2 쌍둥이 딸 중 한 명)이 계속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으러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은 회의 중입니다.'라는 자동 문자를 보내고 무음으로 변경했다. 퇴근 시간이 조금 넘어 회의가 끝났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책소금으로부터 8통의 부재중 전화가 왔었다. 수학 학원에 있을 시간이고 학원 도착 문자도 확인했기에 책소금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회의록을 정리해야 했지만, 이미 나의 뇌는 안드로메다의 손에 이끌려 안드로메다 행성을 떠다녔다. 노트북을 덮었다. 본사에서 집까지 거리는 44km이다. 하지만 퇴근 시간에는 체감상 88km가 된다.이다. 특히 뇌가 안드로메다에 있을 때, 운전은 더 피곤하고 싫다.
나: 하이, 책소금
책소금: ....... (우는소리만 들림)
나: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책소금: 엄마, 왜 전화 안 받았어?
나: 오늘 회의가 길어져서 못 받았어. 미안해.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
책소금: OOO이 학원까지 따라왔어. 정말 너무 무서웠어.
나: 뭐! 그럴 땐 가까운 편의점이라도 들어가지.
책소금: 엄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지. 걔는 계속 따라오지.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나: 미안. 미안. 지금은 괜찮아? 엄마 집에 거의 다 와가는데 학원으로 데리러 갈까?
책소금: 지금은 없는 것 같아. 그냥 버스 타고 갈게.
딸은 얘기하는 동안에도 계속 울먹였다. OOO은 책소금과 초등학교 6학년 때 짝꿍이었다. 그 아이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정확한 병명은 아직도 모른다. 당시 짝꿍과 떡 만들기 시간이 있었다. 그 아이는 책소금과 함께 한 시간이 좋았는지 그 수업 이후 가끔 책소금을 따라다녔지만 몇 번 그러고 말았었다. 쌍둥이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 그 아이는 6학년 때보다 조금 더 자주 책소금을 따라다녔다. 쉬는 시간 책소금 반 복도에서 기다리거나 하교 시간에 교문 밖 횡단보도까지 따라왔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책소금에게 담임선생님과 상의를 해보자 했었다.
책소금: 예독이랑 같이 다니니까 괜찮아. 처음엔 무서웠는데 이제는 짜증만 나. 그리고 OOO, 생각보다 겁이 많은가 봐. 내가 신발주머니를 휘두르면 도망가.
나: 그래. 다행이네. 엄마 생각엔 OOO가 너랑 떡 만들기 할 때 재미있었나 봐. 그래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다고. 그래도 너무 가까이 따라오거나 다른 행동을 하면 엄마한테 꼭 얘기해. 알겠지?
딸아이가 괜찮다고 하니 더는 오버하지 않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앓고 있다는 마음의 병이 자폐스펙트럼인지, 뇌질환인지, 정신질환인지 모르기에 내 안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선입견과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가르치지고 약자에게 더 친절해야 한다 가르쳤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를 가르치질 못했다. 남의 시선에 좋아 보이는 건 다 해보려는 허세 넘치는 속물이었을 뿐이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중학교 1학년을 마쳤다. 예독과 같은 반, 같은 학원을 다녔던 중학교 1학년 때와 달리 2학년은 예독과 다른 반에 다른 학원을 다니게 되었었다. 나는 OOO 때문이라도 같은 학원을 다녔으면 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사소한 일이라도 자식 일은 절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OOO은 책소금을 따라다녔다. 걱정이 되어, 책소금에게 OOO에 대해 물어보면 괜찮다고 했었다.
그 런 데, 그날은 괜찮지 않았다.
'띠 띠 띠 띠 띠 띠' 현관문 여는 소리와 함께 책소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 우는 책소금을 꼭 안아줬다. 책소금은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현관에 서서 울었다. 그런 책소금을 보며 불안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책소금이 안정을 찾은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책소금: 하교할 때는 OOO가 없었고 버스 타기 귀찮아서 학원까지 걸어갔어. 학원에 거의 다 와가는데 자꾸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뒤돌아봤지. 그런데 거기에 OOO가 있는 거야. 무섭고 떨렸어. 어떻게 할지 몰라서 계속 엄마한테 전화했고.
나 : 그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많이 놀랐겠다. 진짜 진짜 미안.
책소금: 내가 OOO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계속 따라오더라고. 몸이 더 떨렸어. 그래서 뒤도 안 돌아보고 정말 엄청 빨리 뛰어서 학원으로 갔어. 수업받는 동안에도 OOO가 학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걱정됐어.
남편: 엄마가 안 받으면 아빠한테라도 하지.
책소금: 그땐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 엄마, 나 너무 무서워. 내일 학교에서 OOO을 만나면 어떡하지.
예독: 걱정 마. 내일은 내가 계속 같이 있어줄게. OOO, 우리 반이잖아. 반에서는 엄청 조용하고 착해.
