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다 Jul 04. 2020

삼전 사기, 좌충우돌 아이슬란드 한 바퀴 - 제 1장

불완전한 여행의 미학, 10박 11일 네 번째 아이슬란드 여행기


<프롤로그>

“나 10월에 아이슬란드에 가려고.”

“너 저번에 갔잖아? 거긴 왜 또 가?”

“… 그냥.”

누군가 내게 아이슬란드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이라는 말보다 더 내 마음을 잘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아이슬란드에 가는데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다. 한 산악인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슬란드가 거기에 있으니까’ 정도랄까? 이전의 나에게 아이슬란드, '저~ 위쪽 어딘가 외로운 섬이 하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딱히 관심도 갈 일도 없었던 곳' 정도인, 한 마디로 무의미한 곳이었다.

그런 아이슬란드가 내 삶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2015년, 어학연수 도중이었다. 이름도 아일랜드랑 한 끗 차이인 게, 정보도 얼마 없네? 심지어 한국에서 오기도 힘들대. 아일랜드가 너무 지루하던 때 인지라, 한 번쯤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구매했다. 렌트하면 좋은 여행지라고 해서(사실 대중교통으로 여행하기가 너무나 불편한 곳이다) 부랴부랴 차도 한대 빌렸다. 


두려움 다섯 스푼과 기대감 한 스푼을 담은 캐리어를 벗 삼아 지금은 파산한, 비운의 WOW air에 몸을 싣는다.  50년 전 달에 첫 발을 내디딘 한 남자에 빙의해 씩씩하게 이미그레이션을 막 통과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여행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5일 간 링로드 한 바퀴라는 어이없는 미션 ― 보통 해가 지지 않는 7,8월에는 최소 6~7일, 그 외 기간에는 최소 7~9일이 요구된다 ― 을 마치고 든 생각은 단 한 가지.

<무지개의 시작점을 본 그 날>


‘언젠간 다시 오고 싶지만, 쉽게는 못 오겠구나.’

'미션'이라는 표현에서 대충 짐작했겠지만, 당시 내가 세운 일정은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임무였다. 30분 단위로 어디까지 도착해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빼곡히 기록했고, 카페에 가입해 여러 정보를 얻었다. 변수는 생기지 않을 거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운이 좋게 성공했다. 처음엔 불가능한 미션을 완수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뒤 몰려드는 아쉬움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쌓인 아쉬움과 간절한 염원 덕에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왔고 그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 했다. 그런데도 아쉬운 건 똑같더라. 이번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록 아쉬움이 더 커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는데, 그 덕분에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거니 했던 그곳은 어느덧 네 번째가 되었다. 후술 할 에피소드에서 밝혀지겠지만, 이번 여행 역시 세웠던 목표를 전부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실패와 예측 불가능했던 상황이 밑거름이 되어 브런치 서류(?) 합격이라는 열매의 양분이 되었으니, 이것이 여행의 불완전함의 가져다주는 미학이 아닐까.

언제나처럼 여행을 마치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했지만, 언젠간 창문 뒤로 이끼 밭이 펼쳐진 아이슬란드의 한 숙소에 누워 이 글을 꺼내 읽을 다섯 번째 날 ― 이때도 나의 여행이 완벽하지 않았으면 한다 ― 이 오리라 확신한다.

<창문 밖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면, 도둑보다는 양일 가능성이 더 큰 나라.>




[세 번 더, 아이슬란드]

17년 12월, 미대의 (시든) 꽃인 졸업전시 기획을 맡게 되었을 때다. 요즘 핫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화려한 조명과 함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겠다 다짐함과 동시에 ‘방랑’이라는 씨앗을 마음 한편에 심었다. 이젠 길게 여행 갈 시간도 없을 거고, 대학 생활을 9년이나 했으니 의미 있는 곳에서 마무리 좀 해보자. 취업? 그거야 언젠간 되겠지… 명분은 거창했고 뭐 대단한 삶을 회고라도 할 것 마냥 보였지만, 사실은 그냥 다시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었다.

신이 지구를 만들기 전 프로토타입용으로 만들었다는(아마 아이슬란드와 지구로 A/B 테스팅을 한 것 같다.), 내가 사랑해 마지못한 그 아이슬란드. 세 번을 다녀왔음에도 어쨌든 그곳이어야만 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다지만, 아이슬란드에 가는 것만큼은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지구 그 자체가 아니던가>


아이슬란드 항공권을 구매할 때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이슬란드의 수도는 레이캬비크, 그곳에도 공항이 있는 지라 간혹 레이캬비크 공항을 목적지로 검색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레이캬비크 공항은 오직 국내선 전용이고, 국제선을 타고 가려면 케플라비크(KEF) 공항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어야 한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인천공항쯤 되겠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을 경유해 23시에 케플라비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이슬란드답게 내리자마자 한 덩어리의 작은 오로라가 우릴 반긴다. 훗날 함께 온 동행의 회고에 의하면,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에 창밖으로 오로라를 보았기 때문에 ‘아, 여기는 항상 저런 게 떠 있구나. 대박...’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그 후로 우리는 9일 간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누구나 이런 오로라를 볼 거라 기대한다. 빈 눈으로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전 까지는...>



[잘못 꿰어진 첫 단추]


