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2000
그 영화에서 재밌었던 대사를 하나 꼽자면…
소려진(장만옥)이 또 국수를 보온통에 담아서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좁다란 복도 옆방 ‘보이지 않는’ 손부인(집주인)과 또 한 여자의 목소리가 수군거리길(소려진이 제 방으로 사라진 즉시…)
“허구한 날 남편이 출장 나가 있으니 과부나 다름없지.”
손부인이 혀를 차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뜬금없게 받아친다.
“맨날 저렇게 차려입고 다녀요?”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매번 장면이 바뀔 때마다 장만옥 아니 소려진은 그 치파오라고 하나?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원피스의 색과 무늬를 바꿔 입고 나타나는데… 양조위가 연기한 주모운도 좀 그랬던 것 같다. 남자옷이라 티가 덜 났겠지. 뭐 그래서 그런 것들 또한 그 영화가 칭찬받는 꽉 짜인 미장센의 일부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 대한 인상을 한 줄로 정리하면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우아한(절제된) 디자인의 작은 핸드백’ 같다고나 할까? (영화 속에서 핸드백이 중요한 아이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영화의 겉모습에 치중한 인상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게 또 ‘형식미’이라는 이름으로, 마땅히 그 영화의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또 그 미덕을 알아봐야 할 수준 높은 안목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핸드백 속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 (판매용에 걸맞게 텅 비어 있어도?) 그 감독이야 워낙 스타일리스트로서 명성 자자하니 이 영화야말로 그 미학적 스타일의 정점, 일종의 황금비율이 맞춰진 ‘명품영화’라는 것이다.
명품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린다. 그 영화는 문화적 명품 같은 취급을 받는다.
‘형식미’라는 게 비평적으로 찬사받기 좋은 것이고 그래서 찬사 받으려면 그 ‘형식미’가 좀 도드라져야 한다. 정확히는 뛰어나게 도드라져야 찬사 받겠지, 헌데 도드라지고픈 욕심이 지나치다 보면 작품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그런 영화들은 시간이 흐르면 그 아름다움의 얄팍함이 들통나기 쉽다.
<화양연화>가 그런 경우는 아니라고 본다. ‘시간’이 증명해줬다시피… 그래서 그 영화의 아름다움은 다만 아름답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드라져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충분히 내용적으로 또 작품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면모가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주목해서 얘기하자면……
나는 그 영화가 좀 답답하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공간과 인물과 서사의 흐름까지 답답한데 이 모든 것을 표현하는 이 영화의 우아하고 절제된 형식미는 결코 그 답답함을 완화하거나 해소하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가중시킨다. 우아하게 더욱 더 절제하여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우아하게 세련되게 답답하다.
영화 속의 공간은 큼직하게 둘로 나눠 ‘집’과 ‘직장’이다.
