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연륜이 쌓여 삶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어지고 행복에 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될까? 수련이 덜 된 나는 무수한 질문들의 답을 스스로 찾지 못해 모든 종교의 신들과 샤머니즘에 의지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반 미친년으로 불안과 분노에 가득 차 분노 조절이 되지 않았던 삼십 대 후반, 믿을 곳은 '점'이었다. 동자신, 드라마작가신, 엽전신, 장군신, 명리학자 그리고 타로점까지 온갖 샤머니즘에 빠졌었다. 샤머니즘으로 답답한 나의 인생에 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빠져들수록 더 흐릿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잠이 오지 않던 이른 새벽,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데스노트에 미워하는 사람들이 이름과 이유를 써 내려갔었다. 며칠 동안 계속 쓰다 보니 데스노트에 적어야 할 사람들이 없었다. 무작위로 마구 쏟아내어 버려 그랬을까 이유 없이 마음이 평온해졌었다. 그때 느낀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적어보면 아마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경험을 한 뒤로는 샤머니즘과 종교와 거리를 뒀다.. 그 대신 뭐라도 끄적이는 '쓰기'라는 행위에 기대 내 감정을 치유하고 있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다.
2024년 8월 어느 날
남편: 점이나 보자.
나: 내가 많이 봐서 아는데 거기서 거기야. 볼 거 없어.
남편: 그냥 재미 삼아.
나: 그럼 신점 잘 보는 곳은 알아봐야 하고 사주는 OO 언니가 조카 보고 온 곳이 있는데 거기 괜찮데. 거기 예약해?
남편: 어. 해.
남편은 작년 말부터 팀을 옮겨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올가을 분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초반에 자리 잡기가 힘들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탄력이 붙어 프로젝트의 성과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분사는 프로젝트 시작부터 결정된 사안이라 그것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곤 남편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프로젝트 시작 전 회사에서 제시한 분사 조건과 분사 시점에 제시한 조건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 조건 중 남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변경되자 그때부터 남편의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전망은 좋았고 성사시킬 자신감까지 있었기에 남편은 다시 한번 총책임자에게 기존 조건대로 분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총책임자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시간만 끌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본사에 남기로 결정한 팀원들이 늘어났다. 남편 역시 프로젝트는 탐이 났지만 그것만으론 직장 생활을 지속할 순 없었다. 나는 남편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 금점 (禁占)을 풀고 샤머니즘 세계로 다시 들어갔다.
2024년 8월 여름휴가 중 사주카페에 갔던 날
오후 1시, 남편과 나는 성남 모란시장 근처 작은 카페 문에 도착했다. 대학 시절, 종종 다녔던 이대 앞 사주카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카페라기보단 다방에 가까웠다. 가게에 우리 이외 다른 손님들은 없었고 카운터 앞자리에 육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앉아있었다. 보자마자'저 사람이 카페 사장이자 사주 봐주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지는 외모였다. 우리는 카페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 사장은 누구를 보러 왔냐는 물었다 나는 남편 때문에 왔지만 학생 사주도 잘 본다니 겸사겸사 고3인 편노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사장에게 편노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알려줬다. 카페 사장은 무언가 계산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 마디를 콕콕 찍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한자를 마구 갈겨썼다. 이런 광경은 어느 사주 집을 가도 흔히 볼 수 있다.
카페 사장 (사주 봐주는 분): 재수는 안 해.
나: 정말요? 진짜 그러면 좋겠어요. (진짜 그러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말 자체로 기뻤다. 이 짓은 올해로 끝내고 싶다.)
카페 사장: 애가 굉장히 귀여워. 근데 착해. 인기 많지?
나: 착하긴 한데, 인기는 없어요. (잘 맞추는 집 맞나?)
카페 사장: 그거야 부모가 모를 수 있지. 인기가 많아. 그냥 애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줘.
나: 또래 사이는 모르지만 어른들한테는 인기가 좀 있어요. 다행히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꿈이 변함이 없어서 저희도 별말 없이 밀어주고 있어요. (본인 하고 싶은 거 다 하다 성적이 이 지경인데. 더 하라고?)
카페 사장: 남자애가 감성이 풍부해. 신기하네. 그림이나 글에 소질이 있어. 미술 해?
