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토 Aug 27. 2024

영어를 한다는 것, 영어를 잘한다는 것 (2)

유학생의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까?

1. 어떻게 귀를 뚫을 것인가


호주행을 결정하고 야금야금 유학원 알아보던 때를 기점으로 나는 영어노출 빈도를 압도적으로 늘렸다. 의무감으로 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그 당시엔 (신기하게도) 그게 즐거웠다. 정말 징하게도 많이 들었는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내가 원래도 영어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듣기"였다는 점이다. 그럼 나는 왜 듣기를 자신 있어하느냐, 하면 그건 생뚱맞지만 내가 남을 잘 흉내내기 때문인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꼭 선생님들 흉내 내는 친구들이 주변에 한 둘씩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다.

흉내내기의 기본은 특징을 파악하는 건데 나는 그냥 특징을 짚어내고 그걸 따라 하는 게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극도의 I 인 주제에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만 광대인 나란 사람... 아무튼, 기본적으로 뭔가를 따라 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영어 자체도 그냥 성대모사하는 심정으로 재미나게 들었던 것 같다. 원래 가지고 있던 성대모사 소질(?)에 더해 호주행을 결정하고부터는 정말 영어를 끊임없이 들었다.

당시 왕복으로 하루에 거의 3시간에 육박하는 시간을 출퇴근을 위해 길에서 허비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영어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통근버스에 앉아있었다. 아침에 졸려서 눈을 못 뜨든 말든, 퇴근길에 침 흘리며 기절을 하든 말든 일단 틀어놓기는 했다는 것이다.

자주 들었던 팟캐스트는 뉴욕타임스에서 만드는 팟캐스트인 The Daily였다. 한 에피소드에 한 주제만을 가지고 30분~40분 정도 이야기 하는 채널이라 집중해서 듣기 좋았던 것 같다. 또 주제 자체가 미국에서 핫한 정치/사회적 이슈이거나 국제사회 이슈여서 지식채널 보는 느낌으로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했다.

내가 들었던 방법은 일단 듣기... 어차피 스크립트가 없으니 그냥 듣는 수밖에 없고 듣다가 모르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올 경우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최대한 들리는 대로 스펠링을 추측해서 검색해보곤 했다. 그렇게 검색하면 십중팔구는 맞는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노력을 들여서 찾은 단어는 나중에 더 기억에도 잘 남는다. 또 딱 들어도 괜찮은 문장이 나올 경우에는 다시 재생하면서 한 두어 번 더 듣기도 했다. "외워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들었던 것은 아니고 가랑비에 옷 젖게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편하게 들었다. 물론 이 방법은 아예 영어 기초가 없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또 워낙에 뇌가 도파민에 절여져 있는 편이라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 시기에는 무조건 미드를 영어자막 깔고 혹은 무자막으로 봤었다. 특별히 압박감에 그랬던 건 아니고 그냥 정말 재미있어서 봤었다. 영어공부하기 좋다는 미드를 본 건 아니고 그냥 정말 내가 좋아하는 걸로 봤었다. 그중에서도 영어실력에 도움이 될 정도로 열심히 보고 가끔 단어도 찾아가면서 봤던 건 길모어 걸스, 굿 와이프 그리고 슈츠 정도. 길모어 걸스는 아직까지도 내 최애 미드 중 하나이다.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아 부족한 도파민을 채우기 위해 유튜브 브이로그 등도 틈틈이 봤는데 주로 한국계 미국인의 브이로그를 봤었다. 추천하는 건 Jenn Im과 Yoora Jung. 특히 젠은 북클럽을 만들 정도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유튜버라서 그런지 단어 선택이 다채롭고 클리어한 미국식 발음이라 듣기에도 편한 편이다. 그리고 다들 아는 것처럼 호주의 미친 악센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호주인 유튜버도 몇몇 봤었다. Jess & Gabriel의 Jess는 진짜 딱 호주 젊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말투에 그리 심하지 않은 악센트를 갖고 있어서 듣기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다 볼 시간이 어디 있냐면 그냥 있더라고요...

이걸 일처럼 공부처럼 했으면 정말 하기 싫었겠지만 나는 그냥 기본적으로 뭘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가만히 멍 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해도 공부가 되냐, 하면 아주 극악한 효율이긴 하지만 되기는 된다.

가끔 주변에서 영어공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내가 늘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인풋을 최소한 150%를 만들어야 아웃풋이 20~30%가 나온다'이다. 효율이 정말 거지 같지만 어떤 언어에 젖어 들어 그 언어가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려면 어마어마한 인풋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항상 말하듯 이것은 그냥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최근 우연찮게 타일러 라쉬의 인터뷰를 봤는데 요는 언어는 "공부"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거라는 것이었고 배우는 걸 가속화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논지에 극도로 공감을 해본다.