양쪽 다 좁아터졌고 좁아터진 벽과 벽 사이에서 타인과 끈질기게 대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양쪽 다 말이다. 직장생활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 좁아터진 집은 다가구주택이라 낮이고 밤이고 주인이나 이웃이나 늙은 하녀나 어깨빵을 주고받으며 억지미소를 지어보여야만 하고… 한 마디로 개인의 사생활이란 위축될 대로 위축된, 그 결과 개인의 밭은 호흡이 거칠어질 법도 한데 그걸 또 이 영화의 우아하게 절제된 형식미가 짓누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집주인과 이웃은 온갖 뒷담화와 소문에 궁시렁궁시렁 나중에 보면 집주인 손부인이 소려진에게 밤늦게 싸돌아다니지 말고 일찍일찍 들어오라며 행실을 훈계하기까지 한다. 보다보다 못한 소려진이 빡쳐서 “야이 씨발년아! 니가 내 엄마야?”라고 받아쳤다면 여태 참아온 숨을 폭발시켜 박장대소라도 터뜨렸겠으나 당연히 그럴 리야 없고(영화는 우아하게 절제해야 하니) 차라리 무슨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 ‘소-데스네’마냥 ‘속내는 철저히 감춘’ 중산층의 세련된 소통양식으로 성숙하게 받아넘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들이 완벽하게 성숙한, 절제된, 우아한 중산층일수만 있다고 생각하는가? 겉은 그럴지라도 속까지 완전할 순 없다. 그들의 내면은 어느 정도 그들을 포위한 완벽한 중산층의 생활양식 즉 스타일과 불화하게끔 되어 있고 그래서 어느 시점이면 미소 띤 얼굴 너머 개인의 마음은 숨 막혀서 뒤질 것 같은 임계점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즉 이 영화 속의 세계는 이 모든 완벽한 스타일(생활양식)을 탈출할 단 하나의 수단 ‘불륜’을 배양하기에 가장 완벽하게 구축되고 묘사되어진 밀실이다. (적절한 밀폐와 적절한 습도…)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이라는 양쪽의 좁아터진 감옥, 그마저도 감옥이라는 비극적 실체조차 드러날 수 없게끔 가장 치밀하게 세심하게 포장된 우아하고 세련된 감옥, 그 양쪽의 사잇길에서 어느 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탈주해 이 ‘완벽한 스타일의 영화적 세계’에 반기를 들어야 했겠으나 그들은 주모운과 소려진이 아닌 그들의 아내, 남편이었고 영화 처음부터 그들은 거의 완벽하게 이 영화에서 벗어난(배제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제적 역할은 스크린 밖에서 스크린 안의 탈주를 유도하고 ‘중매’하는… 더 나아가 이 완벽한 스타일의 스크린에 머물러야 할 주모운과 소려진의 탈주(불륜)을 다시 또 그 스타일 안에서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때 스타일은 중산층의 도덕적감성까지 포함한 생활양식과 영화의 ‘형식미’ 양쪽의 의미인데 사실 그 양쪽은 별개이지 않다. 그리스 시대의 미와 선이 조화로운 美善性에 다름 아니고 이 영화는 그 미선성을 이해하는 우아함과 세련됨으로 관객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기만한다.)
다시 그러므로 주모운과 소려진이 각자의 아내와 남편 즉 남의 불륜, 남불을 이해하려는 그 일종의 ‘역할극’은 너무나도 중요해진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다른 그들의 남불’을 이해한다는 명분이겠으나 영화적으로는 벌써 영화 밖으로 추방된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즉 관객들은 그들의 남불을 이해할 필요가 없거니와 이해하기도 싫을 수 있고…. 그렇다면 역할극은 그들의 불륜이 아닌 ‘나의 로맨스’ 즉 주모운과 소려진의 관계, 내로를 진전시키며 관객들의 도덕적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는 측면이 결코 없지 않은데, 하나 더! 주모운과 소려진의 역할극이 점점 그들의 실제 역할처럼 변모, 그들의 내로가 다른 그들의 남불과 다름없어지는 딜레마 그래서 내로와 남불의 경계를 어지럽히는 측면이야말로 이 역할극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정말 그렇게 관객들에게 ‘작용’하느냐는 것이다. 영화 끝까지.
