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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 Eun Cho Apr 14. 2020

때를 따라

달라질 준비를 합시다

예전에 군사시설로 사용되었던 벙커가 지금 복합 예술 공간으로 변신한 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장소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사용 목적이 달라진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 근교에 드라이브를 나가보면 운영하지 않는 공장, 창고를 개조한 카페들이 많다. 시내에서는 보기 힘든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 같고, 카페 내부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함께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자주 찾게 되었다.


창고형 카페와 빛의 벙커처럼 '원래 장소의 외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 지금의 콘텐츠로 채워 넣는 것'을 보면서, 사람도 마찬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어떤 일, 어떤 사람에게 굉장한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일과 사람에 흥미가 있다는 걸 종종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참 변화무쌍한 존재인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대학 때 전공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한 듯이 전공을 따라 첫 직장을 시작했다. 학과 공부를 했을 때는 이 전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실무에 있을 때도 적성에 어느 정도 맞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점점 나는 그때의 일보다 여행업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일정을 조율하고 호텔을 수배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여행 기획의 매력에 빠졌던 것이다. 내가 여행업에 두는 마음과 생각의 비중이 그때 했었던 일보다 더 앞서있을 때쯤 퇴근 후에 학원을 다니며 계속해서 내가 여행업을 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결국, 여행업을 선택했고 그때의 일을 내려놓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여행사에서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또 몇 년 뒤쯤에 지금의 일을 하고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에서든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깥과 완벽히 차단된 벙커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빛과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극도의 몰입을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벙커를 나오니 며칠간 깊은 지하 동굴에 있다가 빠져나와 오랜만에 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화면으로 보는 풍경화도 멋있었지만, 벙커 주변의 조성된 숲과 정원의 풍경도 환상적이었다.


커피박물관 바움의 전경


커피박물관 바움,

빛의 벙커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박물관 겸 카페이다.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덩달아 방문하게 되는 곳 같은 기분이 들지만, 사실 벙커는 2018년에 개장했고 커피박물관은 그보다 4년 먼저 개관했다. 1층에는 전시실, 2층에는 라운지가 있다. 박물관 입장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한데, 첫째는 라운지에서 음료를 구입하면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천 원의 박물관 입장료만 지불하는 것이다. 나는 박물관만 잠깐 구경하기로 하고, 입장료만 내고 관람을 하였다.


커피박물관 바움


커피의 박물관답게 커피의 첫 발견과 연대기, 커피의 원산지와 다양한 맛 소개, 커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설명보다 좋았던 건 실제로 쓰였던 커피 추출기구와 찻잔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모아 온 걸까? 특히 커피잔들 중에는 몇몇 사연이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1870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살았던 한 어머니가 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미니어처 티 세트였다. 딸에게 작고 귀여운 찻잔을 선물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편지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항상 예쁜 접시와 그릇, 찻잔을 보거나 살 때마다 내게 말하셨던 게 생각났다.

"이거, 너 시집갈 때 줄게."

어머니는 예쁜 살림을 보면 본인이 쓰기보다 더 먼저 나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딸이 자신보다 더 예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렇다고 하신다. 그런 귀한 마음을 받은 내가 지금보다 더 예쁘게, 아름답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으로 커피머신이나 드립 커피 정도만 익히 알고 있었는데, 체즈베, 사이폰, 에어로프레스 등 각국의 다양한 커피 추출 방식과 기기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양한 추출 방식으로 현장에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어 졌다. 어디에 있을까?


"커피하우스가 영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했고, 살롱이 프랑스 혁명사상의 씨앗이 되었으며, 카페가 이탈리아에서 인본주의를 꽃피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제주커피박물관 바움은 제주라는 토양 위에서 한국적 커피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주라는 치유의 땅 안에서 치열한 삶을 위로하고 다시 일으키는 한 잔의 커피, 숲과 오름으로 둘러싸인 작은 제주, 바움이 만들어가는 진정한 커피의 꿈입니다."  - 커피박물관 바움의 소개글 중에서 -


'제주라는 치유의 땅에서 치열한 삶을 위로하고 다시 일으키는 한 잔의 커피'를 만들고 싶다는 커피박물관의 꿈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치열한 삶을 위로하고 다시 일으키는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치유의 땅 제주


'치유의 땅 제주'라는 말이 이렇게나 와 닿을 수 있을까? 섭지코지 근처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바라본 제주의 모습이다. 전시를 다녀온 후에 바라본 제주의 자연은 유난히 더 나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것 같았다.


