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STOCKINGS’ 성소수자를 위한 진보 서점 in SOHO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딱히 내세울만한 것도 없다.
사회가 보통이라고 그어놓은 길 위에서 때로는 안도하고 때로는 불안해하는 평범한 보통사람.
인생이 계절마다, 각각의 시기마다 요구하는 단계, 단계를 그저 순응하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던 등하굣길에 또는 출근길에 스치고 지나갔을 그 누군가의 늘 하나였다.
다른 길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타고난 그릇이 좁은 탓인가. 작은 탓인가.
그저 삶의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안도하며 오늘을 미루지 않았음을, 한눈을 팔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행여 있을지도 모를 다른 선택지를 찾으려 생각조차 않았다.
그냥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아기가 걸음마를 떼듯이 나도 내가 원한 것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있었다.
불평을 해도 어쩔 수 없이 다음날이면 그저 하루 더 어른이 되어있는 그런 보통의 삶.
하지만 이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삶 안에서 나는 내가 어떤 보호를 받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이렇다 할 직장도 없고 패기 넘치는 나이도 아닌 이방인으로 낯선 곳에 서 있어보고 난 후 깨달았다. ‘보통’의 안락함을.
백수가 된 후 아침이 제일 괴로웠다. 원치 않아도 저절로 떠지는 몸의 리듬 속에서 매일매일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직장에 있을 때 늘 이맘때면 늘 다가오는 한해, 다음 분기별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위해 뭐를 해야 하는지 그럴싸한 실행 안을 짜는 일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 당장 침대를 박차고 나가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늘 미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배웠지만 미처 그 안에서 배우지 못한 사실이 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살아남는 것이다. 지금 살아있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한동안 바쁘고 활기차게 힘찬 발자국 소리 가득한 출근길이 그리웠다. 다들 바삐 움직여 돌아와 주길 기다리는 또 다른 자신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가는 그 활기찬 분위기가 그리웠다. 잠깐이지만 나른했던 한낮의 시간이, 운 좋은 날은 여유 있게 퇴근해 친구, 가족과 함께했던 소소했지만 따뜻했던 저녁시간이, 분명 좋았던 순간들이 더 많았을 텐데 왜 그토록 싫었던 출근길이 그리운 건지 참 모를 일이다.
역시나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흩어지는 것은 ‘기억’ 그리고 ‘진실’ . 아마도 나의 진실된 기억은 뉴욕에 온 뒤 빠르게 증발되었나 보다.
한날, 모두들 분주히 움직이는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나도 올랐다.
밤새 꺼두었던 스위치를 on으로 키고 가득 충전된 에너지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활기찬 출근길 속으로 어색하지 않게 스며들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들 모두는 찾아갈 목적지가 있지만 나는 이제 갈 곳이 없다.
그녀들의 소리 없는 외침 ‘Blue Stockings’
그렇게 찾은 곳은 소호에 위치한 ‘Blue stockings’ 서점이었다.
‘블루 스타킹’은 과거 1750년 영국에서 여류작가 엘리자베스 몬터규(Elizabeth Montagu)를 중심으로 당시 진보적이었던 여성들의 문학모임의 하나로 그중 한 명이 파란색 스타킹을 신고 온 후부터 그 모임을 사람들은 ‘블루스타킹’ 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 게다가 글을 읽고 똑똑한 여성은 늘 오랜 과거부터 위험하게 치부되며 역사 속에서 억압과 탄압의 존재였다. 당시 사회 역시 그런 그들을 조롱과 경멸의 뜻으로 그저 학문을 좋아하고, 문학에 미친 여자로 취급하였고 과거 유럽에는 “행복하려면 블루스타킹과 결혼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그들은 위협적이고 때론 탄압받는 조롱거리로 취급받아왔다.
