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석적 자아: 근대적 자아의 극복방안

by 새현

근대적 자아 - 코기토적 자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방법서설』의 유명한 명제는 당장 후세대인 라이프니츠, 로크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하지만 칸트는 자아를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로 정의함으로써 ‘코기토적 자아’라는 데카르트적 전통을 지켜나갔다. 결론적으로 근대적 자아란 ‘코기토적 자아’다. 자아론에 있어서 두 철학자의 공통점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를 인식론적 기반으로써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회의론적 방법론을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의심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상기의 명제를 기반으로 데카르트는 차후의 기획을 개시한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이나 심신이원론 등의 이론들이 차후의 기획에 포함된다.


칸트 역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자아를 표현한다. 칸트는 -데카르트가 속한- 합리론과 경험주의의 결합물인 관념론의 시초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와 같이- 자아를 “나는 생각한다.” 라는 명제로 표현한다. 그에게 자아란 인식기관 중 지성에 위치해있다. 지성이란 감각을 종합하여 경험을 표상하는 기관인데, 모든 경험 앞에는 모든 경험 앞에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가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함축된다는 주장이다.

두 철학자의 자아론은 모두 코키토적 자아관이다. 흡사해 보이는 아이디어지만, 칸트의 개념이 데카르트의 개념보다는 비판을 피하기 훨씬 용이했다. 데카르트의 자아론은 수많은 외재적 비판의 목표기도 했지만, 내재적으로도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체계가 가진 내재적 비판은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든 것을 철저히 회의하면서 왜 ‘생각한다.’라는 술어는 의심하지 않는가? ‘존재하다’라는 술어에 대해서는 왜 정의하지 않는가? 또 데카르트는 ‘나’라는 단어도 정의했어야만 했다. 칸트는 최소한 선학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칸트의 코기토적 자아가 완전무결하진 않다. 필자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바는 코키토적 자아의 한계에 관해서다. 코키토적 자아론은 직관을 통해 자아가 있다는 것이라 비판받기도 한다. 또 다른 한계는 자아가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는 데카르트와 칸트가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만 답변할 뿐, ‘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비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둘의 자아개념은 0이냐 1이냐, 라는 양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숫자화는 모든 현상을 황량하게 만든다.


또 다른 비판은 코키토적 자아가 주체가 가진 자율성을 과대평가했다는 점에 있다. “생각한다.” 라는 술어는 자아가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이 부분은 칸트의 이론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아가 위치한 지성을 능동적인 인식 기관으로 평가한다. 그의 주장대로 우리에게 다양한 인식들과 생리적 변화를 통합하는 기능은 존재한다.-최근 몸철학에서는 인식이란 신체의 변화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기능이 수동적일 수 있다는 여러 과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19세기부터 존재해 왔다. 쇼펜하우어는 당대에 태동한 생리학의 발전 과정을 직접 지켜본 인물이었고, 여러 해부 실험과 사고에 의해 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의 케이스들을 근거로 지성이 수동적인 기관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아마 오늘날 대다수의 과학자와 일치하는 견해일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고려해 본다면 칸트의 자아란 한낱 자아감에 지나지 않는다.


양적자아에서 질적자아로: 해석적 자아


데카르트적 자아의 반대한 과학자 중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주장은 충분히 참고할만 하다. 단순히 코기토적 자아에 대한 비판자로서가 아니라 자아개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명한 신경과학자이자 과학, 심리학, 철학 교수이기도 한 그는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마치 칸트와 데카르트처럼- 자아를 내적인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전술한 이유만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다. 우선 그의 자아론에 대해 간략히 논의해 보자. 다마지오는 자아를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그중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원초적 자아’다. ‘원초적 자아’는 여러 외부 대상들과 그로 인해 유도된 신체 반응들의 종합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지성과 유사한 역할을 가진다. 또 진화를 통한 유전적 메커니즘이라는 점에서 지성과 달리 수동적이고 감각적이다. 원초적 자아 이후로는 핵심 자아와 자서전적 자아가 뒤따라온다. 핵심 자아는 원초적 자아를 의식하고 해석함으로써 형성된다. 자서전적 자아는 켜켜이 쌓인 핵심 자아로 이루어진다. 이 마지막 자아는 과거를 기억함과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한다. 다마지오는 자서전적 자아가 불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우리는 행동을 결정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온다. 자서전적 자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획득한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폴 리쾨르는 코기토적 자아를 순환논증이며 황량하다고 비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순환 명제다. ‘사고함’은 주체가 존재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체가 존재하여야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존재한다.”의 근거이다. 하지만 사고는 존재에 선행할 수 없다. 존재가 사고에 선행한다. 즉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의 원인이다. 리쾨르는 더불어 이러한 순환논증이 황량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가 존재한다는 건 드러내 보이는 명제일 수 있지만, 자아의 구체성은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양적 자아는 공허하다. 폴 리쾨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아를 질적으로 탐구해 보는 것이다. 그는 질적 탐구를 위한 수단으로 텍스트 -특히 문학- 을 채택한다. 그에게 문학이란 또 다른 세계를 열어젖히는 문이었고, 등장인물은 어떠한 범형이다. 즉 텍스트를 읽음으로 통해 새로운 세계와 범형을 자신과 비교하고 해석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폴 리쾨르의 철학은 자기 해석학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자기 해석학은 다마지오의 주장과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다. 둘 다 해석이란 행위를 통해 자아를 질적으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탐구 수단이 외부에 있느냐, 내부에 있느냐 정도다. 폴 리쾨르가 텍스트라는 외부 대상을 수단으로 자아를 구체화한다면, 다마지오는 주체 내부에 있는 원초적 자아를 해석함으로써 의식적이고 일관된 자아 -이러한 자아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고- 를 형성한다.