나: 미술요? 아니요. 그림은 진짜 못 그려요. 글 쓰는 건 좋아하긴 해도 어디서 상을 타본 적은 없어요.
카페 사장: 미술은 부모가 안 시켜서 그렇지. 했으면 한예종이나 홍대 갈 실력이야.
나:..... (어릴 적부터 색연필, 크레파스를 사줘도 점 하나 안 찍었는데. 미대라니, 그것도 한예종? 홍대?)
카페 사장에 말에 나는 남편 와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 남편은 '여기 잘 보는 거 맞아?'라는 의심의 눈빛을 보냈고, 나는 '일단 들어보자'라는 눈빛으로 답을 보냈다.
카페 사장: 인 서울 쓰자. 생각하고 있는 대학이 어디야?
나: a, b, c, d, e, f 대학에 원서를 쓰고 싶다고 하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카페 사장: 왜? a, b, c, d는 해볼 만해. 근데 e는 잘 안 맞고 f 대신 g 대학은 어때?
나: g 대학은 내신 커트라인이 높아서요.
카페 사장: 그럼 Z 대는 어때? 계속 Z 대가 떠오르는데. 괜찮을 것 같아.
나: Z 대학이요? 거기는 아예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카페 사장: Z 대학. 좋다. 그 대학 꼭 써봐. 수능이 14일인가? 당일 컨디션이 생각보다 좋아. 생각보다 OO 과목 성적이 잘 나올 거야.
나: OO 과목을 제일 못하는데. 잘 나오면 좋죠. (입시 전문이라더니 수능시험 날짜는 알고 있네)
카페 사장: 그리고 애가 자고 싶은 대로 놔둬. 애는 잘 자야 머리가 돌아가.
나: (편노한테 사주를 받았나. 왜 이래?)
남편: 지금보다 더 자라고요? 지금도 꽤 많이 자는데.
카페 사장: 아니야. 잠으로 채워야 해. 애가 고2까지 공부를 안 했는데 고3이 되고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믿어봐.
우리는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내 눈빛도 흔들렸다.
카페 사장: △△△ 계열에 지망한다고. 잘 맞아. 괜찮아. 일단 원서 쓸 때 Z 대학도 넣어보고. 20대도 사주가 좋으니까 걱정 말고. 또 궁금한 거 있어? 애 잘 키웠어. 귀여워. 참 귀여워. 없으면 남편 볼까?
카페 사장의 말이 모두 맞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재수 없이 대학에 입학한다니 기분이 좋았다. 로또를 사면 1등에 당첨된 듯한 기분처럼 말이다. 남편의 사주도 좋다며 본인이 생각한 대로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75살까지 돈 잘 벌 거라 했다. 그럼 됐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남편 덕분에 나는 일찍 은퇴해서 놀고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카페 사장이 내 미소를 봤는지 대뜸 '부인도 잘 얻었어. 잔소리도 없고 남편 뜻도 잘 따라주고 시댁에도 잘하니 얼마나 좋아'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 말에 내 미소는 이내 '하하 하하' 소리를 내며 함박웃음이 되었다. 남편과 편노의 복비를 이체하고 일어서려는데, 편노 말고 아이가 둘이 더 보이는데 맞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둘 다 잘 클 거라며 잘 키워보라고 했다. 그리곤 카페 사장은 '셋 다 예쁘다'라며 혼잣말을 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내가 잘 된다는 얘기보다 애들이 잘 된다는 얘기가 더 듣기 좋았다. 남편도 잘 맞추는 사람 맞냐며 의심을 하면서도 애들 칭찬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편노가 지원하겠다는 학교들과 카페 사장이 권해준 Z 학교의 수시 날짜를 확인했다.