고상하고 아름다운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한 쌍이 또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로’만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완벽하게 고상하고 아름다운 감옥을 또 완벽하게 배반하는 ‘저속하며 추한 남불’을 오히려 간절하게 꿈꾸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일찌감치 영화에서 추방된 신세다. 영화에 남겨진 주모운과 소려진은 여전히 계속 남아있어야만 하기에(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스타일 안에)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내로남불…
“우리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라고 뒤에 가서 번복하기도 하지만(내로남불이 해체된 것 마냥 보이지만) 머릿속으로만 번복되어 그래 보일 뿐, 관객들 가슴은 여전히 ‘그들과 달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우리’ 즉 주모운과 소려진을 바라본다. 그와 그녀는 이별까지 완벽하게 고상하고 아름답도록 연습하고 그 실패한 역할극마저 스타일을 배반하는 게 아닌 스타일에 부응하게끔 슬프고도 감동적이다. 왜냐면 그와 그녀는 손부인이나 이웃들에게는 괄시받을지언정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미와 선이 완벽하게 결부된) ‘중산층’적 미학의 기준에서는 설득되거나 기만해야하기 때문이다. 손부인이라 한들 영화 밖에서 관객으로 그와 그녀를 바라봤다면 손수건으로 눈물을 꾹꾹 찍어 눌렀을 거라 예상된다.(그러고는 영화 속으로 되돌아와 소려진을 훈계했겠지… 영화 밖의 감상과 속의 훈계는 전혀 모순되지 않은, 오히려 주체로 이입한 내로와 타자로서 이입 못하는 남불, 내로남불이란 하나의 잣대에 의한 것이다. 실로 그 잣대는 감상적인 동시에 배타적이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영화 끝까지, 영화적으로는 선을 넘지 않는다. 어렴풋한 암시정도야 있고 실제 배드신을 찍었는데 끝내 삭제했단 얘기도 있고(당연하지) 그래서 그들은 우아하고 세련(절제)된 이 영화적 세계의 완전무결한 스타일에 끝끝내 충실한 셈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탈주했으나 한 번도 제대로 탈주한 적은 없는 셈이다. 그들은 끝까지 이 모든 아름다운 스타일, 감옥에 갇혀서 그 감옥의 답답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라고 관객들께 감동을 선사한다. 정말 그렇게‘만’ 감동받는다면 나는 그 감동이 결국 내로남불로부터도 한 번도 제대로 탈주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솔직히 의심스러워진다. 왜냐면 결국 그들은 오직 아름답기만 했고 화면 밖 지저분한 그들은 상상할 것조차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남불’을 시야에서 마음에서 완벽히 지워버린 ‘내로’는 이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그 아름다운 ‘내로남불’만으로도 영화 마지막 주모운이 작은 구멍에다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역시 아름다워질 순 있겠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슴 깊숙한 구멍까지 울릴 수 있을지는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의심스럽다. 왜냐면 아름다운 내로남불만으로 호소한 이 영화가 그 작은 구멍에 털어놓을 비밀이란 게 대체 뭐가 남아있다는 말인가? 비밀 따위는 없다. 작은 구멍은 어떤 내밀한 의미조차 담겨있지 않고 이 영화 역시 말 그대로 고급스럽고 우아한(절제된) 디자인의 작은 핸드백에서 그쳐 버린다. 가방 속은 텅 비어있는, 판매용으로만 적합한 명품….
하긴 구멍은 비어있어 구멍일 것이다.
그 구멍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만져지지 않는, 나의 비밀스런 목소리만을 담을 수 있을 텐데…
그러므로 비록 텅 비어있는 가방 속에라도 내 나름 뭔가를 담을 수 있다면 그건 영화 속에 숨겨진 채 나의 주관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는 ‘비밀’일 테고 그러므로 그 비밀은 실체가 없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암묵적인 은유’일 것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마치 간결하고 아담한 단편소설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단순하게 영화의 처음과 끝에 걸쳐 검은 화면, 흰 글귀로 자막이 삽입돼 있었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극중 인물의 과거형 독백으로 들려주는 내레이션과 함께했는데(이 영화만 제외하면, 아니 열혈남아도 없었던 것 같다.) 근데 이 영화의 자막 내레이션도 과거형이긴 하지만 일단 극중 인물이 아니고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서 그와 그녀를 언급한다. 즉 소설의 작가와 꽤 근접한 3인칭의 화자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다음 작품 <2046>에서 주모운이 내내 소설을 쓰며 그 소설 장면이 교차되는 것을 떠올렸고(거기서도 주모운의 독백과 더불어 3인칭의 자막들이 삽입되는데 그 글귀는 소설의 이야기이면서 작가 주모운의 삶을 은유한다.) 그 결과 <화양연화> 자체가 주모운의 소설일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느낌만은 가졌다.
