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나이 마흔에 접어들면 불혹(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이라 하고 쉰에 접어들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고 한다. 그 나이에 접어들면 나도 사리분별이 가능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생각했다. 생각한 대로 한 번에 이루어지면 재미없을까 봐 그런가… 마흔 후반, 내일모레 쉰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인격에도 세포가 있는지, 나이를 먹는 만큼 인격 세포가 분열해 다중이가 되었다.
엄마는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MBTI 극'E' 성향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하게 되면 잔칫집처럼 대량으로 만들어 이 집 저 집 나눠먹었다. 여름방학되면 온 동네 아이들을 챙겨 자가용도 아닌 시내버스를 티고 유원지 수영장에서 놀았다. 우리 집 개가 목줄이 풀려 동네를 돌아다니면 우리 집에 다시 데려다줬다. 심지어 대부분 동네 애들의 유치는 엄마의 손에 뽑혔을 정도였다. 그 시절 우리 동네와 엄마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응답하라. 1988' 드라마의 동네 분위기와 정환이 엄마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통장 한번 한 적은 없지만 모두들 엄마를 정말 좋아했고 따랐다. 나도 그런 엄마가 좋았고 멋졌다. 하지만 낯을 많이 가렸고 말수가 적었던 나는 엄마의 성격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엄마와 전혀 다른 성격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애로 생각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 걱정은 3살 터울의 작은언니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때까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멀리서 동네 사람이 보이면 그 즉시 뒤돌아 집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아니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많이 안 다니는 길을 택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갑자기 허둥지둥 책가방을 열고 물건을 찾는 척을 했다. 책가방이 없다면 담벼락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게'처럼 벽을 바라보고 옆으로 걸었다. 그렇게 시선을 피해도 동네 사람이 먼저 내게 인사를 하게 된다면 초점 없는 눈동자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리고 잽싸게 걷기 시작했다. 마치 '너에게 다른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듯 말이다.
그나마 혼자 다닐 때는 나만의 방법이 통했지만, 엄마만큼 강력한 극'E'의 소유자인 작은 언니와 함께라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정말 난생처음 보는 사람,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 구멍가게 주인, 세탁소 아저씨 등 그 누구든 언니가 봤다면 먼저 다가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언니가 인사를 하는데 옆에 있는 동생이 멀뚱하게 서있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심할 때는 1미터 간격으로 인사만 하다 집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인사만 했을 뿐인데 눈알이 빠질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기(氣)가 빠져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진다.
내성적 자아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였다.
2000년대 초반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또는 그런 사람을 측은하게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였다.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던 영화가 친구들 취향이 아닐 경우 그냥 혼자 극장에 갔다.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데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그냥 식당에 가서 혼자 먹었다. '몇 분이세요?'라고 물어보는 식당 직원에게 '한 명이요'라고 답하면 눈이 동그래지면서 자리를 안내해 줬었다. 나를 이상하게 이상하게 안쓰럽게 등등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겉모습도 그랬다. 연예인 OOO이 입으면 완판이 되었고 XXX의 립스틱이 동이 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키도 작고 하체비만이었던 나는 그 연예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일찍 감치 깨달았다. 같아질 수 없다면 망가져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무지개 컬러가 들어간 안경테를 쓰고 씨름선수 이만기 선수 같은 종아리에 줄무늬 반양말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지금 그때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넌 도대체 뭐냐?'
똘아이 자아가 성장기에 접어들었던 시기였다.
