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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Feb 22. 2021

<차이나타운>의 별 것 아닌 장면

로만 폴란스키,1974


 이병헌이 모히또, 몰디브보다 더 열심히 언급했던 그 영화에 대해서라면

 연출, 음악, 연기할 것 없이 다 훌륭하지만

 역시나 다시 볼수록 확인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완벽한 각본이다. 


 그래서 나도 그 영화의 별 것 아닌 한 장면만 언급해 보기로 한다. 

 혹시나 영화 안 본 사람이 읽을지 모르니 초반 15~20분의 내용이 포함되어있음을 먼저 언급해놓고서 말이다.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제이크가 이발소에서 면도를 받는 이 장면은 1분 남짓한 짧은 씬이다. 

 제이크는 1930년대 LA의 사립탐정인데 거의 불륜 뒷조사를 도맡아 돈벌이를 한다. 그는 멀웨이 부인이라는 여자에게서 그녀의 남편 홀리스 멀웨이의 외도사실을 알아봐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래서 어찌저찌 미행을 한 끝에 제이크는 홀리스 멀웨이가 새파랗게 어린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몰래 사진 찍었고... 거기까지가 이 장면 직전의 씬이었던 것이다. 

 이발소 의자에 앉은 제이크는 본인이 찍은 홀리스 멀웨이의 사진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사진을 멀웨이 부인에게 전달했을지언정 사립탐정인 그가 의뢰인의 정보를 신문사에 퍼뜨렸을 리는 없다. 고로 이상하게 여기는 제이크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 짤막한 씬의 주요기능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제이크가 찍은 홀리스 멀웨이의 외도사진이 영문 모르게 신문에 나서 스캔들화 되어버렸다.'라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 씬은 이전 사건과 다음 사건을 잇는 다리 역할을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굳이 이발소에서 씬을 구성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제이크의 사무실에서 부하직원들과 간단한 대화를 통해 그 정보를 드러내고 바로 그 장소에서 다음 사건을 맞이하는 것도 가능했을 터다. 

 헌데 그랬다면 조금 인위적으로 느껴졌겠지(사실 '인위'가 맞고 그랬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이발소라는 장소로 씬을 떼내어 따로 구성했다는 것은 '보다 자연스럽게 그 정보를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그 기본역할에 보다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레이어를 쌓겠다는 의도라 볼 수 있다. 


 제이크가 얼굴에 면도크림을 바른 채 앉아있는 바로 옆에는 또 다른 손님, 뚱뚱한 중년남자가 앉아있다. 그도 제이크와 같은 신문을 보았는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사실은 들으라는 듯이 제이크를 힐난하는 투다. 즉 남의 사생활이나 캐서 돈벌이하는 사립탐정을 은근히 경멸하는 것이다. 발끈한 제이크가 그러는 당신은 뭔 일로 돈벌이를 하냐고 따지자 그 중년남자는 은행의 저당부에 있다고 대꾸한다. 그럼 그 은행에서 몇 집이나 파산시켰냐고 제이크가 또 따지자 중년남자는 적어도 당신처럼 신문에 남의 가정사를 폭로하지는 않는다고 대꾸하고 여기에 빡친 제이크가 그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이 씬의 중요정보를 훨씬 극적으로 또 자연스럽게 그리고 선명하게 관객들 인상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흥분한 제이크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중년남자에게 달려든다. 이는 제이크의 저돌적인 기질을 표현함과 동시에 이 장면 전까지 퍽 점잖게 유쾌하게 자신의 그 '돈벌이'에 임해왔던 그의 태도와 상반되는 모습이다. 즉 제이크는 그 전까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어도 실은 자신의 돈벌이를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던 것이고 그 결과 여기서 그의 자격지심이 돌출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다. 

 제이크와 중년남자, 어쨌든 이 둘은 각자 돈벌이를 위해 타인의 삶을 파괴할 가능성을 감수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차이나타운>의 세계라는 것이 알고보면 저마다 이익추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떠올린다면 지금 이 이발소에서 이 두 남자가 벌이는 언쟁은 아이러니컬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서로는 서로가 더 더럽다며 너보다는 내가 깨끗하다며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다툼은 이 영화 속 세계(또는 이 시대)의 위선적인 분위기를 아이러니컬하게 암시하는 셈이다. 

 흥분한 제이크를 이발사가 뜯어말린다. 이발사는 제이크를 도로 의자에 앉히고 그를 달래기 위해 '중국식의 섹스요령?'이라는 농담을 들려준다. 바로 이 이상한 농담, 음담패설과 함께 해당 씬에서 다음 씬으로 바뀐다. 몰라보게 다시 기분이 좋아진 제이크는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그 중국식 섹스요령을 부하직원들에게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직원들이 눈치를 주지만 제이크는 눈치채지 못하고 제이크의 등 뒤에서 멀웨이 부인이 등장한다. 가짜가 아닌 진짜 멀웨이 부인이 말이다.

 여기까지 '이발소 장면'을 통해 드러난 씬의 여러 기능, 맥락을 정리해 본다면

 1. 신문지상에 폭로된 홀리스 멀웨이의 사진은 제이크의 소행이 아니었음을 자연스럽게 극적으로 전달.  

 2. 제이크의 저돌적 기질과 함께 여태까지 포장된 그의 태도와 다른 그의 자격지심, 캐릭터의 이면을 표현. 

