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나이 들고 잘 살다 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있지만 아무나 이루지 못한다. 이 또한 안다. 잘 안다.
알기에, 더 애면글면한다. 알기에, 가끔 '잘하고 있다'라고 내 어깨를 툭 쳐준다. 아주 잠깐 스스로에게 만족해 누리는 것뿐이지 자만에 빠져 교만에 취할 생각은 없다. 진심으로 없는데, 감사하게도 나를 항상 지켜보고 심히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지, 그런 낌새만 있으면 어디서 나타나 '넌 아직 멀었다.'라는 교훈을 주고 간다. 나는 인생이란 분야에선 아직 풋내기 햇병아리다.
삐약삐약
삐약삐약
2024년 9월 초
눈의 이상을 발견한 뒤 다가올 노년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마구 쓰고 브런치 스토리와 블로그에 발행했다. 남에게 공개하기엔 부끄럽고 부족한 글이지만 일부러 공감과 댓글 창을 열어두었다. 그 하트 개수와 댓글이 주는 우쭈쭈가 나를 계속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 글이 쓰레기라고 말하지만 가끔 버리기보다 보여주고 싶은 쓰레기도 있다.
2024년 9월 말
매주 한편씩 쓰다 보니 4편의 글을 발행했다. 칭찬과 공감이 넘쳐 훈훈했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헛 산 건 아니다 싶었고 남은 삶도 내가 바라는 대로 잘 지내다 뒤끝 없이 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완전히 물 건너 간 건 아니라며 우쭐했다. 그리고 나니 이번 주는 글이 잘 안 써졌다. 쓸 소재는 있었지만 내가 딱히 반성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안 써지는데 억지로 쓰지는 말자. 이번 주는 재끼자라고 마음먹었다.
2024년 9월 29일 마지막 일요일
큰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남편의 생일 선물을 사려고 쇼핑몰에 갔다. 물론 주인공 남편도 함께했다. 남편의 생일은 9월 초로 생일파티와 선물 증정도 모두 끝냈다. 원하는 선물을 받지 못한 남편은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고 말한 히딩크 축구 감독처럼 선물을 더 받고 싶어 했다. '내 돈은 내 거, 남편 돈도 내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남편에게 선물을 더 사주긴 싫었다. 내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9월 30일까지 안 사면 선물을 없다고 선포했다. 남편이 사고 싶은 러닝화는 모두 품절이었고 날짜는 계속 흘렀다. 마음이 급했던 남편은 일요일 오전 달리기를 포기하고 쇼핑을 선택했다. 아디다스, 나이키, 뉴발란스, 언더아머 등 쇼핑몰 내 모든 스포츠 매장을 돌며 신어보고 입어봤다. 3시간이 넘도록 사지는 않고 비교만 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제발 아무거나 사라.'라고 외쳤지만 마트도 가야 되니 괜찮은 것 있으면 사고 가자고 에둘러 말했다. 다행히 남편의 쇼핑은 4시간이 넘기 전에 종료되었다. 마트로 가는 길, 아파트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운행하지 않는다고 책소금에게 전화가 왔다. 달걀, 양파 등 기본 식재료부터 간식까지 사야 할 것이 많은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니 마트에 갈지 말지가 고민됐다. 그래서 오늘 중으로 수리되는지 관리 사무실에 물어본 뒤 go/stop을 결정하기로 했다. 핸드폰 연락처에 '관리사무소'를 검색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 안녕하세요. 거기 롯데캐슬 관리사무소죠?
직원: 네. 맞습니다.
나: OOO동 XXX 호 주민인데요. 저희 라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는데 언제쯤 수리되나요?
직원: 엘리베이터 고장이라고요? 저희 쪽에 접수된 고장건은 없습니다.
나: 아파트 안내방송까지 했다는데요.
직원: 그래요?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나: 네. 감사합니다.