소설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주모운의 각색과 편집, 연출 등 어느 정도 왜곡은 거친 기억이어야만 했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공간과 인물들이 너무나 한정적이라 마치 고급스러운 인형의 집 안을 들여다보는 인상이다. 인형의 집 벽과 벽을 카메라의 눈빛이 스쳐 지나고 이전 벽과 다음 벽 사이의 작은 방, 작은 무대로 화면이 옮겨 다니면서 말이다…. 그 한정된 공간에서 그 한정된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서사 역시 너무나 ‘한정적인데’ 단순하고 전형적이면서 아주 관습적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딱 그 시대의(60년대의) 중산층 독자들이 선호할 법한 관습적인 애정서사이면서 그들의 도덕적감성을 거스르지 않는… 슬며시 우회하여 그들의 은밀한 욕망까지 부응하는 딱 ‘내로남불’의 통속성을 지녔다는 의미다. 그 한정적인 텍스트의 의미를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그와 그녀의 ‘역할극’인데 말했다시피 그 자체로는 내로남불의 경계를 일순간 어지럽히더라도 그 혼란은 관객의 전혀 다른 혼란으로 전이되고 수렴되었다. (저들은 불륜의 피해자로서 동병상련을 나누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니 불륜의 가해자들과 달라, 저들의 사랑은 고상하고 아름다워…) 게다가 그 사랑은 절대 이뤄지지 못해 그와 그녀는 고상하고 아름답게 이별했으니 바로 그 고상하고 아름다운 스타일만 스크린의 여운으로 맴돌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고급스런 통속극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통속극은 통속극이고 핸드백은 핸드백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고급스런(통속적인) 사랑이 인연을 다 하여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마치 이 연애소설의 마지막 문장과도 같은) 자막까지 나왔는데 또 뭔가가 남아있다.
남편도 없이 연인도 없이 예전 그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사는 소려진의 모습. 그리고 또 다른 자막.
1966년 캄보디아
다음의 장면은 극영화가 아니다. 1966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방문한 것을 보여주는 당시의 뉴스클립이다. 당시 캄보디아의 왕자와 왕비가 공항까지 나와 드골을 환대하고 프놈펜의 시민들도 열렬하게 그를 환영한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캄보디아는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그러니까 더 과거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였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아마 캄보디아의 당시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그런 상황이 연출된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뉴스는 바로 다음, 영화의 엔딩씬 캄보디아 앙코르 사원을 방문한 주모운을 안내하는 시대적 맥락이긴 하다. 허나 왜 그런 구체적인 시대적 맥락까지 필요했는지는 다소 뜬금없고 덜 뜬금없어지려면 바로 이전의 그 자막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와도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제작된 1999년의 홍콩까지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시 1999년의 홍콩 또한 1966년의 캄보디아처럼 지나간 그 시절(홍콩반환 이전)을 그리워한다고 빗대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 단순한 비유 ‘우리도 그 시절이 그리워라‘가 전부냐면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 시절이 지나갔고 거기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뭘 가지고 그리워하냐는 것이다. 대체 뭘 가지고 캄보디아 국민은 과거 식민통치를 그리워하며 1999년 홍콩은 1997년 이전 홍콩을 그리워하나? 바로 기억을 통해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기억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을 통해서다.
이 뉴스는 프랑스어, 그러니까 프랑스 인의 목소리를 통해 중계된다. 민족 간 정체성으로 규정하자면 ‘과거의 가해자’가 바라보길 ‘과거의 피해자’가 자신을 반겨주는 광경이 이 뉴스장면인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이제 와서… 마치 더는 그 과거의 가해자가 아닌마냥 마치 과거의 연인이 돌아온 마냥 우리를 이해해주고 환영해주고 거의 사랑해주는… 어떻게 이런 환영(환상)이 가능할까? 수십 년을 지나오며 모종의 ‘집단기억’이 각색, 편집, 연출 등등을 거쳐 ‘왜곡’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왜곡의 논리를 곧장 또 다른 시대적 맥락 ‘반환으로부터 겨우 2년이 지난 홍콩’에 빗대자면 비약적이기도 하고… 여태까지 영화맥락을 건너뛴다는 측면에서는 더욱 비약적이다. 그래서 우선 여태까지의 영화맥락을 다시 반추하여 주모운의 소설이든, 기억이든 아무튼 그의 ‘왜곡의 논리’가 작용했다고 본다면 이 영화에는 주모운과 소려진의 ‘작은 역할극’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자체로서 그와 그녀의 ‘역할극’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모운의 아내가, 소려진의 남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단지 남불을 지워버린 내로, 완벽한 스타일의 내로남불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불’의 그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남불’의 그들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로’ 주모운과 소려진의 또 다른 (저속하고 추한?)모습이기도 했던 셈이다.
