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에이터,2000,앙코르,2005,마스터,2012
<글래디에이터> 2000
뭐라뭐라해도 글래디에이터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재밌게 봐왔던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연기적인 면에서 진정 흥미로움과 독창성을 보여준 쪽은 다름아닌 호아킨 피닉스였으니... 그가 맡은 악역 콤무두스가 주인공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투쟁을 진짜 투쟁처럼 보이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막시무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통과 슬픔마저 콤모두스의 삶과 죽음(역시 그만의 고통과 슬픔)에 대비되어 입체적인 정서를 가질 수 있었으리라 본다. 따지고 보면 막시무스가 전형적인 영웅인 것처럼 콤무두스 또한 진부하게 광기어린 악당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호아킨 피닉스는 그 광기에 신선하고 특별한 인간성을 부여했다. 누군가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한다면 막시무스보다는 콤무두스의 비극을 더욱 생생하게 재발견할지 모른다.
<앙코르> 2005
이 영화의 여주인공 준 카터 역을 맡은 리즈 위더스푼이 당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획득했다고 한다. 다른 주인공 조니 캐시 역을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는 후보에만 머물렀고 말이다. 대체 왜일까? 그때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 경쟁이 상대적으로 시시했던 탓일까? <앙코르>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별로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녀는 잘했다. 잘했는데 그녀 말고 또 잘하는 여배우가 준 카터를 맡았더라도 <앙코르>는 충분히 성립되는 영화다.(내 의견으로는) 하지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호아킨 피닉스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자니 캐시를 연기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보면 알 것이다. 상상이 잘 안된다. 머리속으로 그려지지가 않는다. 그만큼 이 영화는 호아킨 피닉스가 노래부르고 절망하고 발버둥치는 바로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니 캐쉬가 온 화면의 에너지를 끌고가는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자니 캐쉬에 대한 호아킨 피닉스의 해석과 창조가 곧 이 영화의 창조이자 해석이다. 혹시 영화 속 리즈 위더스폰에 대한 호아킨 피닉스의 집착이 너무 절절하게 전해져 당시 심사위원들마저 그녀에게 집착했던 게 아닐까? 개인적인 추측 또는 망상이다.
<마스터> 2012
누군가는 이 영화가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화형식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딱히 난해할 게 없는 영화이고 난해하다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프레디라는 인물 그 자체일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프레디는 사실 그런데, 한편으로 명료하고 단순한 인물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왜냐면 그는 혼돈과 부조리로 가득찬 이 세계를(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나름 솔직하게 정직하게... 그를 제외한 우리로서는 그처럼 날것의 세상을 응시할 수 없다. 절대 그래서도 안되기에 정작 프레디라는 인물이 복잡하고 기괴하게 보여진다. (그의 시선에서는 우리야말로 기이해 보일 것이다.) 왜? 우린 이 세계에 적응해야 하니까. 적응해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이 세계를 규정하거나 이미 규정된 질서를 받아들여 때로 잘 안 받아들여지더라도 대충 타협해야지 안 그러면 그 혼돈과 부조리와 자기모순과 타인의 모순에 절망하고 좌절해 이 사회에서 낙오해버리고 말테니까... 프레디는 그러나 그러기가 싫다는 거다. 낙오해도, 도태되어서 야만스런 원시인처럼 취급받을지언정 자긴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법이든 도덕이든 종교든, 무슨 종교든 무슨 사이비종교든 간에 저마다 모순이 없을 수 없고 가식과 포장이 없을 수가 없는데 최소한 그런 온갖 시스템을 진심으로 믿는 것인양 흉내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결연한 의지라기보다 다만 천성일 수 있고 꼭 그렇게해야 할 목적 자체를 상실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코즈라는 신흥종교단체?를 이끄는 랭케스터(필립 시무어 호프만) 같은 작자야말로 프레디에게 있어선 가장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인물이지 않을까? 정말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그를 따라나서냐면, 그 이상한 최면요법? 프로세싱이란 걸 통해서나마 프레디는 자신이란 모순투성이 인간과 그 속내를 랭케스터에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프레디는 프로세싱이란 절차를 믿은 게 아니다. 단지 그걸 통해서 오고 간 감정과 진심의 교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대화를 믿은 것이다. 즉 프레디는 랭케스터를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랭케스터는 그 나름 확신하는 방식으로 프레디를 컨트롤하려 시도한다. 프레디는 랭케스터의 컨트롤에 응한다. 왜 친구이니까. 랭케스터는? 랭케스터는 정녕 자기 방식을 100% 확신하는가? 그렇지 않다. 랭케스터는 정녕 프레디를 길들일 수 있다고 100% 자신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사실은 랭케스터 역시도 상관없는 것이다. 사실은 랭케스터도 프레디가 코즈를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이란 모순투성이 인간 실체를 눈치까고 그 자체로 포용해준다는 사실을 눈치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랭케스터에게도 프레디의 존재는 결국 친구인 것이다.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유일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부조리한 자신을 부조리하게 받아들여주는 친구 말이다. 그럼 왜 쓰잘 데 없이 프레디를 길들이려고 애쓸까? 길들여야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코즈의 수장일지언정 랭케스터 역시 그 '우리' 안에 속한 존재이고 스스로가 정한 룰일지라도 스스로도 따라야만 하며 실은 그 자신조차 아내 페기(에밀리 아담스)의 컨트롤에 의존하거나 복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내 우리라는 '우리'를 탈출한 프레디를 끝끝내 또 불러들여 제발 내 곁에 남아있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결국 너와 내가 친구일 따름일지라도 함께있기 위해서는 우리(동물 우리이든 인간의 우리이든)속의 우리같은 양처럼 울음소리 시늉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페기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이 앞에서 니가 고개를 숙이며 거짓맹세라도 해줘야 한다고 말이다. 프레디는 랭케스터를 좋아하지만 더 이상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작별한다. 영원히.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얘기하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프레디에 대해서 마구 떠들어버렸다. 뭐 그럴수 밖에 없는 게 이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와 프레디를 어떻게 따로 떼놓을 수 있을까? 그게 그거고 그가 곧 그이다. <마스터>는 극영화를 초월한 아방가르드한 무엇이 아니다. 다만 평범한 극영화로서 도달할 수 있는 인간성의 깊이, 그 극단을 추구한 결과이다. 그 극단적인 인간, 프레디가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사적으로도 특별한 아웃사이더일 수 있겠지만 잘 살펴보면 우리들 누구나의 깊은 언저리에 간직된 저마다의 흔적이다. 뭐랄까... 우리가 떠나와야 했던 서글픈 프로토타입일 수도 있다. 그만큼 특별한지만 또 보편적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감명깊게 본 사람이라면 언젠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랭케스터가 프레디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배우 호아킨 피닉스도 앞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언젠가는 프레디에 대한 그리움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열정어린 연기를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