‘해석’을 중시한 철학자 -철학자보단 심리학자라고 소개하는게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가 한 명 더 있다. 용기의 심리학자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알프레드 아들러다. 그는 현상이나 사건 등에 대한 개인의 해석을 전환함으로써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한 현상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는 많다. 현상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인간은 변화한다. 또 이러한 해석적 혹 의미적 전환을 통해 우리는 삶을 계속 이어나갈 힘을 얻는다.


이 비행의 끝에서

하나 너의 소원을 들어줄게

아마 그건 네가 가졌던 힘과 용기일 거야

-윤하 「살별」


자아는 어디로?


폴 리쾨르가 정신분석학에도 능통하긴 했지만, 그를 비롯해 다마지오, 아들러의 사유 체계는 서로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체계 속에 자아 이론은 ‘해석적 자아’라는 명칭으로 포괄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해석적 자아를 받아들인다면, 칸트가 그러하였듯 자아의 위치를 지성에 둘 수는 없다. 지성이란 수동적인 기관이기에 해석이라는 능동적 사고 행위를 담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적 도식으로 본다면 해석은 이성에서 산출되는 표상이다. 지성의 업무는 인식 대상을 스스로가 가진 선험적 범주에 따라 정리하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날 지성의 산출물은 이성의 재료, 곧 해석과 의미 부여의 재료다. 현상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해석을 전환하라는 아들러의 주장은 마치 칸트적 이성을 염두에 둔 것만 같다. 칸트는 이성이 다른 입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관이라고 생각하였다. 감성과 지성이 ‘나의 몸’을 입지점으로 한다. 이는 마치 다마지오의 주장과도 비슷하다. 그는 원초적 자아가 세상을 삼인칭으로 표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시공간 속에서 ‘나의 몸’을 중심으로 종합적 표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반면 의식된 자아는 그렇지 않다. 즉 해석의 전회란 자유로운 인식기관은 이성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칸트가 자유란 이론적으로 논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천이성을 통해 요구된다는 주장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실천이성을 통해 요구되는 신이 절대적 도덕법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듯, 자유 역시 자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자유란 정언명령의 필요조건임과 동시에 자아 -자아감과는 다르다-의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자아’는 ‘타자’와 비교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와 ‘타인’이 동일하다면 둘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다를 수 있는 능력, 즉 자유가 있어야만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 또 모든 도덕과 처벌은 자유에 바탕을 둔다. 일관성 있는 자아가 있어야 우리는 대상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일관성을 부정한다면 처벌은 불가능하다. 물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진다. 이런 까닭에 일관성 있는 자아란 실천 이성을 통해 요구된다.


마무리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의해 수정된 코기토적 자아는 근대라는 시대를 대표한다. 코기토적 자아란 곧 근대적 자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코기토적 자아에 대해선 여러 비판사항이 있다. 문제 중 하나는 이러한 전통을 따른 철학자들이 이성이라는 거대한 빛에 눈이 멀어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과신했고,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비이성이라는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또 코기토적 자아는 양적 자아다. -마치 아도르노가 실증주의와 양적학문을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의 문제라고 비판했던 것을 연상케한다.- 즉 자아의 존재유무는 -그것이 충분히 설득력있냐를 떠나서- 설명해 주지만 질적인 탐구는 진행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판을 칸트에게 한정한다면 지성이란 능동적인 기관이 아니라 수동적인 기관이며, 지성에 위치한 자아 역시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을 증명코자 한 칸트의 전체적 맥락에 치명적인 결손을 남긴다.


전술한 근대적 자아의 극복 방안은 자아를 질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자아가 있냐를 넘어 어떤 자아, 무슨 자아가 있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전환은 코기토적 자아에서 해석적 자아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시켰다. 비록 서로 다른 학문 분야에 있지만 철학자인 폴 리쾨르, 신경과학자인 다마지오, 심리학자인 아들러 -물론 이 셋 모두 철학자라고 볼 여지는 있다.- 는 모두 해석적 자아를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칸트의 자아는 그저 자아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란 지성이 아니라 이성에 위치할 것이다. 사상사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이러한 흥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과거보다 ‘나’를 이해할 방법이 무궁무진해졌다는 사실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용운과 칸트는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