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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 Dec 06. 2020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커피 마신 이야기 (2018.5)

인스타그램 @vagoperoinolvidable 에서 연재

http://www.instagram.com/vagoperoinolvidable



1


나는 비행기를 좋아한다. 비행기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다 좋아하지만 타는 걸 정말 좋아한다. 빠른 속도로 달려 갑자기 기체가 붕 떠오르는 그 순간부터, 천천히 하강해 땅에 쾅 내려앉는 순간까지 모든 시간을 좋아한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롤러코스터도 못 타면서, 만 피트를 넘나들면서 터뷸런스에 묶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행복해하는 건 역시 하늘을 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하늘이 날고 싶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12시간 그리고 더해서 3시간 반의 길고 긴 비행을 하고 말라가에 자리 잡은 지 채 한 달도 안 된 때였다. 집 가까이에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공항과 마주 보고 있는 대형 쇼핑 단지가 있는데, 친구들과 그 곳에 들러 식사하고 쇼핑하는 반나절 동안 비행기가 나의 시각과 청각을 수시로 자극했던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말라가 공항 웹사이트에 들어가 저 비행기는 어느 항공사의 것이고 어떤 공항을 떠나서 지금 막 말라가에 도착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 마음이 점점 커졌다.


말라가에 가기 전에 살던 광진구는 김포든 인천이든 공항과는 한참 떨어져 있어 비행기의 소리도 모습도 볼 일이 없었고 그래서 이번처럼 갑작스럽게 비행기가 타고 싶어졌다며 이리저리 굴러다닌 적은 없었다. 삶이 팍팍해 도피를 위해 '아, 여행 가고 싶다.'하는 생각은 수시로 들었어도 비행기 타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장 비행기를 타야겠다. 떠나왔지만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스카이스캐너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능. 탐색. 출발지 공항을 선택하고 목적지를 Everywhere로 설정하면 국가별로, 도시별로, 날짜별로, 기간별로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리스트업 해준다. 집 앞 마트에서 6개들이 세트로 산 에스떼야(Estella) 맥주를 괜히 와인잔에 따라 놓고, 거실 쇼파에 반쯤 눕듯 앉아서는 엄지를 휘릭 휘릭 놀려 본다. 출발 공항을 말라가 코스타 델 솔 공항으로 설정하고 에브리웨어 검색을 돌리자마자 수많은 국가들이 쭈루루룩 뜬다.


스페인 탭을 먼저 눌렀다. 마드리드가 왕복 3만 7천 원. 전에 하루 있어 봤는데 별로 볼 게 없었고.. 바르셀로나가 왕복 4만 원. 뭐, 스페인에 앞으로 한달 반은 더 있을 텐데, 그 안에 언젠간 가겠지. (안 갔다.) 마요르카가 왕복 6만 원이네. 근데 여기 좀 클럽 이런 것만 있지 않나? 테네리페 섬이 왕복 8만 원? 예쁠 거 같긴 한데.. 지금 여기 가면 나영석 따라하는 것 같잖아. (윤식당 2가 종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다른 나라를 좀 볼까. 런던이 왕복 5만 원. 근데 여긴 물가 비싸고.. 오슬로가 왕복 6만 원? 근데 도미토리가 1박에 6만 원이네. 미쳤구나. 로마도 왕복 5만 원인데. 에이, 이탈리아는 나이 좀 먹고 패키지로 와도 되잖아. 더블린도 7만 원밖에 안 하네. 브뤼셀도 엄청 싸! 뒤셀도르프도! 크라쿠프도!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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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에어와 이지젯이라는 멋지고 극악한 항공사들 덕분에 유럽은 곳곳의 도시들이 촘촘하고 저렴하게 연결되어 있다. 휴양 도시라서 그런가, 스페인에서 규모로는 5번째 안에 겨우 드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말라가 공항에서 취항하는 목적지들이 기대보다 많았다. 프랑스로 치면 니스 같은 느낌이려나. 우리나라도 휴양지인 제주도는 사천이나 양양, 군산처럼 광역시급이 아닌 도시에서도 취항하는 것처럼.


말라가 공항의 취항지들 중에는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같은 유럽의 대표적인 대도시들 외에도 쉽게 접하기 어려운, 그러니까 한국에서 직항으로 들어갈 수 없는 도시들이 많다. 위에서 말한 오슬로나 더블린, 그리고 모로코의 도시들이나, 시칠리아 섬, 몰타, 아프리카 북부 스페인령인 멜리야도 있었고, 부쿠레슈티나 소피아 같은 동구권의 도시들도 연결되어 있었다.