좌우가 역전된 거울처럼, 또는 동시에 공존하는 평행세계처럼 이 영화라는 ‘역할극’에서는 주모운과 소려진이 불륜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여서 처음부터 피해자처럼 역할극을 수행하고 그 속에서 또 ‘작은 역할극’을 벌이며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한편 이 영화의 실체 ‘큰 역할극’까지 암시했던 게 아닐까?
혹은 나야말로 지금 비약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비약적인 반추가 이 영화를 처음 본 후로 지금껏 내게 남아있는 끈질긴 여운이며 이 절제되고 한정되어 고상하고 아름답기만 한 스타일, 형식미가 거울처럼 반사되어 돌아오는 끈질긴 ‘은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울과 은유에서
왜 주모운과 소려진은 불륜의 가해자 ‘남불’이면서 피해자인 ‘내로’인 것처럼 역할극하는가? 죄책감과 회한이란 복잡한 심정이겠으나 결과적, 근본적으로는
결국 ‘내로남불’의 벽을 뚫고 싶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의 벽을 ‘뚫고’ 그들의 사랑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불륜의 가해자인 그들의 사랑은 저속하고 추한 ‘남불’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그 시대 중산층의 완벽한 스타일로서나(미와 선이 결합된) 이 시대 관객들이 원하는 완벽한 스타일로서나(역시 미와 선이 결합된) 이해받거나 환영받을 수가 없다. 그들의 사랑이 사랑받을 수 없음은 당연하고 그들의 사랑도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불이 아닌 내로가 되기로 한다. 소설, 기억의 왜곡을 통해서나마 피해자가 되어 그 슬픔을 느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뻔뻔스럽게? 주모운과 소려진의 사랑은 이뤄지길 원한다. 끈질기게… 그들은 다시 또 만나 사랑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들은 그 시대와 이 시대의 완벽할 수밖에 없는 스타일에 머물러 그 완벽한 스타일의 사랑으로만 표현되어져야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로’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또 다시 그들은 고상하고 아름답게 헤어져야만 한다. 또 다시 그들의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마찬가지 슬픔만을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스타일은 지킨 결과 적어도 이해받고 환영받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이해와 환영은 1966년 캄보디아 국민들이 드골 대통령에게 보내는 환호나 박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해는 왜곡, 환영은 환상일 뿐이다. 그와 그녀의 사랑은 온전하게 이해되거나 환영받을 수 없다. 왜곡과 환상 속에서 마찬가지… 슬픔만을 느낄 뿐이다. 허나 그 슬픔만이라도 온전하게 전해진다면 그 슬픔은 끈질긴 여운이 되어 이 모든 왜곡과 환영을 반추하도록 이끌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와 그녀는 또 다른 그와 그녀이기도 한 각각의 1인 2역이다.(작은 역할극뿐만 아니라 큰 역할극에서도) 그와 그녀는 각각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그 말인즉슨 완벽한 피해자일수 없고 완벽한 가해자일수 없다는 얘기다. 또 그 말인즉슨 완벽한 내로일 수도 없고 완벽한 남불일 수도 없다는 얘기가 되기에 남불이란 완벽한 벽 자체가 되지 못해 튕겨 나와 또 내로라는 완벽한 벽 자체도 되지 못해 또 튕겨 나와버린… 그와 그녀의 사랑은 오직 그 좁아터진 ‘벽’과 ‘벽’ 사이를 맴돌고 방황하다 헤어지게 될 서글픈 운명이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마찬가지.
