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을 걷다
코펜하겐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이 낯선 도시를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였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때로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움직여야 하지만 적어도 첫날은 하루 종일 걷는다는 생각으로 골목골목을 걸어보았다. 그러면 내가 미리 목적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선물 같은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파리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코펜하겐의 첫인상은 다소 건조했다. 건축물 자체도 엄숙하고 경직된 느낌이었고 사람들도 다소 차가워 보였다. 도착한 첫날밤은 홀로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울적했었다. 호텔방도 맘에 들지 않아서 다른 방으로 바꿔달라고 요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마음이 그래서였는지 호텔방에서 보이는 광장도 새롭고 궁금하기보다는 낯설기만 했다. 아침이 밝았다. 나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호텔 문을 나섰다. 코펜하겐의 번화가 쪽으로 걸어 볼 생각이었다. 나는 구글맴을 켜고 대략의 방향만을 기억하면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8차선의 대로변을 마주 하자 일단 길을 건너본다. 그 맞은편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건넜다. 나는 코펜하겐의 신호가 매우 짧다는 걸 느꼈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평균 20센티는 커 보였다. 다리 길이가 길어서 걷는 시간이 단축되나?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약간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건너자 길게 둘러 쳐진 울타리 중간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보였다. 들어가도 되는지 안되는지 별 안내문이 없어 살짝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웬걸 공원이다. 아침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걷거나 벤치에 앉아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새소리를 듣고 있다. 호수가 있다. 물새가 한가롭다. 투명한 호수는 주변의 풍경을 잔잔한 물결로 흔들며 담아내고 있었다. 어제의 복잡했던 마음은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나는 이렇게 싱그러운 자연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행복감으로 완전히 차오르는 나 자신에 놀랐다. 외르스테드스파켄 (Ørstedsparken)이라고 불리는 이 공원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언제나 나의 아침을 열어주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의 모든 아침을 찬란한 햇빛과 바람과 새소리로 시작하였다.
공원을 벗어나자 작은 광장(Playground on Israel's Square)이 펼쳐졌다. 광장에서는 인근 학교의 아이들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거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는 벼룩시장도 열려서 지날 때마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바로 옆에는 가판대에서 현지 농산물, 고급 식품, 음료, 디저트를 판매하는 도심 속 실내 시장이 있어서 볼거리가 넘쳐났다. 그 후 나는 숙소에서 나와서 혹은 들어가는 길에 이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였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자 내가 들러보고 싶었던 인테리어 샵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제 도심 쪽으로 진입하게 된 모양이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덴마크 브랜드 헤이(HAY) 매장까지 둘러보고 또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어느 틈엔가 내 눈앞에 펼쳐진 작은 광장은 자연스럽게 나의 발길을 그쪽으로 인도했다. 나는 그곳, 야외 꽃시장에서 꽃을 구경하고 덴마크 의장대의 행진을 구경했다. 원통형의 외관으로 나의 시선을 끈 건물이 있었는데 룬데토른(Rundetaarn)이라 불리는 17세기에 지어진 관측탑이었다. 이 원통형의 건물을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 대신 내부 나선형 경사로를 통해 걸어올라 가야 하는데 그 움직임이 꽤 흥미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맨 꼭대기 층의 외부로 나가면 코펜하겐 시내를 360도 전망할 수 있는 옥상이 있었다. 그 밖에도 항구로 알려진 뉘하운과 국립도서관까지 별다른 경로의 계획 없이 발 길 닿는 대로 하루를 보냈다. 국립도서관은 따로 날을 잡아서 방문해 보려고 했던 곳이었는데 우연찮게 오늘 일정에 포함되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저서 월든에서 "정신적인 일이든 육체적인 일이든 일을 하느라 현재라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희생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었다. 나는 삶에 넉넉한 여백을 두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자칫 여행을 하다 보면 지나치게 일정에 얽매어 움직이게 된다. 매일의 일정을 만들고 예약을 하고 그 시간에 지키기 위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볼 시간을 내지 못한다. 코펜하겐은 초행임에도 별다른 사전 계획도 가이드도 없이 시작되었다. 나는 구글맵을 켜고 숙소 주변을 무작정 걸었다. 대략의 몇몇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발길 닿는 대로 골목골목을 걷다 보니 내가 이 도시의 어디쯤 있는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체감하면서 도시를 깨닫게 되었다.
길을 걷다가 자꾸 샛길로 빠지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나의 마음을 끌어 경로에서 이탈시킬 만큼 매력적인 대상을 만났다는 의미가 아닌가. 걱정하지 않아도 걷다 보면 도시가 나를 이끌어준다. 아주 살짝 열려 있는 문에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목표한 곳에 늦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금 머물러 있는 거기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완벽하게 짜인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거나 타인이 만들어 놓은 계획에 나를 맞추면 다른 것이 끼어 들어갈 틈이 없다. 늘 내 곁에 여백을 두는 것 그 시간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나 스스로의 방식으로 걸어가야 내가 자라나는 시간이 된다. 그 시간들은 잊히지도 사라져 버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