은근히 지리를 좋아하는 나에게, 조금은 생소한 도시들의 이름이 쏟아지는 것은 그 자체로 설렘이었다.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꿨던 도시들, 혹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도시들에 10만 원도 안 되는 항공권으로 갈 수 있다니!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처럼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딱 잘라 세워 둔 나만의 여행 공식이 있다. 이왕 여행을 떠날 거라면, 왠만해선 가기 어려운 곳을 먼저 가자는 것이 대원칙이다. 좀 더 상세히 이 공식을 뜯어 보면, 젊을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는 곳을 먼저 가고 나이 든 후에도 행복할 수 있는 곳은 갈 수 있어도 조금은 미뤄 두자는 게 그 골자인데, 결국 나이 어릴 때 물가 싸고 비행기 오래 타고 경유 많이 하고 도착해서도 개고생 하는 곳을 주로 가겠다는 소리다. 돈 없으면 서러운 물가 비싼 나라들은 직장 잡고 가고, 직항 뚫려 있는 나라들은 늙어서 비즈니스 타고 가며, 액티비티보다 도보관광이나 문화재, 박물관이 많은 곳은 나이 먹고 패키지 여행으로 따라가야겠다는 매우 현실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공식이다.


이 공식에 따라 최종 목적지로 결정된 도시는 한국 직항 없고, 물가 싸고, 왠지 모르게 구소련의 향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불가리아의 소피아였다. 왕복 8만원에, 수화물 없음. 동유럽의 라이언에어라는 WIZZ air를 타고, 당장 이틀 뒤 출발. 말라가에서 오후 10시에 출발해 소피아 공항에 새벽 3시에 떨어지는, 듣기만 해도 피곤한 탑승권을 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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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 집에 살던 하우스메이트 4명 중 나와 H가 소피아로 떠나게 되었다. H가 물었다. 야, 야, 우리 계획 안 세워도 되나? 항공권이랑 숙소 예약하구, 여권이랑 돈만 있으면 나머진 도착해서 어떻게든 돼. 그럼 숙소부터 얼른 예약하자. 소피아의 거의 유일한 랜드마크인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이 보인다는 모던한 스튜디오를 숙소로 잡았다. 진짜 넵스키뷰인지는 도착해서 봐야겠지만. 그렇게 한 시름 덜어놓고, 약 40시간 후 도착할 소피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네이버 블로그를 뒤적거리는데, 목 뒤에서 뒤통수 쪽으로 옅은 소름이 쓰윽 올라오면서, 애매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H와 나는 그 두려움의 원인이 새벽 3시에 도착하는 항공편에 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숙소 체크인은 오후 2시. 이마저도 3시이던 것을 제발 얼리 체크인 해 줄 수 없냐며 부탁한 결과였다. 그럼, 새벽 3시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 밟고, 환전 하고, 심지어 비행기가 조금 지연된다는 시나리오를 멋대로 짠 다음 소피아 메트로 첫 차 시간이 오전 5시라는 것을 알아보고 첫 차 시간에 맞추기에 완벽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내 나가면 뭐라도 할 만한 게 있겠지. 그럼 체크인 시간까지 거의 10시간은 돌아다닐 수 있잖아! 거의 하루를 번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꽉 채운 3박 4일 여행은 처음 가보는 것 같은데?


멋진 숙소 예약했고, 환전은 공항에서 하면 된대고, 스페인에서 쓰고 있는 유심이 불가리아에서도 사용 가능하단다. 물가도 엄청 싸서 굳이 예산을 세워가면서 경비 계획 할 필요도 없고, 소피아 시내가 엄청 조그만데다가 트램이나 메트로도 잘 되어 있어서 여행 계획도 그날 그날 세우기로 했다. 불가리아어는 할 줄 몰라서, 3박 4일 지낼 동안 사용할 단어들을 몇 개 외웠다. 안녕하세요. 네. 아니오. 좋아요. 주세요. 영어 할 줄 아세요? 화장실이 어디에요? 얼마에요? 비싸다. 살게요. 계산서 주세요. 맥주. 소고기. 지하철. 시장. 우리는 친구. 건배. 이제 준비는 끝났다.


