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실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enish Oct 22. 2022

화이트

22.10.22

 수업을 돌아보면 2학년에게 여러 과제를 시키는 것 같다. 9시부터 2시까지 수업하니, 마냥 놀 수만도 없고 교사가 전달하는 강의식 수업만 할 수 없으니 주제에 맞는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통합교과서(바른생활+즐거운 생활+슬기로운 생활)를 펼쳐보면 교과서를 펼치고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준비는 모두 교사의 몫이다. 교과서에 제시된 활동은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추가적으로 구상해야 할 부분도 있고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도 있다. 교사가 상황과 자신의 수업 스타일에 맞게 바꿀 수 있다. 가장 손쉽게 대체할 수 있는 활동은 그리기이다. 색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거기에 도안을 그려서 나눠 주기도 한다. 빈 종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교사의 아이디어와 학생의 아이디어가 만나면 훌륭한 작품이 종종 탄생하기도 한다. 수업 꿀팁이나 수업 아이디어가 다양하고 폭넓게 있어야 하는데 앉아서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답답하기도 하다. 다행히 동학년 선생님들이 메신저로 꿀팁과 아이디어를 공유해주어 풍요로운 수업이 완성된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아홉 살 마음 사전>이라는 책이 있다. 감정과 관련된 단어를 주고 그에 맞는 상황을 설명과 그림으로 서술한 사전이다. 책에 나온 감정 단어를 모두 추려내서 알려주고 자유로 2개만 선택하고 교과서에 나온 단어 몇 개를 뽑아 나만의 <아홉 살 마음 사전>을 만드는 과제를 제시했다. 이것도 선생님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과제이다. 빈 종이로 아이디어를 글로 쳐서 프린트하고 만들어낸 수업 자료이다. 수업 전 날 양면 모아 찍기를 해서 여러 장의 종이를 반으로 접어 스테이플러로 찍은 뒤 소책자로 만들었다. 25권의 책을 만들어 놓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의 성향은 가지각색이다. 빈 종이에 대충 선 하나만 긋고 끝나는 아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는 아이 (그려도 돼요? 잘라도 돼요? 붙여도 돼요?) , 틀릴까 봐 덜덜 떠느라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 자신 있게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아이. 체감상으로 틀릴까 봐 혹은 자신이 없어서 물어보고 진행하는 아이가 절반 이상은 된다. 아이들도 나만의 <아홉 살 마음 사전>을 만들 생각에 살짝 들떴나 보다.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네임펜부터 든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10분 남짓 지나지 않아 A는 “아 망했어요. 새 책 주세요.”라고 했다. 수업 전 날 양면 프린트를 하고 일일이 종이를 스테이플러로 찍어 낸 나의 고생은 몇 초만에 새 거로 바꿔달라는 요구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한 명의 책을 바꿔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A에게 바로 바꿔주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망친 것을 수정할 방법은 없을까? 사실 A는 무엇이 잘 안 되면 종이를 다 구겨버리거나 갈기갈기 찢는 아이였다. 부모님과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화를 푸는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를 하셨다. A가 종이를 또 찢어버릴까 봐 걱정도 되었다. A가 종이를 새로 받고 싶은 이유를 알기 위해 어느 부분이 망쳤는지 물어보았다. 네임펜으로 써서 이 부분을 바꾸고 싶은데, 책으로 만들어졌으니 종이로 대체할 수 없고 아예 다른 책을 달라는 것이었다. “아, 정말 바꾸고 싶겠다. 그런데 이 책은 만들려면 오래 걸려. 한 글자를 틀렸는데 전체를 바꾸는 건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밑줄을 쫙 긋고 써볼까?”라고 했더니 A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때 마침 생각난 것이 수정 테이프였다. A에게 수정테이프로 한 부분을 지워주었고, 다시 해보라고 돌려줬다. A를 포함한 우리 반 모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 글자를 쓰다 보면 틀릴 수가 있죠. 연필로 먼저 쓰고 잘 쓰고 싶은 부분만 네임펜으로 따라 쓰세요. 혹시 틀려서 망쳤다고 느낄 수 있죠? 걱정하지 말아요. 수정테이프로 네임펜도 지울 수 있어요.”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의 표정은 광명의 빛을 찾은 표정들이었다. 그 이후 몇 명의 아이들은 수정 테이프를 사용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아홉 살 마음 사전>은 멋지게 완성되었다. 며칠 전 국어와 통합수업을 연계해 가을 시 액자를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한 글자 틀려서 종이를 버리거나, 안 하고 싶은 마음에 과제를 포기해버렸을 아이 한 명이 나에게 종이를 들고 나와 말했다.

“선생님 이 부분 화이트로 지워 주세요.”

아, 틀려도 포기하지 않고 지우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끝까지 과제를 해내려고 하는구나! 하며 감동했다. 수정 테이프가 너무 고마웠다. 사실 빈 종이는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존재다. 아차 하는 순간에 빗나가버린 선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림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려도 괜찮다, 지울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안심될까? 아이들에게 틀려도 괜찮다, 지울 수 있다, 하얀 선으로 덮어버린 위에 다시 쓰면 된다,라고 토닥여주는 말과 도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하루였다. 우리 교실과 아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수정 테이프의 존재가 고맙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담의 기쁨과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