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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 Jun 10. 2018

코인 란도리

コインランドリー

처음 일본에 와서 살게 된 집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냉장고, 청소기, TV에 냄비와 숟가락 젓가락까지 구비되어 있었지만, 가장 필요했던 세탁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서는 1층 아파트 입구에 있는 7Kg짜리 동전 세탁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집 계약을 하는 날 하우스 매니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세탁과 헹굼, 탈수에 건조까지 해주는 최신식 드럼 세탁기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일본의 허름한 아파트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동전 세탁기였다. 총 열두 세대가 사는 이 아파트에 세탁기는 달랑 한 대 뿐이라니. 주말이 되면 세탁기 쟁탈전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빨래방이 있었다는 것이다. 집 근처 빨래방은 목욕탕 입구의 좌 우로  「コインランドリー」(코인 란도리)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3평 남짓한 공간에 세탁기 3대와 건조기가 2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실내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원래는 새하얀 색이었으리라 생각되는 세탁기는 탁한 아이보리 색으로 바래 있었고, 의자며 바닥이며 거울이며 여기저기 손때가 끼어 있었다. 세탁기 위 선반에는 철 지난 만화책과 잡지들이 가득했고, 세탁기 위에는 누군가가 흘리고 간 짝 잃을 양말 한 짝이 홀로 덩그러니 걸쳐져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에세이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건 어쩌면 나 혼자만의 특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속옷인 러닝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산뜻한 면 냄새가 나는 흰 러닝셔츠를 머리로부터 뒤집어쓸 때의 그 기분도 역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 


 

일본의 빨래방인 코인 란도리를 갈 때 내가 느끼는 감정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에 하나다. 주말이면 빨래를 한가득 품에 안고서 코인 란도리에 간다. 코인 란도리에 도착하면 세탁기에 빨래를 털어 넣고 동전 투입구에 100엔짜리 동전 세 개를 집어넣는다. 그러면  세탁기는 윙윙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고선 이윽고 폭포수 같은 물을 내뿜으며 빨래의 시작을 알린다. 빨래가 돌아가는 사이 나는 근처 편의점에 가서 딸기 우유와 슈크림 빵을 사 가지고 와 코인 란도리에 구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서 먹는다. 배를 채우고 나서는 가지고 온 문고본 책을 읽는다. 책 속에 정신없이 빠져 들어 있다 보면 어느새 삐~하고 세탁이 다 되었음을 알려준다. 세탁기 안에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빨래들이 자신을 어서 꺼내 주길 기다리고 있다.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고 다시 동전을 넣는다.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 시간이다. 빨래는 건조기 안에서 돌고 돌고 돌고 하염없이 돌아간다. 책을 읽다 지치면 건조기 안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모습을 나 또한 하염없이 바라본다. 빵이 구워지듯 빨래가 익어가는 냄새가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실내를 가득 메운다. 따스한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와 그 향기를 더욱 그윽하게 만든다. 


 


 

일본에서 코인 란도리를 처음 알게 된 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이사도 꽤 많이 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할 때 가장 기대했던 것은 어떤 코인 란도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사 후 가까운 곳에 코인 란도리가 없어 아쉬웠는데 최근 집 근처에 새롭게 코인 란도리가 생겨서 자주 애용하고 있다. 이제는 집에 세탁기도 있건만 아직도 나는 코인 란도리를 찾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빨래가 마르지 않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꽃가루가 대기를 가득 메우는 3,4월이 되면 밖에 빨래를 널 수가 없어서. 그렇게 코인 란도리의 건조기를 이용하고 있다. 생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코인 란도리를 이용한다는 것은 꽤 상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픈 행사로 사용 요금도 절반이라 미루고 미뤄두었던 이불 빨래까지 해버렸다. 일요일 오전이면 너나 할 것 없이 파란색 이케아 쇼핑백에 빨래를 가득 담아온 사람들로 코인 란도리는 붐빈다. 이제는 동전이 아니라 카드를 충전하여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 1000엔을 충전할 때마다 100엔씩 포인트가 쌓여 동전을 사용할 때 보다 이익이다. 운동화 전용 세탁기도 구비되어 있고, 세탁부터 건조까지 한 번에 해결해주는 최신식 대형 드럼 세탁기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점내에는 아늑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건물 안의 모든 것이 깨끗하고 쾌적하다. 하지만 코인 란도리는 허름하면 허름할수록 그 분위기가 제대로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가끔씩 5년 전 도쿄에 처음 와 이용했던 목욕탕 옆 허름한 코인 란도리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맡았던 빨래 익어가는 냄새가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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