쇼핑몰에서 마트 가는 길은 집 방향과 같아, 관리사무소 직원의 전화는 가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마트에 도착했지만 관리사무소 직원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다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남편은 장부터 보자 했다. 엘리베이터의 수리가 안될 수도 있으니, 무거운 것은 되도록 피하고 꼭 필요한 것만 구매하자고 했지만 사다 보니 카트를 가득 채우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거 엘리베이터 작동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 남편은 짐을 내렸고 나는 엘리베이터 운행 확인을 위해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는 가드가 쳐있었고 로프가 끊어져 운행이 어렵다는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잔뜩 구매할 때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아도 8층까지 들고 올라가면 된다 생각했는데 막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니 갑자기 기분이 나빴다. 나는 바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직원: 여보세요.
나: 아니, 도대체 엘리베이터는 언제 수리가 되나요?
직원: 몇 동 몇 호시죠?
나: 네? 아니 몇 시간 전에 엘리베이터 수리 문의한 OOO동 XXX 호 주민이에요. 알아보고 전화 주신다고 하시고 전화도 안 주셨잖아요.
직원: 아. 확인해 보니 저희 쪽에 접수된 엘리베이터 고장건은 없었습니다.
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지금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앞이라고요. 가드도 쳐있고 공고문도 붙어있다고요. 제대로 확인하셨어요?
직원: 일요일에는 당직자 한 명만 근무해서 다 돌아보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 아니, 공고까지 붙여놓으셨는데 확인을 못하셨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요.
직원: 고객님 라인이 OOO동 X라인 맞으신가요?
나: 네. 롯데캐슬 □□□, OOO동 X라인이에요.
직원: 롯데캐슬 □□□이요? 여긴 롯데캐슬 △△△입니다.
나:에? 잠시만요. 제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직원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금 우리 가족은 롯데캐슬 □□□에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3년 전 살았던 롯데캐슬△△△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낯이 뜨거워졌다. 급한 마음에 아파트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관리사무소로 저장된 번호로 연락했던 것이다. 심지어 죄 없는 직원에게 왜 제대로 일하지 않느냐는 말투로 생짜증을 냈다. 통화 내용을 되짚어 볼수록 부끄럽다. 이것뿐이 안 되는 내가 한심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롯데캐슬 △△△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직원에게 사과를 했다. 이미 기분이 상했는지 '괜찮다'라고 답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시원치 않다. 나 역시 휴가를 떠난 CS 직원 대신 CS 업무를 볼 때가 있는데 99.9프로가 친절한 고객이었지만 0.1프로의 진상 고객 때문에 그날의 무드가 망가지는 경험을 해봤기에 그 직원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내가 그 개진상이었다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걸 일깨워 준 일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관리사무소'라고 저장된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삭제한 전화번호처럼 오늘의 나의 실수도 삭제하고 싶다.
상하지 않는 식재료와 공산품은 다시 트렁크에 실었다. 남은 짐들은 남편, 쌍둥이 딸들 그리고 내가 나눠 들었다. 짐 없이 8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짐을 지고 가서일까, 아님 마음이 무거워서 그랬을까.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숨이 찼다.
2024년 9월 30일
직원: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 업체에 확인해 보니 오늘 오후 8시에나 수리가 될 것 같습니다.
나: 저녁 8시요?
직원: 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근으로 내려감 (내려감 1회), 된장 하필 집에 필요한 자료를 두고 와 점심시간에 잠시 집에 들름 (올라감 1회, 내려감 누적 2회), 퇴근하고 올라감 (올라감 누적 2회): 그날 오르락내리락 왕복 총 2회를 했다. 따지고 보면 10km 달리기보다 덜 힘든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종아리가 아파 베개 2개를 쌓아 다리를 올리고 잤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도 하지만 원숭이를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잘 되고 있다고 느낄 때 스스로 컨트롤하며 균형이 깨지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불 킥을 하게 될 것이다.
풋내기:
1. 경험이 없거나 나이가 어러서 일에 서투르거나 물정을 모르는 사람
2. 차분하지 못하여 객기를 잘 부리는 사람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삐약삐약 #풋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