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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소울 Oct 25. 2021

파란 장미의 꽃말

- 삼십대 중반 커플의 백일 기념일 -

‘오래된 시작’      


내 카카오톡 상태 메세지에 써있는 문구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글쓰기도, 그와의 연애도, 사실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마치 이날을 기다려온 것처럼.


우리가 만난 지 99번째 날, 그는 파란 장미꽃을 내게 선물했다.     


“파란 장미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모르겠어요.”

“원래 파란색 장미는 없어서 꽃말이 ‘불가능’이었대요. 과학자들이 파란색 장미를 만들어낸거에요. 그래서 꽃말이 ‘기적’,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사랑’으로 바뀌었대요.”

“우와, 신기하네요!”

“저도 00씨 만나기 전까진 더이상 살면서 설레는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저도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사랑. 꼭 우리 같네요.”     


이런 꽃말 덕분에 파란색 장미가 프로포즈용으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삼십대 중반이란 그런 나이니까. 저 아침 드라마 대사 같은 대화를 우리 두 사람이 100% 진심으로 나누었다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진정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걸 좋아하고, 나는 그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보기를 좋아한다. 그를 위해 내가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낸 레스토랑은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서 독창적인 메뉴를 내놓는 곳이었다. 맛있는지 눈이 동그래진 그를 보니 뿌듯해졌다.     



먹는 것보다 말하는 걸 더 좋아하는 나는 어제 들은 팟캐스트 얘기에 열을 올렸다. 유명한 자연 다큐 PD 두 분과 인터뷰한 내용이었는데, 그 중 시베리아 호랑이에 관한 다큐를 다수 제작한 ‘박수용’ 전(前) PD에게 푹 빠져있는 참이었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곰과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은지, 단군신화 속에서 왜 호랑이가 아니라 곰이 사람이 된 건지까지 내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너무 멀리 와버려서 길을 잃어버린 말들은 “이렇게 점점 잡학다식해져서 50대쯤에는 꼭 알쓸신잡이 되겠다(?)”는 포부로 겨우 끝을 맺는다.     


멈추지 못하는 춤을 추기 시작한 동화 속 빨간 구두같이, 내 수다는 자기파괴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재밌었어요. 00씨가 신나게 말을 하는 동안 눈이 반짝반짝한 모습도 너무 예뻤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주는 그의 다정함에 또 한 번 감사하고, 마음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휴, 다행이다.

    

말을 많이 해서 당이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예쁜 카페에서 경치 좋은 창문 앞 포근한 소파에 앉아 우리는 낯간지러운 말을 몇 마디 더 주고 받았다.     


“저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우리 운동화 사러 가요. 제가 예전에 쓴 일기를 보니까 저는 운동화를 신은 공주님이고, 커플 운동화를 신겨줄 왕자님을 찾아 나서겠다고 써있더라고요.”     


나는 그에게 100일 기념 선물로 커플 운동화를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찾아낸, 내 이야기를 세상에서 제일 잘 들어주는 왕자님(?)에게 가마나 마차를 대령하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같이 쇼핑을 나섰다. 오랜만에 운동화를 사러 와서 수많은 신발 앞에 서니 진땀이 났다. 나는 오로지 ‘어떤 걸 사야 잘 샀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생각뿐. 사람들은 내 운동화에 별로 관심이 없을테지만 아무튼 몹시 진지했다.     


두 사람의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는 발이 엄청 크고 발볼도 넓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신어보고 싶다고 말하면, 사이즈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결과 중심적인 사람이라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때마다 크게 좌절감을 느꼈다.   

  

신발을 고르는 동안 그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췄다. 신발 매장에서는 크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몸을 흔드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는 과정 중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쇼핑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지 눈빛은 공허해 보였으나 무의식적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재밌었다. 밤이 어두워질 때쯤 우리 둘 다 마음에 쏙 드는 운동화를 찾아냈고, 비로소 나는 어깨춤이 춰졌다.     


“고마워요. 00씨가 사준건데 닳을까봐 아까워서 어떻게 신죠?”

“걱정 마요. 닳으면 또 사줄테니까 팍팍 신어요.”     


그렇게 우리의 99번째 날이 저물어갔다. 장거리 커플이라 주말에만 만날 수 있어서 100번째 날은 각자의 자리에서 보냈다.


이번 주말에도 그를 만났다. 우리는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어느 대학교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우리가 대학생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가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다. 어쩌면 그의 사랑도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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