아주 수월하게,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문제는 수면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말라가에 도착하고 매일매일 100% 그 이상의 한량 일상을 보내던 우리들의 바이오리듬은 일반인들과는 반대로 돌아가고 있은 지 오래였다. 불면증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밤낮이 제대로 바뀌어 있었다. 낮에는 더우니까 자고, 밤에는 맥주에 살라미 썰어 먹으면서 영화 봤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소피아에서 벌어들일 첫 날의 시간은 보통 날이었다면 자고 있었을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 버틸 수 있어? 나와 H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괜찮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직업 상 밥먹듯 밤을 새는 H나, 학교 다니면서 과제 하느라 밤 자주 새는 나나, 잠 좀 덜 자는 건 예삿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은 죽어서 자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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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기서 해외여행 가니까 진짜 여기 사는 거 같다. 우리 여기 사는 거 맞는데? 아니 야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대화를 하면서 H와 나는 세르까니아스(경의중앙선 같은 말라가의 교외전철)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너무 설렌 나머지 출국 시간보다 한참 앞서 가버려서, 온갖 공항 식음료를 조져 놓고 주전부리도 사먹고 공항 이곳 저곳도 들쑤시며 구경한 다음 슬슬 지쳐서 무료해질 즈음 탑승 게이트가 열렸다. 기내 수화물 규정이 빡세다길래 엄청 걱정했는데 우리보다 훨씬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줄을 선 불가리아 현지인들을 보면서 안심했다.


아주 약간의 지연도 없이 새벽 3시 경 소피아 공항에 정확하게 우리를 내려 준 Wizz air. 불가리아는 유럽에 있지만 비쉥겐 국가여서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한밤중에 착륙한 사람들을 위해 하기 싫은 출근을 꾸역꾸역 했다는 듯한 표정의 심사관들. 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괜히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W6 4412편의 단 둘뿐인 동양인이었던 나와 H를 위아래로 스캔한 심사관은 며칠 있느냐, 왜 왔냐는 형식적인 질문을 끝내고 입국도장을 쾅 찍어 줬다.


상봉 버스터미널만한 소피아 공항의 로비로 나온 우리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일단 깜깜해도 너무 깜깜한 바깥의 하늘과, 추욱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 쉽사리 읽히지 않는 키릴 문자들과 힐끗힐끗 우리를 쳐다 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몇 시간 전까지 갖고 있었던 설렘은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두려움만이 주변을 휘감았다. 심지어 유럽 전역에서 데이터 사용이 가능하다던 심카드가 먹통이었다. 소피아 공항에서는 와이파이도 안 잡혔다. 눈 앞이 새벽 3시의 밤하늘보다 깜깜해졌다.


불가리아에 대한 첫인상을 더욱 안좋게 만든 건 공항 환전소 직원의 태도였다. 돈을 바꾸면서 혹시 이곳에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곳이 있냐 물었다. 인터넷? 와이파이? 구글? IT시대의 어휘들을 여러 개 말해 보았으나 환전소 직원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더니, 이내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면서 바꾼 돈을 던지듯 건넸다.


나와 H는 로비 밖으로 나와 공항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궁시렁거렸다. 여기 사람들 원래 이런 거냐. 말을 너무 무섭게 하는데 이게 인종차별인 건지 아니면 원래 이 나라 사람들 말투인건지 모르겠다. 이 여행 잘 굴러갈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메트로 첫 차 시간이 가까웠다. 슬슬 동이 터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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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지하철 표 끊는 것 쯤이야 이제 도사지. 버스나 트램에 비하면 지하철은 완전히 포리너-프렌들리 한 대중교통이라구! 큰 어려움 없이 티켓 자판기 화면을 몇 번 두드려 소피아 메트로 티켓을 두 장 뽑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분명히 티켓이 있고, 눈 앞에 게이트가 있는데, 티켓을 어떻게 사용해야 게이트가 열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티켓을 넣을만한 구멍이 안 보였다. 뉴욕 메트로카드처럼 샥 긁는 건가? 종이 티켓이지만 혹시나 NFC 기능이 있을까봐 게이트 여기저기에 대 보기도 했다.


게이트 앞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을 본 걸까. 어떤 중년 소피아 여성분이 말없이 우리 손에서 티켓을 낚아채서 바코드 부분을 게이트 스캐너에 띡 찍어 주고는, 또 말없이 본인 표를 스캔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바디 랭귀지였다.