편노가 꼭 지원하고 싶다는 학교 중 a 학교와 Z 학교의 수시 일정 같았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다가도 두 학교 편노의 성적 대비 우주 상향이라 어쩜 불길한 예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디든 합격만 한다면 땡큐 베리감사 감지덕지다. 그런데 자꾸 나는 카페 사장이 언급한 Z 학교에 마음이 기운다. 학교에서 돌아온 편노에게 저녁을 차려주며 슬쩍 Z 학교 얘기를 꺼냈다. 점쟁이가 꽂아준 학교라는 얘기는 쏙 빼고 말이다. a 학교는 정말 초초초우주상향이고 작년 경쟁률도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니 같은 날 보는 Z 학교 OOO 학과 지원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Z 학교도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학교는 아니지만 경쟁률 면에서 나 기타 상황을 고려해 보면 Z 대학이 그나마 합격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고, 최대한 신중하게 생각해서 수시 원서를 잘 써야 하지 않겠냐고. 이미 엄마는 Z 대학으로 정했다는 마음을 최대한 감추며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아이를 설득했다. 내 얘기가 끝나자 편노는 떨어지더라도 a 학교 OOO 학과는 꼭 지원하겠다고 했다. 나는 한 번 더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편노는 더 확고하게 a 대학 지원 의사를 밝혔다. 내가 더 말해봤자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깔끔하게 내 욕심을 버리고 쿨하게 아이를 응원하자 마음먹었다. 마음은 먹었는데 소화가 되지 않았는지, 그날 밤 잠이 들기 전까지 나는 카페 사장이 추천한 Z 학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뒤척였다.
2024년 8월 사주카페를 다녀온 다음 날
출근을 했지만 오전 내 어제 처음 만난 카페 사장에게 Z 대학 말고 a 대학에 지원해도 좋을지 물어보고 싶었다. 안다. 그녀가 신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어떤 신이라도 어느 학교에 합격한다고 확언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들어야 찜찜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안녕하세요. 말씀해 주신 Z 학교와 a 학교 수시 일정이 같은데 아이가 a 학교를 지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네요. 억지로라도 Z 학교에 지원하는 게 나을까요? 다시 한번 더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연락 주세요.」라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 발송 완료와 동시에 '이런다고 애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들었다. 문자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왜 나는 꼭 저지르고 나서야 깨닫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내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
2024년 9월 12일
나는 편노에게 경쟁률을 끝까지 확인하고 수지 원서 접수하자고 했지만, 그 녀석은 무슨 자신감인지 과감히 6장을 소신 지원하고 결제까지 끝냈다. 편노가 지원한 6개 대학 중에 당연히 Z 대학은 없었다. Z 학교에 지원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가 낳고 19년을 키운 내 아이의 말보다 딱 한 번 만난 낯선 이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리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나는 여태 내가 뒤 끝없이 쿨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질척 질척 미련이 가득한 캐릭터였다. 지금은 내가 설정한 삶의 지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지만, '경로를 이탈했습니다.전방 XXX미터 앞에서 유턴하세요.'라는 내 마음속 내비게이션 안내음이 지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원래 방향으로 되돌아갈 것이라 믿는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두가 가지고 있다. 유독 나의 불안이 더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소중한 나라고 인정하고 불안한 감정이 내게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괜찮다'라고 말해주자. 이제 남은 기간 동안 편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자리를 지키며 진심으로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24년 10월 8일
아이의 첫 면접 일정이 발표되는 날이다. 그날 아침은 더욱 간절히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를 했다.(믿기 어렵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톨릭 신자로 사주로 보러 간 그날 아침에도 묵주를 꼭 쥐고 기도를 했었다.) 그날 오후 면접일을 확인하고 나를 샤머니즘에 입문시켜 준 □□ 언니와 성남 사주카페를 소개해 준 OO 언니가 함께 있는 단톡방에 톡을 보냈다.
나: 언니들 편노 첫 면접일 발표됐네. 괜히 긴장되는구만요.
OO 언니: 면접일이 언제야?
나: OO 월 OO 일에요
OO 언니: 그럼 ◇◇일에 강화도 보문사 갈 수 있겠네?
나: 당연하쥬.
□□ 언니: 그 절 기도 빨 좋다는데 oo이 조카랑 편노 시험 잘 보라고 기도하고 오자. 근처에 맛집도 많으니까 점심도 먹고.
나: 오케이! 콜!
샤머니즘:
원시적 종료의 한 형태. 주술사인 샤먼이 신의 세계나 악령 또는 조상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적인 교류를 하며, 그에 의하여 점복, 예언, 병 치료 따위를 하는 종교적 현상이다.
유의어: 무속, 무술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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