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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Nov 13. 2021

타자는 지옥일까, 구원일까

“순수한 외부, 완전한 타자의 침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타자의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며, 결국 구원의 길임이 드러난다.” ("에로스의 종말" 중에서, 한병철 저)





타자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나는 학회 세미나에서 발표할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특별히 공간 디자이너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간 디자이너는 자신이 또는 타인이 머무는 공간에 대한 예민함을 가진 사람이다. 만약 타인의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 대한 관심과 탐구, 그를 알아가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디자이너라면 나와 전혀 다른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환대, 선입견 없는 수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인용하면서 그런 태도야말로 디자이너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 생각했다.  프로젝트의 시작에는 늘 고객이 있고 고객은 디자이너에게 미지의 세계다. 그 알 수 없는 변수는 디자이너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이다. 하지만 그 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디자인을 시작하는 출발이 되고 공간을 그려가기 위한 핵심이 된다. 그런 생각들에 머물러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나의 지인의 소개로 연락을 했다며 다짜고짜 주상복합 공사를 해봤냐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내가 대답을 시작하면 바로 말을 자르고 다음 질문을 했고 답변을 하면 또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분의 말투는 매우 일방적이었고 무례했다. 일단 미팅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나의 마음이 이렇게 불쾌한지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기 너머에 나란 존재는 마치 없는 것처럼 통화를 했다. 나의 생각과 입장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태도. 그 난데없는 전화가 고요한 나의 저녁시간을 그렇게 흔들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그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구원이 되는가. 왜 내가 그 사람 앞에 깨끗이 비워져야 하는가? 나는 뭔가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며칠 후 사무실에서 미팅을 했다. 아무리 상대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졌어도 역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면 좀 나은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 사람을 맞았다. 웃으며 회의 테이블에 앉은 그 상대방은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정확하지 않은 의사표현은 처음부터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무엇보다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하는 사람의 말을 끊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를 반복하는 의사소통방식은 여전했다. 중간중간 반말을 섞는 것은 기본이고 나와 파트너 소장에게 "언니들"이라는 표현까지 했다. 인간의 무지는 죄가 없다. 단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다. 나의 헛웃음은 이에 기인했다. 나의 파트너가 이 모든 불쾌함을 견디고 있는 것을 굳이 옆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소개해준 지인을 생각해서 펜대를 놓지 않고 노트를 했다. 현장도 보지 않고 의사전달도 명확하지 않은 이 회의 내용을 가지고 견적서를 만들어 단 며칠 안에 제출해 달라는 요구. 아마 견적서에는 수많은 단서조항이 붙을 것이다. 현장 체크 후에 변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명시해야 한다. 차라리 예산을 미리 알려주면 그에 맞게 계획이 들어갈 텐데 마감재의 수준을 어느 정도 봐야 하는지에 대한 것부터 막막하다.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말하지 않는다. 간을 보는 느낌이다.


늦은 가을비가 내려 견적서를 들고 현장으로 가는  위에 움직임들이 한없이 느려 보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차창을 넘어 그대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마음도 물결을 따라  멀리 흘러간다. 몸과 마음이 멀어진다. 몸이 앞으로 갈수록 마음은 흐릿해진다. 마음이 없어진다. 나를 비운다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일까?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나의 이러한 상태는 행복을 이끌어내는 구원의 길이 된다. 며칠  세미나에서 자신에 차서 이야기했던 것들이 현실의 두꺼운  앞에서 멕을  추고 흩어져 버린다. 나의 이야기가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나는  현실을 이겨내야 하는 걸까?


현장에 도착했다. 20년 된 주상복합 아파트의 내부는 꽤 낡아있었다. 수 없이 현장에서 고객과 미팅을 했었다. 입구부터 차분히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협의를 한다. 협의를 할 때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전심으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상대방의 의중을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 의사소통이다. 현장에서 만난 고객의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미팅이 끝나고 1차 견적서를 내밀었다.