메트로를 타고 시내에 도착하니 다행히 데이터가 터지기 시작했다. 구글 맵을 켜서 무작정 숙소 쪽으로 향했는데, 체크인 시간이 되려면 택도 없었다. 나름 랜드마크라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성당을 원형으로 빙글빙글 돌며 구경했다. 와, 진짜 멋있다 이거. 들어가 볼 수 있나? 입장료는 없는데 안에서 사진 찍으면 돈 내야 된다던데. 에이, 그럼 들어가지 말자.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사진 찍으면 돈을 내라니. 왠지 괘씸하잖아.


대성당 주변 거리를 걸어다니며 소피아 시내의 아침을 만끽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자고 있거나 이제 살살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산책한다는 건 언제나 상쾌하고 기분 좋다. 다만 태생적인 게으름 때문에 이번 여행처럼 밤을 새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쉽지만.


H와 나는 골목 골목을 걸어다녔다. 키릴 문자로 쓰여 있는 표지판 사진을 찍으면서 외국 글자의 이국적임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가 찍은 사진도 결국 '주차금지'나 '멈춤' 같은 의미일텐데, 웃기지 않느냐. 이게 뭐라고. 그런데 외국인들도 방산시장이나 을지로에서 '오프셋 인쇄' '스카시' '퀵 · 용달' 글자 앞에서 사진 찍잖아. 걔들한테 그게 얼마나 이국적이고 새로운 것이겠냐며. 걔들도 인스타그램에 경복궁보다 용달 간판 올리고 싶을걸.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카페를 보고선 좀 이따 낮에 저기 가 보자고도 했다. 저 카페의 커피는 어떤 향과 맛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했다. 아직 열지 않은 소품샵도 창에 매달려 어둑한 내부를 구경하면서 헐, 내일 저거 사야지! 저거 되게 귀엽다. 하고 구경했다. 영업 시간에 직접 들어가 보는 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시간이 멈춘 곳에 우리만 돌아다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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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졸리네. 아니, 많이 졸리네. 끊임없이 쩍쩍 하품을 하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을 때쯤 내가 말했다. 대충 7시나 8시 즈음 되었던 것 같다. 밤을 샌 데다가 아침부터 시내 곳곳을 걸어다녔으니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소피아의 카페들은 대부분 9시나 10시부터 문을 열어서 어딘가에 들어가 쉬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H와 나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 가서 아무 벤치에나 앉아서 쉬기로 했다.


공원에는 아침이지만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떤 사람은 커다란 대형견과 원반 던지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작은 강아지 세 마리를 각각 목줄에 묶어서 한 손으로 잡고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기도 했다. 어느 공원에나 있다는 비둘기 밥 주는 아저씨는 소피아 공원에서도 비둘기 수십마리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소피아 비둘기들은 아저씨가 공원 바닥에 뿌리는 무언가를 공격적으로 쪼아 먹었다. 저렇게 열심히 먹어주면 밥 줄 맛 나겠는데 싶었다…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따스한 5월에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과 동물 구경이라니. 비몽사몽한 정신 덕에 환상 같았다. 이대로라면 앉아서 잘 수 있겠어…하고 까딱 잠이 드려는데 비둘기 밥 주는 아저씨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뿌려주던 비둘기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서는 휘적휘적 걸어나가는데, 공원에 있던 비둘기들이 퍼드덕 퍼드덕 날면서 새우깡 받아먹는 갈매기마냥 아저씨 손바닥을 돌아가면서 한번씩 쪼았다. 아저씨는 그렇게 날아드는 비둘기 수십마리를 게임 캐릭터 오오라처럼 이끌고 공원 산책로를 주욱 지나갔다.


나와 H는 쏟아지는 잠도 잊고 그 아저씨를 비둘기 마스터라고 부르면서 계속 쳐다봤다. 혹시 저 비둘기들이 아저씨가 키우는 애들은 아니겠지? 집에서 데려왔다거나? 비둘기가 저렇게 훈련이 된다고? 그럼 이제 새대가리라는 말은 쓰면 안되겠는데. 준비된 비둘기밥을 다 준 건지, 흥미가 떨어진 건지 어느새 비둘기 마스터는 사라지고, 그를 쫓던 비둘기들만이 공원에 남아서 산책 중인 개들을 피해다녔다. 별 사람 다 본다. 헛웃음을 지었다.



