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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mu May 26. 2021

001 방순한 마음

2021년 4월 1일 발행

⟪백자보주형연적⟫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사용연대는 조선시대. 사진 출처는 네이버 지식백과 e뮤지엄.

(https://bit.ly/3fOIlrU)



방순하다.” 


최근에 새로 알게 된 단어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향기롭고 부드럽다’라고 나온다. 후각(향기롭다)과 촉각(부드럽다)을 동시에 담아낸 말이라니 신기하다. 나는 이 단어를 혜곡, 최순우 선생님의 글에서 발견했다. 평생 박물관에서 한국 미술을 지키고 알리는 데 일생을 보내신 분. 그의 글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가 예사로 등장한다. 나는 작고 깨끗한 도토리를 주워담는 기분으로 그 단어들을 모은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 방순하다 = 향기롭고 부드럽다 

* 전아하다 = 법도에 맞게 아담하다 

* 고졸하다 =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 순후하다 = 온순하고 인정이 두텁다 

* 안온하다 = 조용하고 편안하다 

* 고담하다 =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하다

* 연연하다 = 빛이 엷고 산뜻하며 곱다 


옛 사람들은 무언가에 대해 ‘방순하다’고 느끼고, ‘방순하다’라고 말하면서, ‘방순한’ 것을 만들기를 꿈꾸었던 것일까. 이런 말들이 더 이상 쓰임을 받지 못한다는 건 우리들의 미의식이 얼마간 변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갖가지 멋이 있다. 엄숙하고 장대한 것이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고 세밀한 디테일에서 화려함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한편 한국의 미술들은 소박하고 무던한 데서 은은한 멋을 즐겼다. 최순우 선생님은 그것을 예찬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을 즐겨 쓰셨다.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가 별로 꾸밈없이 드러난 것”,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어”, “소박하고 건강한 감각”, “좋은 안목을 지닌 사색하는 눈들” 


오랜 시간 연모해온 백자 연적이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모양의 백자 연적이다. 실물로 본 것은 아니고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사진 한 장 본 게 전부다. 하지만 처음부터 마음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좋았다. 소장처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도 가보았는데 전시품이 아니어서 보여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연적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쓸 물을 담아두는 용기다. 


이 연적의 크기가 겨우 지름 7cm, 높이 7,9cm다. 초딩같은 내 손에도 쏙 들어올 만큼 아담한 사이즈인 것이다. 기계적인 원형은 아니어서 아래는 둥글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탐스러운 복숭아 모양 같기도 하고, 갓난아기의 둥근 볼살 같기도 하다. 캄캄한 밤에는 서안 위에서 홀로 청정한 빛을 낼 것만도 같다. 그 흔한 문양 하나 없이, 이렇다 할 장식도 없이 이 작은 몸에 이토록 무한한 멋을 담다니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궁금해진다.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이 썼을까? 문예가 부흥한 조선사회에서 연적은 중요한 문방구 중 하나였는데, 쓰는 이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빛깔이 전해진다고 한다. 주로 선비의 지조를 드러내는 수평, 수직의 장방형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가운데 이 대책없이 둥글고 앙증맞은 연적은 그 수수한 모양 때문에 도리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이 연적을 아껴 길들인 사람은 무척 자유로운 심성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연적의 모양처럼 둥글둥글하고 유연하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만 같다. 


“욕심이 없어 좋다” 최순우 선생님은 한국 미술을 두고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욕망에 욕망을 더하지 않고, 남들 위에 서기를 우쭐하지 않고, 겸허하고 질소한 멋, 이것이야말로 참멋이라고 생각한 조상들의 안목이 근사하다. 소유할 필요 없고, 정복할 필요 없고, 이겨 우쭐할 필요도 없는 마음. 이것에 오늘날 창작자들이 얻어야 할 힌트가 있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는 바티칸 미술관에, 우리의 달항아리가 소리 없이 조용히 한 구석을 차지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도리어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벽화를 배경으로 달항아리는 그 담담함과 소탈함으로 좌중을 압도하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 어떤 노련한 성취나 치열한 완벽성보다 보배롭고 아름다운 빛이 있다고. 


봄이다. 4월이다. 코로나로 무너진 일상은 돌아오지 않고 황사 낀 하늘은 목마른 계절처럼 힘겹게 흐른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새하얀 구슬연적처럼 방순한 마음, 청정한 마음을 잘 닦아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에겐 선조들이 남긴 드높은 안목과 혜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무기삼아 지금 우리에게 진실로 소중한 것,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립고 감사한 마음으로 크게 심호흡하며, 4월에 우리 다시 새로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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