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 오아시스를 재발견하다
반복되는 육아 속에서 많이 힘들었다. 다른 무엇인가를 할 여력이 없었다.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는 대상 없는 미움만 가득했다. 지쳐 갈 즈음 오랜만에 반가운 연락이 왔다. 비슷한 시기의 육아를 하고 있는 모나선생님이 외부 수업에 함께 가자고 했다. 주말의 반절을 비워두고 그날을 기다렸다.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나가는 주말 외출은 뭔가 모를 미안함이 있다. 이 미안함이 내 마음의 무게가 된다.
"언제 들어와?"
우린 이 짧은 문장으로도 다투고 하루를 말하지 않고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남편이 일찍 와주었으면 하는구나 싶었다. 처음에 나는 여유롭게 시간을 말했다. 남편은 정말 빠듯한 시간을 요구했다. 어차피 지켜지지 못할 시간이라 얼 버부리고 나갔었는데 역시나 늦었다. 남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남편과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나는 밖에 나가서 요가를 좋아하고 남편은 집에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한다. 우리의 책꽂이를 바라보면 둘이 얼마나 다른 뇌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남편의 서가가 궁금해서 한 권씩 뽑아 보지만 남편은 내 책을 건드린 적이 없다. 집에 있는 게 너무 좋은 사람이 나가는 취미를 100퍼센트 이해할리 없다. 여기서 타협이 필요하다.
주말 외출을 기꺼이 허락해주나 일찍 돌아오길 바라는 그가 미웠다. 나는 아기와 종일 7일을 있는데 그 반나절을 못 기다려주나 싶었다. 그러나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1순위인 사람이다. 약속도 정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외에는 모두 거절하고 집으로 온다. 육아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온다고 했다. 내 마음은 또 지 새끼 육아가 그렇게 괴로울 일인가 하고 뾰족뾰족 성을 낸다.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다. 출발 한 시간 전부터 내 점심을 차려주고 아기도 돌보면서 나에게 나갈 준비를 하라고 배려해주었다. 자신의 점심을 먹기 전에 아기를 재웠다. 그의 점심을 먹으며 살금살금 준비하는 나와 조용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버스 알람이 울렸다. 나가기 전 선반에서 헤드폰을 꺼내는 순간 구석에 기대어져 있던 피아노 앨범들이 팍 하고 쓰러졌다. 아기의 눈도 번쩍 떠졌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여름이 부쩍 가까워졌다. 나뭇잎은 푸르렀고 미세먼지 걷힌 하늘은 새파랬다.
따가운 햇살에서 재즈 페스티벌 음악을 들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늘 듣는 플레이 리스트가 아니라 그랬는지 발 뒤꿈치가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어깨에 맨 요가매트 스트랩의 느낌도 좋았고 텀블러에 든 항상 마시는 커피맛도 달랐다. 입꼬리가 달싹거렸다.
버스를 타고 좋아하는 책을 보면서 갔다. 한문단을 읽고 창밖을 보고 한문단을 읽고 창밖을 봤다.
나는 무엇에 묶여있었던 걸까? 사실 육아에서 내 발목을 잡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 마음의 괴로움일 뿐이다. 명상을 하며 항상 듣는 이야기인데 이만큼 와 닿는 경험을 한건 오랜만이다. 아기가 날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육아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쥠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닻을 내리고 정박한 배라 생각했었다. 결혼도 그랬고 육아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내 발목에는 아무것도 매어있지 않았다. 귓가에는 좋아하는 음악이 들려오고 책 한문단을 읽고 그리고 차창 밖을 보는데 20대 길 위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만났다. 그땐 그랬지 하는 과거 회상적 감정이 아니라 지금도 다시 설렐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우중충하고 괴롭고 손해 보는 것만 가득한 육아일기가 아닌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글들이 기다려졌다.
행사 장소에 도착해서 매트를 깔았다. 얼마 만에 야외에서 깔아보는 매트인지 새삼스럽게 매트에게 미안해졌다. 빌딩 숲 사이에서 파란 하늘, 날씨는 정말 완벽했다. 적당히 따가운 햇살이 내 피부를 간지럽혔다. 손을 하늘로 뻗으면 손 끝에 바람이 스쳐가는 게 느껴졌다. 다운독에서 햇살에 데워진 매트의 고무냄새가 났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모래알들. 나의 호흡과 굳은 오른쪽 햄스트링과 시큰거리는 왼 손목과 앞으로 숙였을 때 아픈 왼쪽 갈비뼈와 모든 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의 수업 문장 하나하나가 그냥 마음속에 들어왔다 호흡으로 빠져나갔다. 갇힘 없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이 공간에 내가 있음이 느껴졌다.
수업을 할 때 늘 따라오는 멘트들이 있다. '잘하려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 판단 평가하는 마음 없이하기.' 나는 육아를 잘하려고 했고 남들보다 수월한 상황에 힘든 나를 자책했다. 나는 스스로를 못난 엄마라 판단했다. 고통이라 생각했고 이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 남편이 미웠다. 앞의 세 문장과 마지막은 조금 다르지만 모든 건 내 마음이 쥐고 있는 문제였다. 놓아버리니 이렇게 가뿐한걸!
산후 몸 상태라는 것도 잊고 수련에 빠졌다. 모든 게 좋았다. 옆에 같이 온 선생님의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쳤을 때 눈물이 났다. 이 순간이 감사했다. 이 수업이 고마웠고 집에 있는 아기가 고마웠다. 아기와 함께 있을 남편이 고마웠고 햇살, 바람 그리고 공간에 있는 존재들이 고마웠다. 정말 완벽한 외출이었다. 최근 다툼과 반복되는 육아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친구도 만났고 주중 수련시간도 늘렸다. 그러나 마음은 무거웠고 머리는 아파왔다. 상담을 예약해 두었다. 그런데 오늘 예기치 못한 수업에서 나 스스로 그 묵은 짐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기분 좋음이 이어진다. 물론 문제는 또 나를 찾아오겠지. 아니 내가 또 다른 문제를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험이 향후 또 다른 탈출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전에는 약속을 갔을 때 마음이 무거웠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며 갈 시간이 다가오는 거에 한숨이 쉬어졌다. 출발 전에 연락을 했다. 약속시간도 늦지 않았고 나의 마음도 전혀 무겁지 않다. 집이라는 존재가 어둡고 서늘한 밤 돌아갈 따뜻한 곳으로 느껴졌다.
"엄마가 늦게 왔지/" 아기를 안고 던지는 남편의 말에도
"엄마 많이 기다렸어요?" 부드럽게 응수할 수 있었다. 과거의 경험에 미루어볼 때, 내가 뭘 늦어 이 정도도 혼자 못 보고 나한테 툴툴거리나 했을 텐데 정말 여유가 넘쳤다. 다음 글은 육아는 지옥이다 일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문제요.'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못난 마음을 바라볼 용기도 생겼다. 엄마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이 순간에 있기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