7


야 이제 도저히 안되겠다. 커피 마시자. 안그러면 나 곧 기절해. 공원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때운 우리 둘은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시내 쪽으로 향했다. 시내라고 하기엔 소피아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그래봤자 한 일이십 분 정도 걸었다. 여전히 대다수의 레스토랑이나 가게들은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어느 골목에 cafe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간판을 발견하고 냅다 들어갔다. 테이블이 아마 4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작은 카페 내부는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다양한 색상들이 뒤섞여서 조금 괴상하면서도 주술적인 분위기를 내는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다.


헬로우~하고 인사를 하며 들어갔지만 카페 주인이 없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수십 초 정도 후에 할머니라고 하기엔 젊지만 그렇다고 중년이라고 하기엔 장년보다는 노년에 가까운 주인장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불가리아어로 뭐라고 뭐라고 하시는데 못 알아들었고, 메뉴..? 메뉴..??!!하면서 손으로 커다란 네모를 그려 보아도 미소 띈 얼굴로 바라보실 뿐이었다. 어쩌지? 그냥 커피 달라고 하자. 뭐라도 주시겠지.


'우리는 커피를 두 잔 주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손짓 발짓 써보려 했지만 커피를 어떻게 손짓이나 발짓으로 표현해야 될 지 모르겠어서 그냥 이런 저런 발음으로 커피라고 말했다. 커피. 커피? 커피..? 커피!! 아메리카노? 커.피. 커퓌~ 컾희?!라고 여러 번 말했더니 드디어 주인 분이 알아들으셨다! "아! 커피! Da, da da.(네, 네. 네.)" 라고 하시곤 다시 안으로 들어가셨다.


주문이 제대로 된 거 맞나? 완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쫙 원샷하고 싶다. 뇌까리가 찌릿빠릿 해지는 그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거의 5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슬슬 주문이 들어간 게 맞긴 하나 싶을 때쯤 카페 주인장이 가지고 나온 것은, 아주 작은 커피잔 두 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작은 녀석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우리는 일단 인자한 미소의 주인장께 땡큐, 하고는 잔을 바라봤다.


너 에스프레소 마실 줄 알아? 어, 난 마시긴 해. 나는 이따금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가득 풀어 마시지만, H는 에스프레소를 몇 번 안 마셔봤다고 했다. 하지만 카페인에 굶주렸던 H는 아무튼 마셔야겠다는 결심을 한 듯 했다. 결의에 찬 눈빛을 하고 잔을 들어 한 모금 커피를 마신 H는 순간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야, 이거 진짜 대박인데. 진짜 맛있어.


별 기대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맛있다고? 나도 얼른 커피를 호록 마셨다. 정말 눈물나게 맛있는 커피였다. 아예 에스프레소는 아니었고, 에스프레소 마키아또에 가까운, 그런데 우유 비린내가 난다거나 혹은 거품이 너무 많아 가벼운 맛이 난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고, 아주 맛있는 에스프레소에 고소한 맛을 극대화한 스팀밀크를 황금 비율로 섞은 최고의 커피였다. 정신이 확 들었다.


얼만지도 모르고 아무 커피 달라 해서 먹었지만 계산이 두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바가지를 씌우더라도 이만큼의 효용이라면 여행자의 환심으로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다는 기분이었다. 다 마신 후 주인분께 얼마냐고 물어보자, 말이 안 통했단 걸 생각하시곤 후다닥 종이를 가져와 2라고 적어 보여주셨다. 2레바요? 우리 돈으로 한 잔에 천 원 정도였다. 말도 안 돼.


그러고서 우리는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들어와 짐도 풀지 못하고 기절했다. 늦은 오후에 일어나선 넵스키뷰라더니 까치발을 들어야 성당 돔 끄트머리가 겨우 보이는 숙소 창문을 보면서, 낮에 마신 커피에 대해 얘기했다. 말라가 돌아가기 전에 꼭 다시 먹자고. 그런데 갔던 길을 세 번 네 번씩 다시 걸어갈 만큼 좁은 소피아 시내에서 그 날 저녁도, 그 다음 날도, 출국 전날인 세 번째 날마저도 그 카페가 어디에 있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나와 H는 거의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 날의 커피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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