나: 예독이 네가 도와줄 수 있어? 그럼 내일은 책소금 좀 챙겨줘. 엄마는 내일 책소금 담임선생님과 통화해볼게.
남편: 우리 예독, 고맙다. 당신은 내일 회사 시간만 괜찮으면 통화 대신 직접 가서 상담을 해보면 좋겠는데.
남편의 말대로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다음 날 오후 1시
출근길에 책소금 담임쌤과 통화를 했다. 담임은 놀라며 오후 1시쯤 괜찮다고 했다. 회사에는 사정이 생겨 점심시간을 한 시간 늦추겠다고 전달하고 오후 1시, 2학년 교무실에서 담임쌤을 만났다. 담임쌤에게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어제 일까지 설명을 했다.
선생님: 책소금은 괜찮아요? 어머님도 많이 놀라셨죠?
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급하게 뵙자고 했습니다.
선생님: 잘 오셨어요. 오전에 어머님 전화받고 전담 선생님과 미리 얘기를 나눴어요. 어머님도 아시겠지만 OOO가 선택적 함구증을 앓고 있어요. 전담 선생님 말씀으론 사회성이 떨어지는 함구 증상이 있는 사람과 달리 OOO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그 주변을 맴도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해요. 하지만 OOO가 말도 안 하고 글로도 표현하지 않으니 다른 아이들은 OOO의 행동을 무서워하거나, 무시하거나 대놓고 욕을 한다고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렇다고 책소금에게 한 행동이 괜찮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저와 전담 선생님도 그 부분에 대해선 OOO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나: 저도 책소금에게 OOO이 책소금과 친해지고 싶은데 표현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 같다고는 했어요. 그리고 너도 피하지만 말고 '싫다'라는 표현을 OOO 이에게 정확하게 말로 하라고도 했는데,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말을 못 하더라고요. 그동안 별일이 없어서 이러다 지나가겠지 했어요. 그런데 이번 일은 제가 당했다고 해도 무섭고 소름 끼칠 것 같더라고요. 제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이 문제를 잘 해결해 볼게요. 그런데 어머님, 혹 학교나 OOO 이에게 따로 원하시는 건 없으세요? 사과라던가.
나: 사과요?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저는 책 소금과 친구가 되고 싶은 OOO의 마음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더 이상 책소금을 따라다니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뭐가 맞는 건지. 또래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OOO나 OOO의 가족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지. 그렇다고 제 아이를 불안 속에 살게 할 수는 없고. 어렵네요.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네.
상담을 마치고 오후 업무를 보는 동안 괜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책소금 담임쌤에게 전화가 왔다. 생각보다 빨리 전화가 왔다. 2학년 주임쌤, 전담쌤과 상의를 후 OOO의 엄마와 통화를 했다고 한다. OOO의 엄마는 한동안 OOO와 함께 하교를 하겠다고 하며 추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힘들었을 책소금과 우리 가족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단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책소금과 OOO의 하교 시간을 달리해 최대한 마주칠 일이 없도록 신경 쓰겠다고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만약에 OOO가 또 따라오면, '따라오지 마'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자기에게 꼭 얘기하라고 책소금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빠르게 처리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OOO의 엄마에게도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담임쌤에게 대신 부탁했다.
퇴근길, 운전을 하다 말고 나모 모르게 울컥해 울었다. 내 새끼가 안전하다는 안도의 눈물인지. OOO의 엄마를 향한 미안함의 눈물인지. 큰 아이 네 살 쯤인가 열성 경련을 일으켜 쓰러졌을 때, 그때 치료할 타이밍을 놓쳤다면 나도 OOO 엄마처럼 다른 부모에게 항의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라는 두려움 반, 다행 반의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복받쳤다.
책소금, 예독,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담임쌤과의 상담 내용, 전화 통화 내용을 얘기했다. 책소금은 알겠다는 대답 외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남편은 OOO 엄마한테 고맙다며 잘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그 일은 해피엔딩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찜찜한 기분이 밤늦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새벽 3시, 가슴이 답답해 부엌으로 나와 물 한 잔을 마셨다. 잘 끝났지만 개운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남의 새끼, 남의 가족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내 아이만 괜찮다면 우리 가족만 괜찮다면 된다는 생각이 창피했던 거다. 그리고 내 말과 행동으로 상처받았을 OOO와 그 가족에게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면서 인정하기 싫은 이유는 내가 그 감정들을 인정하면 나의 잘못이 아닌 게 될까 봐서이다. 스스로 용서하고 또다시 좋은 사람인 척 가식을 떨 테니까 말이다.
나이들 수록 과식을 하지 말아 하는 것처럼 가식도 지양해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지향하는 것 같다.
2023년 김훈 작가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정의한 단어로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출처: 김훈 특별기고_중앙일보_20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