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점과 차이점
1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 -이 글에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염두에 둔다.- 는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비판하였다. 당연히 그들의 비판 중 일부는 하이데거를 염두에 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 중 상당수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일치하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은 둘 사이의 공통점을 살펴보되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차이점을 비교해보는 일이다.
문제의식
양자 모두 역사를 일종의 퇴보로 인식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서구의 역사란 존재자와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며, 호르크하이머의 경우 역사란 피지배자들의 지배자들의 규율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근대적 시대정신이란 이러한 역사의 최후산물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하이데거 모두 근대의 시대정신은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양적으로 해체하는 폭력적인 존재라고 비판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역사에 의해 부여되는 근본기분인 의심에 의해 현대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의심은 자기 자신이 안전하고 확실한 토대에 서있지 않다는 기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힘 뿐이다. 이러한 힘은 과학이라는 근대적 학문 따위로 대표된다. 과학의 목적은 외부대상을 통제하는 것에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학문이 지식을 위한 도구를 넘어 인류 전체에 내재되어 일종의 태도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자연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인간 역시도 그러한 대상으로 본다. 즉 인간 역시 양적으로 판단되고 계산가능 한 존재로, 또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 판단되기 이전의 거대하고 숭고한 존재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 역시 과학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과 인간을 대상화시킨다는 점에서는 하이데거와 의견을 같이한다. 더불어 데카르트가 이러한 근대적 시대정신의 시발점이었다는 지적과 세계대전이 이러한 상황이 분출된 예시로 든 것 역시 동일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인의 태도가 무엇에서 연원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하이데거와 의견을 달리한다. 전술했듯 하이데거에게 역사에 의해 부여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기분이다.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대안도 마찬가지로 기분에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신비주의적인 학설을 배격한다. 문제는 이성의 쓰임새다. 이성은 무엇인가를 수단화하지만, 또 어떠한 목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자기보존을 위한 수단을 찾는 데에만 이성이 쓰인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근본기분을 전환함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반이성적 -신비주의적- 철학체계를 구성했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성의 비판적 능력과 목적을 수색하는 능력을 강화시킴으로써 현대의 야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하이데거와 프랑크푸르트의 철학 모두에서 우리는 생태주의적 관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 둘 모두 과학에 의해 자연이 수단화됨을 비판한다. 우리가 1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대기오염, 녹림의 감소, 지구온난화, 해양오염과 종의 멸절 따위의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양자가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개념이다. 자연의 수단화라는 표현에서 위의 예들만 떠올리는 것이 바로 그들이 말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경우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고 지적한다. 문명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일이며, 서구 역사란 곧 자연에 대한 지배력 확장을 줄거리로 가진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 생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최악의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동시에 인간을 수단화하고 지배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자연이며, 사회는 그러한 인간 내면의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이러한 모순적 현상은 어쩌면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 그들은 문명이 자연의 옷을 입는 모순을 비판했다. 문명이란 인과적 산물이다. 즉 사회적 차별과 부조리등은 변혁가능 한 대상이다. 하지만 문명은 마치 자신이 자연처럼 변모하며 인간의 생활세계를 가득 메운다. 문명을 자연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차별이나 부조리 따위를 자연적이고 변화불가능한 운명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문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게 만든다.
하이데거의 자연은 고대그리스의 단어 피시스에 가까워 보인다. 이 단어는 보통 자연이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피시스라는 개념은 인간과 신 따위를 모두 포괄하는 광할한 어휘다. 하이데거가 중요시하는 건 피시스로 표현될 수 있는 일체의 존재자다. 이 존재자가 바로 자연이며, 자연에 대한 존중은 곧 인간에 대한 존중을 포괄한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고려해본다면, 그가 말하는 자연에는 기술적이고 인위적인 대상도 포함될 지도 모른다. 그는 반 고흐의 구두그림을 보고 존재자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예술
위에서 말하였듯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예술의 목적을 둔다. 그림 외에 하이데거가 자신의 예술철학을 설명하는데 예로 들기 선호하는 갈래는 시다. 그는 일상언어는 시적 언어에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보는 황량함의 심화이기도 하다. 시가 존재자의 풍부함을 드러내는 언어형식이라면 오늘 날의 추상화된 언어는 그와 반대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인간이 대상에게 덧씌우는 일로 존재자의 모습을 오히려 감춰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대에 우리는 과학을 하기보다는 예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존재자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 하이데거는 철학이란 전체 존재자를 파악하는 활동으로 과학보다는 예술과 밀접한 지적체계라고 규정한다.
1세대 프랑크푸르트가 가진 예술에 대한 견해 역시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비록 그들이 시보다는 서사적 갈래인 비극을 중요하게 언급하긴 하지만- 하이데거의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설명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아도르노의 경우 예술을 긍정과 부정의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과 부정은 일반적인 용례는 아니다. 긍정은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것으로 예술에 있는 형식을 지시한다. 모순적이게도 아도르노는 예술이란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형식을 가지되 사회적으로 부정되는 존재를 내용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은 일종의 도피처다. 부정을 다루기 위해 용인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의 경우 예술의 본래 역할은 자연을 비롯한 억압된 것을 드러내는 일이며, 이 드러냄은 언어를 되찾아줌으로써 성취된다. 다만 둘이 가진 예술에 대한 견해는 아마 거의 엇비슷할 것으로 예상된다.
피상적으로 볼 때 아도르노의 주장보다는 호르크하이머의 주장이 하이데거의 것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예술이 과학적 사고방식에 저항하여 억눌린 존재자를 드러내는데 그 역할이 있다는 사고는 하이데거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공유하고 있다. 양자 간의 차이는 후자가 가지고 있는 음울함에 기인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의 역할에 대해서 강하게 말하면서도 그것에 내재된 힘을 그다지 신뢰 하진 않는다. 예술은 단지 도피처일 뿐이니까.
대안
전술하였던 대로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데거 모두 근대적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를 위해 인간 마저 수단화하고 착취하는 이성이 바로 근대적 정신이다. 하지만 직전의 문제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에 대해서 둘은 정반대의 견해를 취하며, 이러한 차이는 양자의 체계가 서로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게 만든다. 철학체계의 결론이란 결국 현대인에게 주는 두 철학자의 대안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하이데거는 역사가 인간에 의해 건설된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에게 인간이 바로 역사의 표현이다. 인간은 그것에게서 근본기분을 부여 받고, 이는 결국 시대정신 -하이데거가 헤겔에 대한 선호와 별개로 그의 말이 시대정신처럼 들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을 구성한다. 인간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근본기분이 바로 현대 기술문명의 토대이자 동력이다. 또 그러한 무력감 역시 오늘 날에 내재된 문제점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현대기술문명의 문제는 모든 것을 양적으로 또 수단으로 인식하고 대하게 만드는 태도에 있다. 이러한 태도는 대중들을 잠식시켰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새로운 근본기분을 통해 세상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자는 신비주의적 기획을 설계하는데, 그 설계는 반이성주의처럼도 보인다.
반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이면서도 뼛속까지 이성주의자다. 둘은 반이성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현대의 문제가 수단적 이성의 비대화에 의해 촉발하였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성의 역할을 중시한다. 마치 칸트가 이성이 바로 이성 스스로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그들은 계승하고 있다. 이성은 수단을 파악하는 능력만이 있는게 아니라 비판적 능력, 또 지향해야 할 목적을 발견하는 능력 역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목적은 자기보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을 통해 자유나 평등, 인간주의 등의 목적을 재설정하며 사회가 지닌 부조리를 파악하고 저항할 수 있다. 즉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안은 개개인이 지닌 이성의 비판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