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매거진을 시작하며.
<안나> 라는 OTT 시리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고졸 출신이지만 외국의 유명 대학교를 나왔다고 속인 채 입시 미술학원의 강사로 일하고 있는 안나. 귀동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미국 예일대학의 미대 입시 요령을 듣고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줍니다. 아이들은 감탄하며 가짜 선생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습니다.
이어지는 장면, 옷 가게에서 가짜 명품 자켓을 구입하고 있는 안나가 전화를 받습니다. "선생님, 저 예일 붙었어요! 선생님이 조언해 주신 덕분이에요!" 라고요. 전화를 받은 안나의 표정이 클로즈업됩니다.
당황한, 그리고 어쩐지 허탈해 보이는 가짜 미술 선생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집니다.
가짜로 사는 인생이 실제의 열매를 맺는데 도움을 준다는 아이러니같은 것을 감독은 의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예일에 합격한 제자와 놀라는 선생.
이건 코치와 피코치(코칭 고객) 그 자체였습니다.
-
저는 코칭 전에 최대한 마음을 비우고 가려고 노력합니다.
비즈니스를 의논하고자 하는 기업이든 커리어를 고민하는 개인이든 사전에 주제를 파악하기 때문에 자료 수집은 필수이고 이에 대해 스터디하는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막상 코칭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저는 눈을 감고 (지하철이든 주차장의 차 안이든 노트북 앞에서든) 미리 쌓인 편견을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제가 상상하는 것은 도자기로 만든 그릇 하나입니다.
명상하는 동안 눈 앞의 이 희고 투박하게 생긴 사기그릇은 균열이 일어나고 조금씩 커져 가는데요.
눈을 감고 비어있는 그릇에 금이 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코칭 전 저의 짧은 리추얼입니다.
이 그릇은 저를 의미합니다. 사전에 파악하게 된 문제의 크기만한 고객이 아니라, 실은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제 그릇은 늘 깨끗이 비워져있어야 하고 더 넓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기분 좋은 뒤통수를 맞을 때가 생깁니다.
코칭 끝에 실행에 대한 약속을 하고 떠난 고객이 예상보다 더 큰 실행과 성과를 들고 다시 연락을 줄 때, 저는 한마디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아! 내가 (크기를 키운다고 키웠음에도) 준비했던 그릇이 모자랐구나하는 생각과, 한편 피코치가 견뎌내고 일구었을 그 노력과 시간을 떠올리며 겸허해집니다.
제자의 연락을 받고 멍, 했던 안나와 고객의 연락을 받고 멍, 한 저의 감정의 결은 완전히 다를 테지만 앞서 말씀드린 공통점은 하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에게 어떤 가짜 조언을 들었든 실제로 조언대로 충실히 실행한 사람은 그 학생이었듯이, 코치와 함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얼마나 발견했든지 코칭룸을 떠나서 싸움터로 향하는 것은 코치가 아니라 고객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코칭 덕에 좋은 성과를 얻었다는 고객들의 피드백을 종종 듣습니다.
초반에는 정말 제 코칭 덕분이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같습니다. 코칭 때의 한 장면 한 장면 복기하며 어떤 부분에서 고객에게 변혁(?)이 일어났는지 되짚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지난 코칭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코치와 이야기 나눈 것을 지난하게 실행에 옮겨보고,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열매를 맺는, 코칭 이후의 피땀과 얼룩이 가득 묻은 고객의 모습을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100여년 전, 루즈벨트 대통령이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진행한 연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니다; 강한 자가 넘어질 때를 가리키거나, 일을 하는 자가 더 잘할 수 있었던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다. 공은 실제로 경기장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과 피로 얼룩져 있다; 그는 용감하게 노력하며; 실수하고, 수없이 실패하며, 왜냐하면 실수와 부족함 없이 노력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위해 노력하는 자; 큰 열정과 헌신을 아는 자;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자; 최선을 다해 결국 큰 성취의 승리를 맛보고, 최악의 경우 실패하더라도, 대담하게 도전하는 동안 실패하여, 결코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차가운 겁쟁이들과는 다른 자리에 있을 것이다."
"It is not the critic who counts; not the man who points out how the strong man stumbles, or where the doer of deeds could have done them better. The credit belongs to the man who is actually in the arena, whose face is marred by dust and sweat and blood; who strives valiantly; who errs, who comes short again and again, because there is no effort without error and shortcoming; but who does actually strive to do the deeds; who knows great enthusiasms, the great devotions; who spends himself in a worthy cause; who at the best knows in the end the triumph of high achievement, and who at the worst, if he fails, at least fails while daring greatly, so that his place shall never be with those cold and timid souls who neither know victory nor defeat."
The man in the arena.
경기장의 투사 외에 열매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무'에서 땀 흘리며 뛰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