그 당시 의상을 상상해보면 스타킹은 긴 치맛자락 끝으로 살짝 보이는 아주 극히 일부분으로 그 컬러가 뭐든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것마저도 조롱을 받고 비웃음을 사던 시대였으니 당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성인으로서 여성들이 받았을 암묵적 탄압과 비난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다는 듯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그 숨겨진 파란색 발끝은 그녀들의 간절한 외침이자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온 마지막 몸무림이었을 테이니.
블루스타킹스 서점은 그런 시대의 조롱을 비웃듯이 당당히 그 이름으로 불리길 선택하며, 뉴욕의 한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We are a Safer Space’ BLUE STOCKINGS
이곳은 뉴욕의 대표적인 성소수자들을 위한 진보 커뮤니티 서점이다. ‘진보’, ‘성소수자’, ‘페미니즘’, ‘인종차별’, ‘환경보호’ 이 서점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누구나 알고있지만 외면하고 싶은 진실들이 담겨있다. 제법 거친 느낌의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느껴지는 부드러운 커피 향이 이곳은 안전하다고 괜찮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다. 이 곳은 공정무역 커피를 단돈1달러에 마실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호 주변에 위치한 대표적인 뉴욕 독립서점인 ‘맥널리 잭슨(McNally Jackson)’서점들과 같이 정갈하진 않지만 무엇보다 이곳은 사람이 머무는 서점이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에 오는 사람들과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지하철 통행료의 절반도 안 되는 상징적인 1달러 커피를 마시며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관심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고 또 헤어진다.
얼마 전 지인을 통해 누군가의 미국 이민에 관련한 문의를 받았다는 애기를 들었다. 젊고 유능하고 이미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는 그가 굳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려고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동안 스스로 일궈낸 모든 안락함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와야 하는 간절한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었다. 동성의 결혼을 허락하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잃었지만 남아있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이곳으로 오길 원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단 하나 얻으려 애쓰는 것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범한 보통의 삶이다.
서점의 한 벽 귀퉁이를 가득 채운 수많은 메모와 소식지, 연락처들은 이곳이 단순한 서점 이상으로 점처럼 흩어져있을 그들을 하나의 선으로 모아주는 커뮤니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들의 북 셀렉션 역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 고민을 다룬 다양한 논픽션부터 어린아이들을 위한 페미니즘 도서, 특히 ‘zine’이라 불리는 소규모 잡지 형태의 독립 출간물이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페미니즘, 그리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사랑의 모습을 알려주는 책들이다. 누군가는 너무 이르다고,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겠냐 하겠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싶지 않았을 뿐 이미 세상에는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 존재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이 책의 저자는 실업자에, 비만으로 번번이 다이어트에 실패하고(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나도 모르게 본능적인 끌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아직도 어머니와 함께 사는 이혼남이지만 코카콜라나 던킨도너츠, 타코벨 등에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로 도와주겠다며 다소 뻔뻔한(?) 메일을 보내고 대부분의 많은 대기업들로부터 ‘대단히 고맙지만....’으로 시작되는 거절의 답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트 넘치게 책으로 엮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책의 추천사로 ‘내 아들이 썼지만 가히 놀랍다. 이 책이 많이 팔려 아들이 어서 새집으로 이사하길 바란다.’라고 썼다(잠깐이지만 이 작가의 뻔뻔함은 어머니로부터 유전된건가..생각했다). 부디 어머님의 이 유쾌한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샀다.
희망을 품은 모두 ‘보통의 삶’을 위해
누군가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또 누군가는 다수의 선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보통’의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단순히 우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해 온 진실이 세상 한편에서는 모든 것을 건 삶의 모험이 되기도 한다. 이토록 소수와 다수 , 승자와 패자로 나눠지는 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신기루 같은 ‘희망’을 끊임없이 찾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로를 선택한 이름 모를 그 커플이 꼭 이곳에서 손을 잡고 1달러짜리 커피를 함께 마실수 있길.
함께 이곳에서 꿈꾸던 보통의 삶을 그려보길.
희망을 찾아 떠나는 사람 모두가 어느 곳에서든 행복하길.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Bluestockings
172 Allen St, New York, NY 1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