타자가 없는 사람

그 사람과 나는 평생을 본적도 없이 살아왔다. 그러다 여러 사람을 건너 건너 이렇게 인연이 닿았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도 나를 모른다.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내가 디자이너라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그가 이사를 하고 집을 고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그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비용을 산출하기 위한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리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공간 디자인은 끊임없는 의사소통 과정을 필요로 한다. 서로의 말에 최대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의견도 제대로 전달할 줄을 몰랐다. 안 되는 이유,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면 무조건 듣지를 않았다. 때로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풀어서 설명하다 보면 대부분 납득하고 이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말을 계속 바꾸거나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은 답이 없다. 그 사람들에게는 타자가 없다.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고 중요하며 가치가 있고 살아있는 것이며 그에게 타자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수단일 뿐이다. 수단으로 전락한 사람은 생명력을 잃는다.





나의 불쾌함의 원인

나는 이 원인을 생각해냈다. 마치 내가 사람이 아닌 도구, 마치 청소기나 망치처럼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내가 지금까지 겪지 못한 어떤 낯선 상황이 나에게 밀려올 것을 직감하고 마음이 아직 닿지 않는 상대방과의 나 사이의 두꺼움을 견디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서로가 가까워질 때까지 그 두 마음이 오가는 사이에 느껴지는 간극의 불편함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 그것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어느 정도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와 애정을 전제로 한다.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도 애정이 존재한다. 우리 집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의자가 있는데 그 의자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자주 앉기도 하지만 바라보기도 한다. 의자를 사는 이유는 앉기 위한 것이지만 때론 이렇게 관상용으로도 적합한 경우도 있다. 의자와 나의 관계는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더욱이 쌍방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의자가 사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자를 다루는 방식에 의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의자를 앉기 위해 샀던 바라보기 위해 샀던 그것이 의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자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이다. 서로에게 상대방의 어떤 부분에 대한 성숙과 개선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 관계의 주인은 명확하게 "나"고 서로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도 온전히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있다. 본인이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 본인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예를 들어 성경책 한 권을 읽고 본인이 깨달은 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늘 말끝마다 하나님의 뜻을 들먹인다. 그 확신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든다.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주변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판단한다. 성경과 반대로 간다. 그걸 본인만 모른다.


경험이 적은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대가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대방의 그럴 수 있음에 고개를 끄덕여 준다. 세상이 나와 다르게 돌아가고 내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들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그 시간을 버틴다. 그들은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닫혀 있다. 나이가 들었다고, 그가 살아온 시간이 그의 식견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의 한계에 갇혀 점점 축소되어가는 삶의 경계에 익숙해지는 삶을 살았다면 더 좁고 편협한 사고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말은 많아진다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만 살아있고 앞에 앉아 두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죽어 있는 것과 다름 없어진다. 관계의 불편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것에서 피어나는 짜임이다. 그 짜임의 모양이 그 둘의 관계를 보여준다. 짜임에 일방은 없다. 불가능하다. 날실만으로는 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날실만 수 없이 움직여서는 짜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날실과 씨실의 움직임이 같이 있어야 한다. 그 모양은 그 둘의 관계를 그려낸다. 상대방이 사라진 관계는 결국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얽히고설킴 없이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관계라는 짜임 ©boah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내가 하는 일이 싫어졌다. 타자는 미지의 세계이다. 세상의 똑같은 사람은 없다. 늘 신인류의 출현이다. 나는 한병철의 책을 읽으며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안전한 곳에 머물고 싶고 나를 다치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어 진다. 그러면 나는 행복해 질까?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아무리 굴려 올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돌, 결과를 알면서도 다시 돌을 굴려 올리는 인간이야말로 위대하다고 했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정하니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 든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걸 수긍하고 바라본다. 거기서 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까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일까? 세상의 부조리함, 알 수 없음, 그 두꺼움에 맞서서 계속 걸음을 옮기는 것, 그 신화는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조리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에 기반을 두는지 안다.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등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 (시지프 신화 중에서, 알베르 까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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