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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Jun 11. 2021

평균 인상률에 숨겨진 비밀

안물 안궁인데 자꾸 얘기하는데 이유가 있다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매년 봄, 연봉 계약서를 받았습니다. 

계약서라기보다 어쩌면 통지서에 가까웠던 그것.


팀장님은 계약서를 나눠주면서 매년 한 마디씩 덧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사장님의 코멘트였습니다.


“작년에는 000의 영향으로 XX부서가 예상 매출에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두 부서의 문제 같지만, 회사 전체로 보면 타격이 큽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올해의 전체 직원 연봉 평균 인상률은 N%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각자 본인의 계약서를 확인하시고 이번 주까지 사인해서 제출해 주세요.

만약 사장님과 면담이 필요한 경우 따로 얘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 cytonn_photography, 출처 Unsplash


1년 간 나와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증명.

그리고 나의 1년을 또다시 함께 하자는 회사와의 약속이 적힌 연봉 계약서.


하지만 왠지 학창 시절에 나쁜 성적표를 받아 들었을 때와 같은 기분입니다.

열심히 일한 나는 어디 가고 혼쭐나는 나만 남아있죠.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어 과연 얼마나 인상되었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빠르면 그 자리에서, 늦어도 다음날 사인을 하고 팀장님에게 제출하는데요.


며칠 동안은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그 푸념은 으레 다음과 같은 멘트로 마무리됩니다.


“... 근데, 올라가 봤자 소용없대요. 옆팀 대리도 오히려 사장한테 엄청 깨지고 내려왔잖아. 그리고 거기에서 몇 프로 더 받아봤자지. ㅎㅎ 이직이 빠를 것 같아요.”



여기에서 여러분의 봉투를 제가 꿰뚫어 보자면,

각자가 열어본 봉투 안 인상률은 아마도

회사가 말한 N%에서 약간 더 높은 수준이었을 겁니다.


전체 인상분을 12로 나눠보면 현타가 옵니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설득하는 마음속 한 마디.

‘그나마 나는 평균보다는 높네.’

그러고는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꺼내지요.


여기서 잠깐.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봅시다.


1. 평균 인상률을 대체 왜 미리 공지하는 걸까요?

2. 아니 그전에, 회사가 말하는 그 수치는 진짜 데이터일까요?


2번 답은 위험할 수 있으니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1번.


봉투를 뜯기 직전,

회사가 평균 인상률을 이야기하는 전략에 대해서입니다.



#앵커링


배는 한 곳에 머무르기 위해 닻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박하게 되는 배는 그 주위에서 크게 멀어지지 못하지요.


닻을 내리다, 라는 의미의 앵커링은

처음 접한 정보가 이후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에 빗대어 사용됩니다.



앵커링을 설명하는 재미있는 예는 참 많은데요.

가장 유명한 것이 본인의 사회보장 번호(우리나라로 따지면 주민등록번호) 맨 뒷자리 숫자를 적게 한 후,

UN에 가입한 아프리카 국가의 수는? 과 같이 숫자와 관련한 퀴즈를 내면 조금 전에 적었던 본인의 사회보장 번호 뒷자리 숫자에 영향을 받는다는 대니얼 카너먼의 실험입니다.


이 앵커링 실험은 와인 가격을 맞히라고 한다든지,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를 맞히라는 등의 다양한 변주에서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아주 임의적인 숫자 하나가 머릿속에 닻을 내려버리면, 게임 끝.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인데요.


때문에, 연봉 협상과 같이 민감한 사안에서 미리 어떤 금액이나 퍼센티지와 같은 큐를 받는 것은

딱히 멘탈이 취약하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걸려드는 수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앵커링은 숨 쉬듯 우리 주변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고 피할 수도 없지요.


심지어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숫자는 앵커야"라고 예고를 한다고 해도 앵커링에 걸려든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이탈리안이든 중식이든 고급 레스토랑에 갔을 때, 가장 비싼 코스요리가 메뉴의 가장 앞에 위치한 것도,

그 이후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저렴해 보이는 앵커링 효과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맨 앞장을 펴 든 순간 보이는 숫자는 쿵하고 뇌리에 박히죠.


코스 1인당 89000원, 과 같은 높은 앵커링을 처음에 받아 들고 나면

평소에는 10000원이면 먹을 봉골레 파스타에 18000원이 적혀있다 해도

아, 이 정도면 낼 수 있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곳이라면 무료로 주는 식전 빵이 3,000원에 팔리고 있다고 해도 저렴하다며 추가할지 모를 일입니다)






연봉협상 장면으로 다시 가봅시다.

사장은 A라는 사람에게 6%의 인상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별도의 협상 없이 A 씨가 6%의 인상을 수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 때 A 씨에게 계약서를 주기 전 사장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이런 겁니다.


"작년 실적이 부진해서 전체적으로 4% 정도밖에 올려주지 못했습니다."라고 슬쩍, 

숫자를 각인시켜주는 것이죠.

(이 숫자가 의미가 있는 데이터라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을 확률도 큽니다)


그때부터 A 씨의 머릿속에는 쿵. 하고 4라는 숫자가 들어앉습니다.

그리고 펴본 계약서. 6%의 인상률.

A 씨는 아마, 사인을 할 것이고 만에 하나 협상 자리에 나간다고 해도 

4라는 숫자에 닻을 내려버린 배는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할 겁니다.


어렵지도 않고 복잡해 보이지도 않는 이 전략은 여러 곳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연봉 협상의 자리에서, 레스토랑 메뉴판에서, 그리고 수산시장에서 회를 구입할 때도 말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이야기는 다음에 들고 오겠습니당.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함께 읽으면 좋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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