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20년 정도가 지나면 이 사람이 나와 평생 함께 할 동반자라고 느껴질까? 잘 모르겠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지만 나는 사돈, 사돈의 팔촌, 직계 가족, 가까운 친구 등 그 누가 잘 나간다, 부자다 해도 전혀 부럽지가 않다. 하지만 유독 남편이 혼자 영양제를 털어먹고 열심히 운동하며 몸이 좋아질 때, 나보다 재화가 많을 때, 또 똑같이 일하고 퇴근했는데 나만 집안일할 때 등등 남들이 들으면 우스운 것들에 배가 아프다. 왜 그럴까?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유치원 수준을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유치 뽕짝 짜짜라 짜라짜라다.
유치 뽕짝.
짜짜라 짜라짜라 짠짠짠
짜짜라 짜라짜라 짠짠짠
9월 초 망막이 찢어져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한 달 정도, 뛰는 건 물론이고 고개조차 돌리지도 말라는 의사의 엄포가 있었다. 웬만해선 남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최대한 조신하게 한 달을 보냈다. 시술 직후 실명이 될까 봐 불안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시력이 조금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빼면 대체적으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 그 덕분에 살만 포동포동 올랐다.
한 달 뒤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몇 가지 검사 후 의사를 만났다. 시술은 잘 됐지만 망막 박리가 진행 중이니 3개월 간격으로 검사를 받고 상태를 지켜보자 했다. 잘 되었다니 다행이다. 다시 운동을 해도 될지 물어봤다. 내심 뜀박질은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해주길 기대했었지만, 의사는 헤드뱅만 빼고 다 괜찮다고 한다.
솔직히 운동을 못 했던 한 달 동안은 거리 늘리기, 속도 올리기 등 달리기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벽 알람 소리에 일어나지 못해 달리기를 안 했을 때, '왜 못 일어나지?', '그냥 그때 일어날걸', '이렇게 게을러터져서 뭘 하니?' 등 나를 책망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달리기는 쉬는 한 달 동안은 자책할 일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달리기를 해야 하는 시간에 책을 더 읽을 수 있었고, 엉망이지만 매주 글 한편 정도는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의사가 달리지 말라고 했을 때 불안해하던 나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점이 많았다. 의사가 달려도 괜찮다고 했지, 꼭 달리라고 한 것 아니라며 나 좋을 때로 해석했다. '그래, 하기 싫으면 하지 말자'라고 마음 편히 생각했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오는데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남편: 병원에서 결과 나오면 공유 바람
나: 잘 됐다네. 3개월 간격으로 정기검진 받으래.
남편: 그럼 이제 다시 원복 해서 빡세게 달려보자.
나:.......
그날 저녁, 남편은 2025년 뜀박질 계획까지 읊어가며 돌아오는 일요일 하프 대회부터 11월 풀코스 대회까지 나가자 했다. 의욕적인 남편과 달리 시큰둥했다. 연습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올해 대회는 못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번 해는 달리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가 없었다.
남편은 10월 중순 마라톤 하프 대회와 11월 풀코스 대회 준비로 매일 달리기를 했다. 평일에는 10km 내외로 주말에는 20km 이상 달리는 LSD (길게 천천히 멀리 달리기) 훈련을 했다. 달린 후에는 인스타그램에 개인 기록을 남겼다. 예전부터 본인 건강은 알아서 챙기는 사람이라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내게 나타났다. 꾸준히 달리면서 목 디스크와 어깨 통증이 많이 나아졌는데, 달리기를 한 달 끊었다고 예전 증상이 돌아왔다. 몸은 아프고 살은 차올라 몹쓸 몸이 되어가는데 남편은 날이 갈수록 슬림 해지며 기록도 좋아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4만 원이 넘는 마라톤 양말도 사고 신형 쫄쫄이 바지도 사고 기능성과 가성비 갑이라는 팬티까지 샀다. 남편은 본인 것을 사면서 내게도 권했지만, 대회에 나가지도 않는데 굳이 돈을 왜 쓰냐며 거절했다. 나는 남편에게 물욕이 가득하다고 핀잔을 줬다. 거절은 내가 했지만 마라톤 양말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는 검정 양말은 정말 탐이 났다.