2. 어떻게 쓸 것인가 (feat. 레포트)

귀도 열심히 뚫어놨겠다 지난 글에 밝힌 바대로 난생처음 쳐본 아이엘츠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나오기도 했겠다(L 7.5 R 7.5 W 5.5 S 6.5) 그 성적 그대로 들고 호주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솔직히 이만하면 호주 유학생 중에서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학 이후 마주하는 과제 앞에 나의 영어자신감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의사소통은 괜찮았다. 앞서 말했듯 귀는 뚫려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입을 떼든 못 떼든 알아듣기는 하니까 어째 저째 모로 가도 서울은 가는 그림이 나오기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조리 있게"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글로 짜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렇다. writing 5.5의 치욕이 시작된 것이었다.

학과 특성상 과제는 주로 글로 줄줄 써내야 하는 레포트였는데 보통 1500자나 2000자, 어쩔 때는 3000자에 달하는 글자수를 채워내야 했다. 아이엘츠 때 200자 쓰면서 끙끙댔던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고통스럽게 쥐어짜느라 힘든데 프루프리딩은 더 힘들었다. 그래도 이게 첫 학기를 꾸역꾸역 보내고 나니 조금 감이 잡히기는 했다.

비법이랄 것도 없지만 내가 쓴 첫 번째 방법은 레포트를 쓰기 전 무조건 트리 다이어그램을 먼저 만든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할 때 트리 다이어그램을 쓰지 않으면 머릿속에 체계가 잡히지 않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아이엘츠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오프토픽"이 나지 않게 주의하는 것이 라이팅의 기본이다. 트리 다이어그램을 사용하면 아이엘츠 라이팅보다 훨씬 더 긴 글을 토픽에서 어긋나지 않고 짜임새 있게 쓰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트리 다이어그램. 출처: https://www.istockphoto.com/ 이미지 검색>


어떤 글이든 일단 쓰기 시작하다 보면 그 글에 올라타 그냥 써지는 대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면 원래 쓰려고 했던 논지가 무엇인지 까맣게 잊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트리 다이어그램이 있으면 원래 쓰고자 했던 방향성이 어디인지 계속해서 스스로를 상기시킬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그렇게 나뉜 트리 다이어그램의 각 항목마다 글자수를 분배하는 것이다. 학교 과제의 특성상 글자수가 정해져 있고 + - 5% 혹은 10% 이상이 되면 감점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글자수 또한 항상 주의하여야 하는데, 각 항목마다 글자수를 정해두면 나중에 글자수가 너무 모자라다던지 너무 넘쳐서 앓는 일이 줄어든다.

위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스스로가 쓰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하다는 전제 하에 내가 썼던 세 번째 방법은 일단 문장이고 문법이고 나발이고 생각나는 단어/표현을 우루루루 쏟아내 놓는 것이었다. 사실 모국어로도 레포트를 쓴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인데 외국어인 영어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정확하고 조리 있게 쓸 생각을 일단 버리고 하고자 하는 말을 우루루 쏟아낸 다음 그걸 주섬주섬 기워넣어(?) 하나의 문장과 나아가 하나의 문단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기워넣는 작업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트리 다이어그램을 참고하면서 논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은 당연하다.

나는 이런 방식을 이용해서 (가히 즐겁지는 않았지만) 꾸역꾸역 과제들을 완성해 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 말이나 우수수 쏟아낸 후 문장을 만들어내는 비율보다 처음부터 완성된 매끄러운 문장을 쓰는 비율이 커졌다. 듣기를 하며 "인풋"을 늘리는 것도 하다 보면 뭔가 처음보다 더 잘 들리게 되는 것처럼 글로 써야 하는 "아웃풋"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쓰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나의 문체가 점차 정립이 되어가는 것이다.

3. 유학생으로서의 영어

유학생이든 이민자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영어 학습은 평생에 걸쳐해 나가야 하는 여정이다. 그렇기에 아이엘츠, 혹은 PTE 몇 점 이상이 되면 유학/이민하기에 적당한가요? 란 사실 어찌 보면 무의미한 질문에 가깝다. 그야말로 고고익선(高高益善)인 것.

사실 영어 시험 성적 = 실제 영어 실력인 것은 아니다. 특히 대면해서 쓰는 구어의 경우 자신감이라는 요소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유학생으로서 몇천 자에서 때로는 만자에 이르는 과제를 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영어는 그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써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실력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가 수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아이디어가 있고 이를 레포트에 표현하고자 하는데 내 생각의 최소 50~60% 정도를 표현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유학생으로서의 나의 영어가 조금은 부족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내가 내는 과제물에는 유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지 않고, 유학생의 풀 안에서 과제를 평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어를 한다는 것, 영어를 잘한다는 것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