본격적으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랜드로버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거친 대자연 속에서 레인지로버를 타고 느긋하게 유일한 국도인 1번 도로를 질주하는 ― 그래 봤자 시속 90km/h가 최고다. 모 카페에선 과속 벌금 70만 원 냈다는 후기도 봤다 ― 나의 모습. 중간에 한적한 도로에 멈춰 사진도 찍고, 얼마나 좋아. 하지만 레인지로버는 너무 비싸니까, (대략 열흘에 250만 원 정도, 1일 6만 원가량 하는 풀커버 보험을 제외하고…) 꿩 대신 닭이라고 레니게이드를 예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쉬움보다는 기쁨이 훨씬 컸지, 고채도의 짱짱한 주황색 차를 탈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 색이 뭐가 중요한가 싶겠지만, 내게 아이슬란드란 먹구름이 가득한 회색빛 나라다. 광활하게 펼쳐진 저채도의 대지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주황색 레니게이드! 그리고 보닛에 기대어 지평선을 응시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림이 따로 없다. 다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한국과 해외의 렌터카를 예약/수령하는 기준에는 좀 차이가 있다. 여기서야 차종을 콕 집어 내가 예약한 흰색 아반떼를 받을 수 있지만, 해외 렌터카 업체는 차종이 아닌 ‘동급’의 차량을 내어준다. 즉, ‘오, 벤츠 C클래스 검은색!? 대박사건~’ 하며 예약을 해도 다른 색상의 차량 또는 C클래스와 동급인 BMW, 도요타의 차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외에서 렌터카를 빌릴 때는 차를 타고 여행한다는 그 자체를 기대해야지, 특정 차종에 대한 로망은 잠시 접어두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다. 이미 숱하게 겪어 이러한 리스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아이슬란드라는 붓에 기대라는 꿀을 묻혀 대뇌의 행복 회로를 마비시키는 바람에 망각의 동물로 회귀한 걸까? ‘근거도 확신도 없지만, 분명 주황색 레니게이드를 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을 품고, 렌터카 픽업 차량을 기다린다.


<내 여행은 이래야만 했다. 사진 구글 펌>


아, 시작부터 삐걱인다. 분명 픽업 시간이 20분 가까이 지났지만, 차는 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로밍도 안 해서 전화도 안돼. 그렇지만 세계 58개국을 다니며 단련된 내가 아니던가? 일단 근처 편의점에서 유심을 산다. 자, 이제 모든 게 잘 해결될 거야.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행의 사자가 내 귀에 속삭인다. ‘너 유심 트레이는 어떻게 뺄 거니~?’

후후. 그럴 줄 알고 미리 유심 핀을 챙겨왔...는데, 이거 어디 갔니? 아무리 캐리어와 가방을 뒤져도 없다. 빌릴 곳도 없고, 한참을 멘붕에 빠져있다가 캐리어 한쪽에 굴러다니던 옷핀을 발견했다. 겨우 유심을 교체하는 데 성공했고, 분노를 삭이며 렌터카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우리 왔는데, 픽업 차량이 없어.’ ‘갔는데?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불길한 느낌이 엄습한다. 으레 외국에서 출발했다 함은, 한국에서 배달원이 방금 출발했다는 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30여분이 흘러 다시 전화를 했고, 똑같은 답을 들었다. 자동응답기야? 매크로야? 그래도 별수 있나. 기다려야지. 택시를 타면 한 10만 원 나오려나? 가뜩이나 지친 몸에 짜증까지 치솟던 찰나, 픽업 차량이 도착했다. 우리 말고도 두어 팀을 더 태워가는데 딱 보니까, 우리 다음 비행기가 40분 정도 뒤에 있었는데 두 번 오기 귀찮으니 한 번에 처리하려는 속내가 뻔히 보인다.


그래, 이런 거에 일희일비하면 나만 손해다. 한시간 늦는 건 이 사람들에겐 일도 아닐 테지. 마음을 추슬러 차에 타려고 줄을 섰는데, 앞에 있던 여자가 먼저 가라며 자리를 양보한다. 이런 약아빠진 여우를 봤나? 우리보다 늦게 타고 먼저 내려서 차를 받아갈 심산이다. 옥신각신 할 힘도 없어 차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달려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혹시 누군가 'Green Motion'에서 차를 빌릴 생각이라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도시락(자비 부담) 싸들고 가서 말려드립니다>


그래,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이제 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렌터카 사무실로 들어오며 흘깃 봤는데 구석에 주황색 레니게이드(이하 레니, 제발 그만 좀 고장 나라는 의미에서 애칭을 붙여주었다.) 있는 것이었다! 전조등은 꺼져있었지만,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레니의 밝은 눈동자가 날 쳐다보는 듯하다. 


번호표를 뽑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순번을 기다린다. 한 30분 기다렸나? 우리 앞 순번이던 중국인 둘이 데스크에 가서 계약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직원과 옥신각신 한다. 잘 들어보니, 영어로 뭐라 뭐라 하는데 스틱을 운전할 수 있냐 뭐 이런 내용인 것 같다. 음? 하긴, 유럽은 스틱도 아직 많으니까. 


이내 다시 행복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십여분 쯤 더 흘러 중국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쁨에 희번덕거리는 나의 눈과 짜증이 폭발한 그들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난 그때 그들의 표정이 왜 그런지 몰랐지. 이윽고, 우리 차례가 다가왔고, 당당하게 거금 300만 원을 디파짓으로 지불했다. 아, 지금이다. 친히 재앙의 첫 단추를 꿰어준 그 직원의 한 마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야기하자면,


'우리 자동 변속 차량이 없어. 수동 차로 받아가든지, 낼 아침에 다시 오든지.ㅋ'


-2부에 계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