가시아방


가시아방,

제주도의 향토 음식인 고기 국수 전문점 중에 Top 3 안에 드는 식당이다. 유명 방송에도 나오고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라 평소 웨이팅을 심하게 한다고 하던데, 나는 점심때를 살짝 지나서 여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메뉴는 고기국수와 돔베고기 등 심플하게 마련되어 있다. 몇 가지 메뉴로도 충분한 식당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이 고기국수를 주문했다.


가시아방의 고기국수


설렁탕과 잔치국수를 합쳐놓은 것 같은 비주얼이다. 국수 위에 올려져 있는 고기의 양이 많아서 한 젓가락에 고기 한 점씩 올려서 먹어도 충분했다. 국물은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은 맛이고 반찬들하고 같이 먹으면 간이 저절로 맞아지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바람을 많이 맞았었는데, 뜨끈한 국물에 움츠려 든 몸이 풀린다. 이 국수에 대해 표현하자면, 화려하지 않지만 친근한 정이 있는 음식 같다.  


맛있게 국수를 먹고 나와서, 서귀포시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동안 숙소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올라갔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아래로 내려가 보는 것 같다. 이제 거의 제주도 동쪽을 일주한 셈이다. 버스를 타고 30분이 지나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마을에 있는 빨간 지붕의 집이다.


서귀피안 세컨드룸 외부


서귀피안 세컨드룸,

간판이 없었더라면 카페가 아니라 어느 가정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릴 적 집을 한 번 그려보라고 하면 늘 그렸던 '내 상상 속의 빨간 지붕 집'의 모습이었다.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높은 천장과 따뜻한 색깔의 조명과 가구들로 꾸며져 있는 모습이 정말로 예쁜 집에 놀러 온 기분이다.


서귀피안 세컨드룸 내부


이 예쁜 집에서는 앉고 싶은 대로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도 되고, 바닥에 안방 다리로 앉아도 되고, 또 소파에 폭 기대어 앉아도 된다. 내게 모두 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햇살이 드는 제일 큰 창가 앞에 앉아 보기로 했다. 동네가 조용하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잔잔한 노래가 깔리고 눈 앞에 보이는 건 하늘과 들판뿐인 아늑한 곳에서 나는 사색했다.


서귀피안 세컨드룸의 크림라떼


아인 슈페너 같은 느낌의 서귀피안 세컨드룸의 크림라떼는 달콤한 크림과 커피의 풍미가 잘 어울렸다. 크림을 입에 한 입 머금었을 때, 오는 그 달달함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천천히, 오-래, 이 크림 라떼를 음미했다. 그동안 머물렀던 카페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어떠한 소음도 없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평화로운 이곳이 좋았다. 오롯이 내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저녁에 이르자 한적했던 카페에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아쉽지만 빨간 지붕 집을 떠나서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간다. 오늘의 저녁도 숙소 안에 있는 식당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폼포코 식당,

낮에는 분식, 밤에는 선술집인 변화무쌍한 식당이다. 이 식당의 특징은 손님들이 바 테이블에만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뒤에 식탁 테이블이 있었는데,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심지어 단체 손님들도 예외 없이 바 테이블에 앉았다. 덕분에 주방에서 셰프들이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구경도 하고, 혼자 온 게 민망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혀 앉을 수 있었다. 바 테이블에는 귀여운 장난감들이 한 데 모여져 있었고, 오픈된 주방의 모습은 무척 깔끔했다.


가카아게 모찌동을 시켜보았다. 쫄깃한 떡볶이와 바삭한 야채튀김의 만남이라는 데, 맛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 같았다. 내 눈 앞에서 음식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접시 위를 가득 채운 튀김의 양 때문에,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나 혼자 다 먹을 수 있을까?' 고민될 만큼 많았다. 튀김을 젓가락으로 조금씩 잘라서 꼭꼭 씹어 먹었다. 국수처럼 기다란 떡볶이도 후루룩 먹으면서, 튀김을 묻혀 먹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 못 먹을 줄 알고 지레 겁먹은 건 김칫국 마시는 일이었다. 남김없이 다 먹었다. 맛있는 건 역시 남길 수 없는 법이다.


폼포코 식당의 가카아게 모찌동


밤 산책을 해야겠다. 너무 많이 먹었고, 이대로 잘 수는 없을 거 같아서 무작정 숙소 근처를 걸었다. 제주의 밤하늘을 보며 밤바다의 소리를 듣는다. 소곤소곤 속삭이는 듯한 잔잔한 소리가 '오늘 하루 잘 보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들과 나의 일에 대해서 찬찬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깊은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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