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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쿄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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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 Apr 15. 2018

이발소

床屋

머리를 깎지 않은 지 세 달 째다.

원래 머리를 자주 깎지 않는 편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미용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좀처럼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지저분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미용실을 물색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미용실은 대체적으로 역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용실 앞을 지나치며 가게 앞에 내걸려 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대부분 커트 가격만 3천 엔대고 그중에는 4천 엔이 넘는 미용실도 있었다.

역 주변을 돌아다니며 확인한 결과 1980엔이 가장 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미용실을 가기가 망설여졌다.

창문을 통해서 보게 된 아주머니들의 모습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격과 안심,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켜 줄 만한 미용실을 찾기 위해서

아직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발견한 것이

일본 이발소이다. 

1년 정도 일본에 살면서 이발소는 이용을 해보지 않았다.

천 엔을 지불하면 7분 만에 머리를 깎아주는 곳을 가본 적은 있지만,

그곳을 이발소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발소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발소의 이발사는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

이발소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머리를 깎아주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면 나는 그곳을 이발소로 인정할 수가 없다.

이발소의 유리창 너머로는 분명히 남자,

정확히 말하자면 중년의 아저씨가 하얀 가운을 걸치고서 머리를 깎아주고 있었다.

이발소로 들어가는 가게 문 옆으로는 

파랑, 빨강, 하양의 띠가 서로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며 원통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이발소로 들어갔다.

문 오른편으로 다섯 명 정도가 앉아서 대기할 수 있는 소파가 있었고,

그 앞 테이블 위에는 조그만 바구니 안에 전병 과자가 담겨 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널찍한 책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안으로 챔프라던지 점프라던지 하는 두꺼운 만화 잡지가 가지런히 채워져 있었다.

적당히 소파의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발소에는 총 세 명의 이발사가 있었다.

한 명은 덥수룩하게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안경을 끼고 정갈하게 포머드로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은 아무리 해도 어떤 모습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발소 소파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며 그 이발사의 모습을 지켜본다고 해도 

그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 어떤 특징도 기억해 낼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투명인간과 같이, 혹은 카멜레온처럼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이발사가 그랬다.




나는 안경을 끼고, 포머드로 머리를 넘긴 이발사에게 머리를 깎았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순번에 따라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의자에 앉아 어느 정도 길이로 머리를 깎을지를 이야기했다.

가운이 목을 감싸고, 온몸을 따라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이발사의 가위질이 시작되었다.

기분 좋은 가위질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이발사의 가위 든 손이 코 끝을 스칠 때마다

어릴 적 맡았던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눈을 감고 한동안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는 이발이 꽤 진행되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짧게 깎아져 있는 머리를 보자,

불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발사는 그런 나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 들여 머리 이곳저곳에 가위질을 했다.

길이를 조절하는 가위를 사용하다가

숱 치는 가위를 사용하기도 하고,

바리깡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머리는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짧게 깎아져 있었지만,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머리만 깎고 나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다음 단계로 진행이 되었다.

의자가 뒤로 젖혀지고,

가볍게 물기를 머금은 웜 타월이 얼굴에 얹혀졌다.

포근한 기분에 절로 잠이 왔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따스한 기운을 얼굴로 느끼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 위의 타월이 치워지고,

차가운 느낌이 턱 밑을 가로지르는 게 느껴졌다.

아까 이발을 하면서 봤던 면도 솔이 수염을 따라 칠해지고 있는 것이리라.

풍부하게 거품을 머금은 면도솔의 모습이 생생히 눈앞에 그려졌다.

얼굴에 거품이 골고루 묻혀진 뒤,

면도칼이 얼굴 위로 지나가는 느낌이 났다.

새하얀 눈 위로 제설용 나무판자가 지나가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거친 수염이 면도칼에 의해 깎이는 그 느낌이 좋았다.

희미하게 들리는 면도 소리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면도를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면도가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발을 마치고 이발소 문을 나오면서

이발은 둘째 치더라도 면도를 다시 하기 위해

이곳에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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