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도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녁 Sep 10. 2017

에노시마

한여름의 바비큐




에노덴 쇼난 해안 공원역에서 내려 바비큐 장소로 향했다. 철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곧게 뻗은 도로변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예전에 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일 년 전 이 맘 때였을 것이다. 후지사와 역에서 에노덴을 타고 무심코 내린 곳. 그 당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곳의 역 이름이 쇼난 해안 공원역이었다.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려 하던 7월 초의 쇼난. 그때는 이 거리에서 일본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햇빛에 바랄 대로 바래 더 이상 바래 질 곳 없는 낡은 슈퍼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국적인 네이밍의 카페 간판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큰 도로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심어진 야자수가 이국의 정취를 풍기고, 바다 내음이 습한 공기에 섞여 숨결 속에 녹아들던 기억. 1년이 지나 다시 찾은 이 곳에서 그때와 같은 향수 어린 풍경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홀로 떠난 여행이 아닌, 회사 행사에 참가하기 때문이었을까. 같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20분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도 아직 바비큐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텐트 주위로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접수를 담당하는 사람인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회비를 건네고 간단한 주의 사항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계단 한쪽에 앉아서 어서 바비큐가 시작되기를. 아니 누군가 내가 아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 멀리 혼마상의 모습이 보였지만 바비큐 준비를 하는 모양인지 분주해 보여서 말 걸기를 포기했다. 얼마 있지 않아 사쿠마상이 자신의 언니와 함께 나타났다. 에노시마 역에서 내려 여기저기 헤매다가 늦게 되었다고. 쇼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이 곳 지리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바비큐 장소를 가든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뉜다. 고기를 굽는 사람과 고기를 기다리는 사람. 나는 언제나 고기를 굽는 쪽에 속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에 소시지와 고기를 한 번 굽고 나니 다음에 먹을 식재료가 떨어져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바비큐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어쩔 수 없이 바비큐가 마무리될 즈음 등장하는 야키소바가 철판 위에서 만들어지는 사태가 빚어졌다. 바비큐가 끝날 때까지는 야키소바를 먹으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예정되어 있던 지비키아미(그물로 고기를 끌어올리는 행사)가 취소된 데에 있다. 원래는 그물을 묶은 큰 배가 바다로 나가고 바비큐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그 그물을 해변으로 끌어당겨 그물에 걸린 생선을 바비큐 재료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랬던 것이 날씨가 좋지 않은 탓에 취소가 된 거고. 니시무라상의 부인은 에노시마의 지비키아미 행사를 꽤 기대하고 온 모양이었다. 지비키아미를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에노시마는 멸치가 유명해서 대량의 멸치가 건져 올려진다고. 그 건져 올려진 멸치를 생으로 먹기도 하고 바비큐 가게에 부탁해서 튀김으로 만들어 먹는다고. 하지만 그건 이제 누군가로부터 들은 무용담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의 식탁에 올려져 있는 건 멸치 튀김이 아니라 사람 수만큼의 야키소바였다.







니시무라상의 부인은 사쿠마상과 사쿠마상의 언니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런가 하면 니시무라상은 아이들과 바닷가에 들어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혼마상은 술과 음료 그리고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쉬지 않고 움직였다. 모두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 니시무라상의 부인이 누군가가 와인을 마시는 걸 보고 자기도 스파클링 와인이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 니시무라상은 못 이기는 척 와인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술이 담겨 있는 아이스 박스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니시무라상의 부인은 장난기 가득하게 니시무라상을 나무랐지만, 내심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서 와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혼마상이 스파클링 와인을 들고 왔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가장 기뻐했던 것은 니시무라상의 부인으로 모두에게 조금씩 와인을 따라주고 병의 절반 가까이 남은 와인을 혼자 독차지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그것도 젠체하지 않으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챙긴다. 그런 사람이 혼마상이었다. 사쿠마상과 사쿠마상의 언니를 위해서도 음료를 가져다주고 무심한 듯 모두를 챙기는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자고로 저 정도 나이가 되면 저렇게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시무라상을 꼭 빼닮은 다섯 살 여자아이, 혼마상처럼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는 여섯 살 여자아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이 바비큐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아이들이 모여서 해변가 한 곳에 구덩이를 파 놓고 그곳에 돗자리를 올려 논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어른들을 한 명씩 데리고 와서 그곳에 빠트리는 장난을 친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구덩이에 빠진 어른들은 천연덕스럽게, 그곳에 구덩이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듯이 연기를 한다. 아이들은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까지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해변 한가운데에는 깃발이 꽂혀 있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하나 둘 셋이라는 신호에 맞춰 깃발을 향해 달린다. 달리다 넘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멋지게 점프를 하여 깃발을 손에 넣는 사람도 있다. 저 멀리 바닷가 근처에서는 등이 깊게 파인 수영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젊은 여성이 보인다. 그리고 그 여성을 카메라 찍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자세를 한껏 낮추기도 하며 여성의 모습을 포착한다. 그 둘은 점점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바닷속에 몸을 담근 채 사진 촬영에 몰두 중인 두 남녀 뒤로 에노시마가 보인다. 그리고 에노시마 위로 곧게 뻗어 있는 등대가 보인다. 바다로부터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두껍게 끼어있다. 저 멀리서는 허공을 가르는 한줄기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이곳에서의 한 때가 지나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사쿠사바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