결혼 후 아이를 낳았다. 새로운 세상을 접했다. 여태 알 수 없던 정말 새로운 세상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은 산후조리원부터 시작됐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최소 2주가량의 합숙을 한다. 같은 방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단체 식당에서 탱탱 부은 얼굴로 밥을 먹고 휴게실에서 서슴없이 자신의 젖을 꺼내 아이에게 먹인다. 산후 몸 관리를 위해 마사지 침대에 누워 D컵 정도로 부풀어 오른 젖부터 사타구니까지 마사지를 받는다. 솔직히 대중목욕탕에서 때 밀기를 즐기는 나였지만 그 시절 산후조리원의 풍경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산후조리비용에 모든 서비스가 포함되었지만 3끼 중 한 끼만 먹고 수유도 방안에서만 했다. 마사지 역시 절반 이상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학부모 모임에 비하면 산후조리원 생활은 새 발에 피 정도였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몸과 마음이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앉아있는 학부모 모임. 만나자마자 자기소개를 통해 몇 년생인지 나이를 깠다. 그리고 바로 언니, 동생으로 호칭이 바뀌며 상하관계로 구분되었다. 언제부터 봤다고 언니고 동생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자리, 나는 점점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말 수는 적어졌다. 첫 만남 이후 여러 번 모임이 있었지만 있는 핑계 없는 핑계를 대며 만나는 횟수를 줄였다. 학부모 모임 에피소드 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둘째인 쌍둥이 딸들의 학부모 모임에서 나온 소문이었다. 큰 아이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쌍둥이 딸들의 학부모와 겹치는 부분도 없고 딱히 학부모 활동도 하지 않아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한 소문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문은 이러했다. 그 당시 무직이었던 내가 학교 선생님이었고 그래서 바쁘고 애들한테 엄한 편이라고. 나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박장대소를 했을 법한 소문이지만 그땐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서 나를 어렵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내가 선생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 소문은 내가 내지도 않았고 나에게 직접 물어보는 사람도 없어서 굳이 내가 먼저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다. 솔직히 그 소문 덕분에 다들 나를 어렵게 생각했고 언니니 동생이니 쉽게 말을 놓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소문이 점점 사실이 될 때쯤 더 커지기 전에 집에서 논다고 커밍아웃을 했다.
외부의 접촉이 발생하면 할수록 공벌레처럼 몸은 둥글게 말아 버리고 안으로 숨어버렸다. 공벌레 자아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였다.
주말 아침, 남편과 조깅을 하러 갔다. 조깅 후 마트에 갈 예정이라 미리 마트에 차를 주차하고 그 근처에서 조깅을 하기로 했다. 마트 오픈 시간은 10시였고 우리가 마트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쯤이었다. 마트 오픈 전이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주차를 하고 1층 출입으로 가려는데 이미 1층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80%를 차지했고 나머지 20%는 그들의 부모였다. 남자 애들이 많다는 건 '게임'아니면 '유튜버' 관련 행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때 많이 했던 일이라 그런지 바로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러려니 하고 내 갈 길을 갔었을 텐데, 유독 그날은 그냥 지날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남자아이에게 불쑥 다가갔다.
나: 애! 여기서 무슨 행사 있니?
남학생: 네. 브롤스타즈요.
나: 게임?
남학생: 네.
나: 안에 애들 엄청 많아. 너 늦었어. 빨리 가.
남학생: 정말요?
나: 어. 어서 가.
남학생과 나의 대화를 지켜보던 남편은 이런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왜 저러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조깅 후 집으로 돌아가서 딸들에게 엄마가 이상하다며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남편의 얘기에 딸들은 믿을 수 없다며 연신 '엄마가?', '진짜?'를 반복해 말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나라면, 그런 반응은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낯선 이에 대한 공포나 불안감보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고자 했던 호기심이 더 강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남학생에게 불쑥 다가가 물어봤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지만 싫기보단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갑자기 타인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런 시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없던 오지랖이 생기는 시기?
그런 시기라서 내가 변한 건지,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나처럼 변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고정관념에 묻혀 꼰대가 되어버리는 것보다 변화무쌍한 내가 좋다. 나이가 들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하늘의 뜻을 알아간다고 하지만 꼭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에라. 난 자기 주도적으로 곱게 나이 먹고 뒤끝 없이 죽지 않으련다.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우겨본다.)
책소금: 엄마, 큰일 났어.
나: 왜?
책소금: 오빠 수능날 등산 가야 해서 놀지 못한다고 하니까 등산 같이 가제.
나: 그래? 재밌겠는데. 같이 가면 되지.
책소금: 엄마. 한두 명이 아니야. 반 여자애들 거의 다 가겠데.
나: 뭐? 야 말만 그런 걸 거야.
책소금: 아니야. 애들이 오이랑 방울토마토도 챙긴다고 하고 어떤 애는 육개장 사발면 챙겨가겠데. 애들 진짜 진심이야.
나: 그럼 엄마가 만나는 장소랑 시간 정해서 알려줄게. 우리 소풍처럼 가자.
아이와 대화하면서 어린 시절 나의 엄마가 열명이 넘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을 갔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이제 내가 그 시절 엄마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산을 가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이러다 극'I'에서 극'E'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