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2
수업을 돌아보면 2학년에게 여러 과제를 시키는 것 같다. 9시부터 2시까지 수업하니, 마냥 놀 수만도 없고 교사가 전달하는 강의식 수업만 할 수 없으니 주제에 맞는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통합교과서(바른생활+즐거운 생활+슬기로운 생활)를 펼쳐보면 교과서를 펼치고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준비는 모두 교사의 몫이다. 교과서에 제시된 활동은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추가적으로 구상해야 할 부분도 있고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도 있다. 교사가 상황과 자신의 수업 스타일에 맞게 바꿀 수 있다. 가장 손쉽게 대체할 수 있는 활동은 그리기이다. 색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거기에 도안을 그려서 나눠 주기도 한다. 빈 종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교사의 아이디어와 학생의 아이디어가 만나면 훌륭한 작품이 종종 탄생하기도 한다. 수업 꿀팁이나 수업 아이디어가 다양하고 폭넓게 있어야 하는데 앉아서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답답하기도 하다. 다행히 동학년 선생님들이 메신저로 꿀팁과 아이디어를 공유해주어 풍요로운 수업이 완성된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아홉 살 마음 사전>이라는 책이 있다. 감정과 관련된 단어를 주고 그에 맞는 상황을 설명과 그림으로 서술한 사전이다. 책에 나온 감정 단어를 모두 추려내서 알려주고 자유로 2개만 선택하고 교과서에 나온 단어 몇 개를 뽑아 나만의 <아홉 살 마음 사전>을 만드는 과제를 제시했다. 이것도 선생님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과제이다. 빈 종이로 아이디어를 글로 쳐서 프린트하고 만들어낸 수업 자료이다. 수업 전 날 양면 모아 찍기를 해서 여러 장의 종이를 반으로 접어 스테이플러로 찍은 뒤 소책자로 만들었다. 25권의 책을 만들어 놓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의 성향은 가지각색이다. 빈 종이에 대충 선 하나만 긋고 끝나는 아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는 아이 (그려도 돼요? 잘라도 돼요? 붙여도 돼요?) , 틀릴까 봐 덜덜 떠느라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 자신 있게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아이. 체감상으로 틀릴까 봐 혹은 자신이 없어서 물어보고 진행하는 아이가 절반 이상은 된다. 아이들도 나만의 <아홉 살 마음 사전>을 만들 생각에 살짝 들떴나 보다.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네임펜부터 든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10분 남짓 지나지 않아 A는 “아 망했어요. 새 책 주세요.”라고 했다. 수업 전 날 양면 프린트를 하고 일일이 종이를 스테이플러로 찍어 낸 나의 고생은 몇 초만에 새 거로 바꿔달라는 요구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한 명의 책을 바꿔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A에게 바로 바꿔주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망친 것을 수정할 방법은 없을까? 사실 A는 무엇이 잘 안 되면 종이를 다 구겨버리거나 갈기갈기 찢는 아이였다. 부모님과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화를 푸는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를 하셨다. A가 종이를 또 찢어버릴까 봐 걱정도 되었다. A가 종이를 새로 받고 싶은 이유를 알기 위해 어느 부분이 망쳤는지 물어보았다. 네임펜으로 써서 이 부분을 바꾸고 싶은데, 책으로 만들어졌으니 종이로 대체할 수 없고 아예 다른 책을 달라는 것이었다. “아, 정말 바꾸고 싶겠다. 그런데 이 책은 만들려면 오래 걸려. 한 글자를 틀렸는데 전체를 바꾸는 건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밑줄을 쫙 긋고 써볼까?”라고 했더니 A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때 마침 생각난 것이 수정 테이프였다. A에게 수정테이프로 한 부분을 지워주었고, 다시 해보라고 돌려줬다. A를 포함한 우리 반 모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 글자를 쓰다 보면 틀릴 수가 있죠. 연필로 먼저 쓰고 잘 쓰고 싶은 부분만 네임펜으로 따라 쓰세요. 혹시 틀려서 망쳤다고 느낄 수 있죠? 걱정하지 말아요. 수정테이프로 네임펜도 지울 수 있어요.”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의 표정은 광명의 빛을 찾은 표정들이었다. 그 이후 몇 명의 아이들은 수정 테이프를 사용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아홉 살 마음 사전>은 멋지게 완성되었다. 며칠 전 국어와 통합수업을 연계해 가을 시 액자를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한 글자 틀려서 종이를 버리거나, 안 하고 싶은 마음에 과제를 포기해버렸을 아이 한 명이 나에게 종이를 들고 나와 말했다.
“선생님 이 부분 화이트로 지워 주세요.”
아, 틀려도 포기하지 않고 지우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끝까지 과제를 해내려고 하는구나! 하며 감동했다. 수정 테이프가 너무 고마웠다. 사실 빈 종이는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존재다. 아차 하는 순간에 빗나가버린 선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림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려도 괜찮다, 지울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안심될까? 아이들에게 틀려도 괜찮다, 지울 수 있다, 하얀 선으로 덮어버린 위에 다시 쓰면 된다,라고 토닥여주는 말과 도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하루였다. 우리 교실과 아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수정 테이프의 존재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