매일 새벽 5시면 울리는 알람 소리와 남편의 운동복 환복 소리는 잠잠했던 내 마음에 내적 갈등의 파동을 만든다. 나보다 더 나아지면 어쩌지. 나도 나갈까? 귀찮아. 그냥 다시 자자. 괴로움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지만 도통 독서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좌불안석이다.
이제 좀 달려야 하지 않겠냐며 남편이 나를 깨웠다. 억지로 일어나는 척하며 주섬주섬 운동복을 입었다. 그 주 내내 화장실 갔다 덜 닦고 나온 사람처럼 기분이 찜찜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뛸 계획이었다. 하지만 왠지 남편에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이런 내 생각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나만 왜 이러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호수 공원에 도착해 남편이 몇 km 뛸 거냐고 물어 10km라고 했더니 오랜만에 뛰는 건데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깟 10km 가지고 뭘'이라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워밍업도 대충 하고 남편보다 먼저 서둘러 뛰었다. 5km도 못 뛰었는데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만 뛸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남편이 저 멀리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모습에 '여기서 멈추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어 무조건 10km 채우기로 했다. 정말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8km부터 통증은 더 심해졌다. 인간의 다리를 얻었지만 걸을 때마다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인어공주처럼 내딛는 발걸음마다 발바닥과 종아리가 찌릿했다. 하지만 가오가 있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이를 꽉 깨물고 끝까지 달렸다. 그 결과 절뚝거리며 겨우 차에 탔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하듯 스프레이형 파스를 뿌리고 곡소리를 내며 폼 룰러 스트레칭을 했다. 남편의 달리기 평균 1km당 4분 30초, 반면 나는 6분 30초도 겨우 뛴다. 예초에 남편과 나는 라이벌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뭐 하러 개끼를 부려 몸만 아프게 했을까.
나: 아아아아아
남편: 더 세게 해. 그 정도로는 안돼.
나: 지금도 아픈데 더 세게 하라고?
남편: 그래야 풀린다.
나: 여기 발 옆 좀 봐봐. 왼발에 비해 좀 부은 것 같지?
남편: 거기서 거기 같은데. 엄살 부리지 말고 더 세게 해.
나: 됐어. 됐어. 안 해.
남편: 무리하는 것 같더라. 그러길래 10km를 왜 다 뛰냐.
나: 그냥 뛰었다. 그러면 안 되냐?
남편:......
나와 남편은 낯간지러운 말을 잘 못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남편이 나를 걱정한다 것도 안다. 하지만 괜찮냐고 묻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어려우면 아무 말하지 말던가. 몸이 아파서 그런지 평소보다 예민했다. 남편과 얘기가 길어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남편은 나보다 3살이 많다. 결혼 전에는 오빠라고 부르며 존대했지만 결혼 후, 부부는 무촌으로 나이와 관계없이 동등하다는 생각에 일방적인 존대는 하지 않았다. 말의 길이는 결혼 기간과 반비례했다. 그날 밤 나의 앓은 소리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에 묻혀 나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남편을 만나 사랑했고 결혼을 했다.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 함께 사는 동안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해결하면서 끈끈한 전우애도 생겼다. 부모님 다음으로 나와 가장 오래 산 사람이자 친구 중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인데, 나는 그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견제한다. 왜 그럴까? 초혼과 재혼을 떠나 그 특정한 누군가와 산다는 건 모두에게 첫 경험일 텐데, 그들도 나처럼 배우자에게 시기 질투 및 라이벌 의식을 느낄까?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까? 아니 콤플렉스일까? 애들이 나보다 남편을 더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일까? 질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내가 미성숙하고 유치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나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죽기 전까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또 질문을 한다. 이게 내 삶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끄고 운동복을 들고 살금살금 안방을 나왔다. 혹시나 내 소리에 남편이 깰까 봐 더 조용히 조깅 갈 준비를 했다. 누가 내게 굳이 왜 그러냐고 묻다면 모르겠다고 답할 테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새벽 조깅이 상쾌했다.
남편: 여권 좀 찾아줘.
나: 어디 있는지 몰라.
남편: 따로 챙겨두지 않았나.
나: 기억이 안 나네. 당신이 화장대 서랍에 있는지 찾아봐봐.
친구들과 일본으로 골프여행을 가는 남편이 여권을 찾아달란다. 여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지만 끝까지 찾아주지 않았다.
#유치뽕짝 #뽕짝은트로트 #박성철_무조건 #짜짜라짜라짜라 #사랑 #라이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