영화는 시각적으로도 ‘벽’과 ‘벽’의 영화이다. 길게 말할 것조차 없을 텐데… 그와 그녀는 공교롭게 같은 날, 같은 벽을 마주보는 옆집과 옆집을 계약했고 또 공교롭게 같은 날, 같은 벽을 사이에 두고 이삿짐을 들여놓았다. 공교롭게(아니 이제 자연스럽게도) 짐꾼들은 그와 그녀의 집을 착각하여 그 착각(왜곡)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벽의 이쪽과 저쪽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착각(왜곡)은 그의 친구가 그가 아닌 그녀의 집에 모자를 놔두고 와서 그녀가 아닌 그의 집으로 찾으러 가겠다는 등… 뿐만 아니라 영화 곳곳 수많은 벽을 넘나들며 수많은 착각(왜곡)들이 부각되어 이 영화라는 착각, 역할극을 시각적, 직관적으로 암시한다. 그래서 그 직관적인 암시조차 모호한 여운으로 맴돌아 그 여운이 슬픔으로 모이고, 그 슬픔을 공유한 수많은 관객들은 설령 명료하게 반추하지 않아도 벽 가운데 ‘먼지 낀 창틀’을 통해 바라보듯 어렴풋이 느낀다. 나는 그 어렴풋한 느낌을 내 나름 반추하고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니 정말 더 길게 늘어놓을 것 없이… 그와 그녀는 벽과 벽 사이서 만나 벽과 벽 사이에서 스치고 거듭 재회한다. 벽의 곁에서 거듭 밀회하고 벽으로 갈라져 상심하다가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은 ‘서로의 비밀스런 기억’만을 남긴 채 이별한다.
반면 수많은 벽들의 그림자로 집어삼켜져 오직 먼지 낀 창틀로서 어렴풋이 볼 수밖에 없는… 서로의 비밀스런 기억만이 간직하는 두 사람 사랑의 실체는 대체 뭐였을까? 아름답고 고상한 내로였을까? 저속하고 추한 남불이었을까? 모르겠다. 양쪽 다였을지도…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니었을 것 같다. 고상함과 아름다움만을 숭배할수록 저속하고 추한 것을 혐오한다. 내 사랑을 고상하게 아름답게만 보려 할수록 남의 사랑은 저속하고 추해진다. 내로와 남불, 그렇게 양극의 벽은 극과 극에서 만나 내로남불이란 하나의 벽, 혹은 밀실 그렇게 한 단어로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단어는 실로 하나의 극단적으로 완벽한 스타일이기에 완벽하면 할수록 벽과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 된다. 주모운과 소려진은 그 완벽한 스타일의 세계에 복종하거나 추방되거나 양극단의 선택만 가능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끝끝내 이뤄지지 못한 완벽할 수 없는 그들 평범한 사랑은 다만 그들 서로의 비밀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들의 사랑, 그 비밀이 평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범함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복잡해서 어중간해지고 어중간해서 평범해 보이는 것이다. 근데 어중간하지 않은 완벽한 숭배, 완벽한 혐오만을 추구하는 미와 선의 완벽한 스타일로서는 허락될 수가 없어서… 그들의 평범한 사랑은 끈질긴 회한으로 남아 가슴속 가장 비밀스런 비밀로 응어리졌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홀로 캄보디아의 앙코르 사원을 찾아온 주모운.
비로소 그 답답한 벽의 세계를 벗어나 맑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도 더 넓고 웅장한 벽과 기둥이 버티고 있으니… 세속의 집착적인 스타일이 있다면 종교 또한 굳건한 스타일이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벽(스타일)에는 속죄와 정화라는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있어 주모운은 꼬마 수도승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그 작은 구멍에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죄와 사랑을 털어놓는다. 비록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한다.
비어있던 작은 구멍에 그의 평범했던 사랑이 세상에는 들리지 않을 독백으로 고백되어진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니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순 있겠으나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글귀가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