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래시 Nov 20. 2022

10살, 재능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그것은 재능이 된다

처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순간을 기억하는가. 나의 경우, 그것은 9살 때 종이접기 모빌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종이접기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색종이를 접어 모빌을 만드는 수업시간이었다. 모두들 어려운 난이도에 애를 먹고 있었고 나 역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리저리 접어보고 돌려보며 종이를 접던 순간, 거짓말처럼 선생님의 그것과 동일한 모양이 딱 나왔다. 당시 나는 반에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오! 됐다!” 하고 큰소리로 외쳐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종이접기에 열중하고 있던 모든 반 아이들이 내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로 자기 색종이를 들이밀며 어떻게 한 것인지 계속 물어댔다. 처음 받아보는 급격한 관심에 어쩔 줄 몰랐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실은 꽤 좋았는지도 모른다.


나도 엉겹결에 완성해버린 것이라서 바로 친구들을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한명 두명의 친구들을 도와주다보니 어느새 그 방법을 터득하고는 금새 더 많은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느꼈던 희열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슨 금메달이라도 딴 것마냥 신나게 엄마아빠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잠에 들기 전에 생각했다. 나는 종이접기를 잘하는 사람이구나, 어쩌면 이것이 그토록 찾아 헤메던 나의 재능이 아닐까하고. (물론 그날 이후로는 종이접기를 할 날이 많지 않아서 어느새 잊혀져버렸지만!)





수학경시대회

한 살이 더 먹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학교도 어느정도 적응을 했고, 사춘기에 접어들기도 할 나이라서,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주변의 친구들과 나를 비교해보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재능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어머님이 미용실을 운영하셔서 매일 예쁜 머리를 하고 오며 나중에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꿈이라고 했던 친구, 춤을 잘 춰서 늘 장기자랑에 나가 일등을 하곤 했던 친구, 영어를 유창하게 잘해서 나중에 외국에 나가서 살거라고 하는 친구까지. 다른 친구들은 반짝반짝 빛나며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나만 재능이 없고 못나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나만의 관심사를 찾고 나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 늘 탐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나는 어딜가나 평균은 하는 아이였지만, 그렇다고 무엇 하나에 특출난 아이는 아니었다. 공부도, 운동도, 성격도, 외모도 모두 평범했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수학경시대회 날이었다. 이런 대회는 과학상자에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나 공부로 똘똘 무장한 빨간 뿔테안경 범생이들이나 좋아하는 대회라고 생각했고, 나는 처음부터 그 시험을 잘 볼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날은 운이 좋았는지 평소보다 문제가 수월하게 풀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30분정도 먼저 시험을 끝내고 시험지 곳곳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감독관 선생님께 혼을 나기도 했다. 혼도 나고 시험지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 시험에 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웬걸! 내가 이 시험의 만점자라더라.


어안이 벙벙했다. 노력은 1도 안했는데, 만점을 받아버리다니!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모두 놀랐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아이가 갑자기 수학경시대회 만점을 받아버렸으니, 모두 “네가 그런 아이였다고?”하는 눈빛이었다. 놀란 것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누구보다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에게 나도 몰랐던 재능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교내 수학경시대회 만점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대표하여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 출전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생전 손을 대본적 없는 두꺼운 문제집을 거의 암기하듯 끝냈고,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도 무사히 마쳤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보기좋게 예선탈락을 했고, 나의 재능찾기도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꽤나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실제 학교 성적과는 상관없이 나의 수학실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고등학교를 문과로 진학했지만, 수능에서 한문제를 틀린 96점이라는 좋은 점수로 1등급을 받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이 수학점수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국 재수를 했을 것이다…!)





육상부 스카우트

12살 때의 일이다. 당시 학교에서는 요일별로 아침 조회 과제가 있었는데, 목요일이었던 그날은 건강달리기를 해야했던 날이다. 아침부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운동장을 5바퀴나 돌아야 하기에, 그냥 빨리 돌고 들어가자는 마음으로 전속력 달리기를 했다. 세 바퀴쯤 돌고있을 때였을까, 갑자기 운동장 반대편에 있던 육상부 코치님이 나를 불러세우셨다. 아침 조회 과제를 다 끝내고 잠깐 자기 얼굴을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남은 두 바퀴를 다 돌고 나서 다시 코치님에게로 갔다. 코치님이 나에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자네, 육상부 들어올 생각 없나?


“에, 육상부요…?” 나는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선 육상부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지만, 사실은 대답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던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당시 육상부에는 세 명의 언니들이 있었는데, 이 언니들은 교내에서 아주 유명한 일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봤자 한 살 차이나는 사람들인데 뭐 그리 유난을 떨었나 싶지만, 그때까지만해도 한 학년 위의 선배라는 것은 엄청난 존재였다! 그 언니들과 같이 훈련받은 상상을 1초정도 하고는 곧바로 코치님에게 “아니요, 절대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드렸다. 코치님은 미련이 남으셨는지, 몇 번을 다시 물으셨지만, 나의 대답은 확고하게 ‘아니오’였다.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코치님은 떠나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코치님이 나에게 육상부 스카우트를 제안했던 그 이후, 나는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약 8년 동안 교내의 모든 체육대회에서 계주선수로 활동하며 확고한 “단거리 계주 에이스”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 전에는 달리기 계주선수를 자원하는 때이면, 하고 싶어도 머뭇거렸었다. 그런데 육상부 코치님이라는 믿음직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나니, 내가 꽤나 달리기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이후 열리는 모든 체육대회에서는 친구들의 추천도 받고, 나도 자원을 하며 달리기 계주선수가 되었고, 에이스들만 한다는 부족한 명수를 채우기 위한 두번 달리기도 줄 곧 나의 몫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농구부터 발야구, 축구, 심지어는 핸드볼까지 모든 구기종목에도 선수로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모든 것은 초등학교 시절 육상부 코치님의 스카우트, 그 한마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재능이란

10년도 더 지난 지금, 한창 세상과 마주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의 재능을 하나씩 발견했던 그 순간들을 돌아본다. 그때는 재능이 엄청난 것인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재능은 그렇게 유니콘 같은게 아닌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의 말 한마디, 그냥 그 말 한마디이다.


“너 종이접기를 정말 잘하는구나, 나도 도워줘”했던 친구들의 한마디, “알고보니 수학을 잘하는 아이구나. 더 큰 대회도 준비해보자”했던 선생님의 한마디, “육상부에 들어올 생각이 없니”했던 육상부 코치님의 한마디. 그 한마디가 재능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육상부를 들어오라고 했던 코치님은 사실 육상부원이 없어서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일 수 있다.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를 내보냈던 우리 담임 선생님 역시, 내가 수학 영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기회가 있으니 한번 내보내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인정의 말 한마디를 들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을 재능이라고 믿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감은 노력으로까지 이어져, 학창 시절 내내 나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매거진의 이전글 7살, 생애 첫 연극에서 정자 역할을 맡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