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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쿄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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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 Apr 09. 2018

개기월식

붉은 달

사고를 쳤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회사에서 격렬하게 깨지고 역까지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골치 아픈 생각들이 하나의 단단한 돌덩이가 되어  

머리 속 한 구석을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작년 봄 어떠한 이유로 나는 내가 몸 담고 있던 일터를 떠나왔다.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부정하며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했다. 

그 활로가 일본이었고, 워킹홀리데이라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  

이곳 도쿄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도쿄에서의 1년은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선사해주었다.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라고,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며 나의 선택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저 현실로부터 벗어나려 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간섭도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외딴곳에서 홀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여전한 도피의 한 방편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1년 동안 

내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적합한 계획도 노력도 없이 그저 시간만 보낸 후에야, 

그리고 내가 떠나왔던 그 일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도피의 사실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그대로 떠안고 가야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끝까지 가보자 끝까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초등학생 여자 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핸드폰 사진을 찍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초승달이라고 하기에는 둥근달의 윤곽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물론 달의 윤곽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완벽에 가까운 원형의 기운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어제 인터넷에서 확인한 뉴스가 생각났다. 

오늘 저녁에 개기월식이 있을 거라는 뉴스를. 

뉴스를 보고서 이번 개기월식은 제대로 한 번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밤하늘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여태껏 제대로 된 월식을 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월식이 일어나는 것은 처음이니까 이 번 일을 좋은 기회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하면서 하루 종일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월식 생각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둠이 달을 조금씩 베어 먹듯 

캄캄한 하늘 위의 선명했던 달빛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자 끝까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순간. 

내가 생각하는 그 순간의 모습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극적이고 환상적인 모습이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아니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그러한 모습이다. 

그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보면 어떨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보고서 꽤 실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절정의 모습을 놓칠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개기월식의 대한 생각도, 

일에 대한 생각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공백을 채워 나갔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인 묘덴역을  지나쳐 종점인 니시 후나바시 역까지 와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돌아온 방향의 열차로 갈아탔다.  

묘덴역에 도착하여 개찰구를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위에는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이 시릴정도로 밝은 빛을 발하던 달이 

신비스러우면서도 은은하게 붉은 기운을 뿜어 내고 있었다. 

붉은 달 빛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걸음이 걸어졌다. 

인적 없는 주택가를 걸으며 달을 바라보았다. 

주택가 사이로 널찍한 길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 집 창문으로는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여고생 두 명이 자전거를 세워둔 채 그 앞에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에도가와에 맞닿아 있는 공원에 들어서게 되었다. 






반달 모양의 계단에 앉아 쓸쓸히 붉은 달을 바라본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살갗을 부비며 지나가고 

그 바람은 에도가와 강변에 걸쳐진 다리를 타고 멀어져 간다. 

등 뒤에서는 두 여성의 조잘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왼편 벽으로 가로등 불빛을 받은 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늘 위에는 여전히 붉은 달이 몽롱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고, 

밤하늘은 여태껏 본적 없이 환한 빛깔을 자아내고 있다. 

그 때문에 하늘과 구름이 확연히 구분된다. 

구름 사이로 항공기의 불빛이 반짝인다. 

이윽고 이제 막 두꺼운 구름을 뚫고 나오듯 

나리타로 향하는 항공기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항공기는 제각각의 경로를 그리며 구름을 뚫고 내려온다. 

그리고는 잠시 적막이 흐른다. 

그 적막을 깨고 저 멀리서 열차가 균일한 리듬의 박자를 맞추며  

에도가와에 놓인 다리를 건너온다. 

열차가 내는 소리에 파도치듯 구름이 점점 그 영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붉은 달에게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간다. 

이윽고 붉은 달은 구름에 가려지다 다시 보이기를 반복한다. 

머리를 젖혀 등 뒤로 드넓게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다. 

구름 사이사이로 하늘이 바라다보이는 공간이 보인다. 

아직 개기월식은 끝나지 않았다. 

그 공간 사이로 얼마든지 붉은 달의 소멸과  

은빛 달의 부활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참을 지켜보고 있어도 달은 구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넓어 보이던 구름 사이의 하늘이 실제로 달과 만날 확률은 극히 낮다. 

붉은 달이 구름 사이의 하늘과 맞닿을 확률. 

그 확률은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붉은 달은 구름 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시 머리를 젖혀 광활하게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다. 

어쩌면 저 구름이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붉은 달은 나의 이상이자 꿈일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눈에 보이는 꿈을 좇으며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꿈을 좇으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저 구름 뒤의 

붉은 달을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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