 3. 이익추구를 위해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만 죄의식을 전가하는 위선적인 세계를 암시.

 그리고 

 4. '중국식 섹스요령'이라는 농담으로 유연하게 씬을 전환하면서 또 그 음담패설 덕분에 극적으로 조우하는 제이크와 (진짜) 멀웨이 부인

 그런데 4번의 '중국식 섹스'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스럽고 희극적으로 씬과 씬을 연결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1번부터 3번까지의 맥락을 유기적으로 쌓아올려 '가짜=>진짜' 라는 컨셉 아래 다음 씬 진짜 멀웨이 부인의 등장마저 더 깊고 폭넓은 맥락을 지닌 극적반전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위 장면은 이발소 씬에 앞서 등장한, 즉 처음으로 나타난 멀웨이 부인을 제이크가 만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때 멀웨이 부인은 진짜가 아닌 가짜다. (모종의 이유로 모종의 지시를 받은) 멀웨이부인 행세를 하는 여자가 찾아와서 제이크에게 홀리스 멀웨이의 외도를 조사해달라고 의뢰하는 것이다. 물론 제이크는 암것도 모른다. 제이크는 이 여자가 멀웨이 부인이라고 믿는다. 그럼 제이크는 상대의 연기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쪽이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제이크도 나름 직업적인? 연기를 펼친다. 처음에 그는 가짜 멀웨이 부인의 의뢰를 점잖게 거절하는 '척'한다. 진정 사랑한다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언뜻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 같지만 따지고보면 겨우 그런 말에 여기까지 의심을 가득 품고 찾아온 의뢰인이 네, 알겠어요 돌아갈 리 없다. 나중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봐, 혹 충격받은 의뢰인이 진상이라도 부릴까봐 미리 밑밥을 깔아두는 직업적인 요령, 일종의 연기에 가깝다. 결국 그는 못 이긴 척 의뢰를 받아들인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연기에 자신이 속아넘어가 자신은 나름 정당하게 돈을 버는 산뜻한 존재라고 믿고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결국 '포즈'에 지나지 않고 그저 내가 바라보고 싶은 나 '자기포장'인 것이다. 

 

 

 앞서 말했던 이발소 씬의 바로 다음 장면

 이제 제이크는 두 번째로 멀웨이 부인을 만나게 된다. 아니다. 다시 또 처음으로 진짜 멀웨이 부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진짜 멀웨이 부인이 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고 물론 가짜 멀웨이 부인에게 속았다는 것도 여전히 모른 채 그냥 신이 나서 부하직원에게 '중국식 섹스요령'을 떠들어대고 있다. 음담패설에 지나지 않은 얘기에 당황한 직원들은 웃지도 못하는데(그들은 제이크의 등 뒤를 볼 수 있으니) 제이크만 천박하게?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니까 앞선 이발소 씬에서 본인이 신문사에 사진을 제보했다는 거짓에 반박하려 한 제이크는 그 반박속의 격앙된 태도로서 자기 직업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셈이 되버렸고 또 그 속내를 본인 스스로 감추려는 '중국식 섹스'를 다음 씬까지 끌고들어와 두 번째이자 실은 첫 번째인 의뢰인과의 만남에서 점잖고 인간적인 연기, 포장이 아닌 천박하고 경박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인 셈이 되었다. 가짜에서 진짜로 또 가짜에서 진짜로 그리고 등 뒤에서 급습당해 가짜가 아닌 진짜 멀웨이 부인과 마주치게 된 제이크는 여태까지 조사가 실체가 아닌 가짜였음을 깨닫고 진짜가 뭔지 찾아헤매게 될 것이다. 첫만남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로 까발려진 쪽은 제이크였지만 앞으로는 제이크가 끊임없이 멀웨이 부인을 의심하며 그녀의 가짜가 아닌 진짜를 파고들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이 영화 <차이나타운>의 세계 자체가 거대한 가짜로 뒤덮인 위선과 날조, 오해와 왜곡에 지나지 않았음을 발견하여 그 추악하고도 슬픈 진짜에 다가가게 될 것이다. 


 1~2분에 지나지 않은 이발소 장면 자체는 정말 별 것 아닌 장면일 수 있다. 거기에 담긴 디테일한 맥락들도 말 그대로 지엽적일 수 있을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그 디테일하고 지엽적인 실들이 결코 끊김없이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모여서 이 영화 전체를 떠받치는 가장 깊은 우물까지 닿는다는 점이다. 견고한 밧줄이 되어 진실을 끌어올릴 것이다.

 이런 한 두 장면에서도 발견되는 특징들 덕분에 <차이나타운>이 하드보일드 장르로서 그 이상의, 한 시대나 한 세계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영화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그것말고도 이 영화에는 또 다른 매력이 숨겨져 있다. HORROR라고 해야할까? 흔히 생각되는 호러는 아니고 UNCANNY에 가까운 무엇이 사막같은 이 영화에 검은 실핏줄처럼 흐르는데 아무래도 그건 각본을 넘어 감독의 연출 방향성이 영향끼친 결과일 것 같다. 그 부분도 영화 이미지 몇 개를 들어 다룰 순 있겠으나 부분이 아닌 정말 전체를 건드릴 수밖에 없기에 스포일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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