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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Mar 07. 2021

<페르소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잉마르 베리만, 1966


1. 내가 당신에게 "당신은 좀 가식적인 것 같아."라고 비난했다 치자. 


2. 만약 당신이 정말 '난 좀 가식적인 게 아닐까?'라는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나의 비난은 정말 당신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3. 당신은 점점 더 그와 같은 고민에 깊이 빠져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이 가식이고 연기고 우스꽝스러운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며 괴로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괴로움은 당신 자신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그렇게 의심하는 한 당신을 둘러싼 타인들도 그렇게 의심스러워질 수 있다. 당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식이고 연기고 우스꽝스러운 가면에 지나지 않을텐데 당신 아닌 그들은 괴로워하지조차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더욱 괴로워진다. 


4. 드디어 이 모든 거짓을 중단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당신은 홀로 거울앞에 선다. 놀랍게도 당신의 얼굴, 당신 스스로 가면이라 의심했던 껍데기의 둘레에는 나사들이 박혀있었다. 당신은 이마의 선과 턱선을 따라 하나씩 나사를 푼다. 모든 나사를 풀어내고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5. 가면 뒤에는 뭐가 있을까?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면? 오직 無였다면. 가면을 벗고나니 아무것도 없는 그저 텅 빈 얼굴로 거울 속의 텅 빈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면, 無가 無를 응시할 수밖에 없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당신이 찾아헤맨 진실이었다면...


6. 없긴 왜 없어? 가면 뒤에는 머리가 있잖아. 머리 속에는 생각이 있잖아, 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너(나)의 가식과 연기와 거짓이란 결국 머릿속 생각을 솔직하게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허나 정말 그럴까? 말과 행동이 '표현'이라면 생각도 일종의 '표현'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말하고 당신 스스로 대답하며 이어지는 monologue(독백) 혹은 나와 나의 dialogue(대화)이기도 하다. 


7. 잉마르 베리만이 썩 좋아하지 않았다는 고다르의 영화들 중 한 편에도 이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비브르 사 비>속 창녀 나나는 카페에서 늙은 철학자와 동석하여 대화를 나눈다. 나나는 늙은 철학자에게 질문한다. 생각과 말은 같은 거냐고? 철학자는 그럴 거라고 대꾸했다. 생각과 그걸 표현하는 말을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말이다. 내가 덧붙이자면 생각 자체를 의식하고 인식하려 할수록 말의 논리형식으로 완성되어진다. 비록 내 머리속, 내 마음속이라 한들 전혀 표현되지 않은 걸 어떻게 내가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을까? 다소 불분명한 심상으로 남겨둘지라도 말의 논리형식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말은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자의 존재에 있어서조차 이토록 깊숙하게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나 오류와 왜곡과 거짓의 가능성을(자유를) 지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일체의 표현, 말을 용납하지 않는 침묵에 닿으려고 한다면 그 침묵은 진짜 침묵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즉 죽음 말이다. 오직 순수한 無가 되어서만 오직 순수한 無를 응시할 수 있다. 


8. 퍽 일상적으로 시작해 퍽 사변적으로 발전하는 이런 얘기를 깔아놓은 까닭은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접근하는 데 있어 뭔가 필요한 태도이지 않을까란 생각에서였다. 영화와 관객이 기본적으로, 꽤 근원적인 또 보편적인 문제의식의 단서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럼 그 대단한 명성, 권위를 겉 핥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그 영화를 우리 자신의 내밀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수월해질 것 같다. 사실 그것만 강조해도 충분할 것이다. 영화는 대개, 오히려 깊은 영화일수록 관객에게 난 벌써 답을 아니까 문제를 풀어보라는 식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 깊은 영화가 다루는 고민은 쉽게 답해질 수 없는 깊은 고민이기에 관객에 함께 질문을 공유하면서 나란히 함께 방황하기를 바라는 쪽에 더 가깝다.   


9. <페르소나>의 오프닝 시퀀스는 유명하다. 그 강렬한 몽타주는 처음 목격하는 관객이 쉽게 말로 정리할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전달되는 이미지의 몇 가지 성격들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최근에 다시 봤으니 내 나름 말로 정리해본다면, 일단 영사기와 필름 같은, 영화 자체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마치 이 영화도 영화라는 표현이고 일종의 페르소나라고 관객에게 각성시켜주는 듯 하다. 이런 각성은 영화 중간과 영화 끝에 가서도 관객에게 유도되어진다. 


10. 그리고 SEX에 대한 이미지들이 있다. 지금 언뜻 치솟은? 성기 한컷만 떠오르는데 것 말고도 성적은유를 담은 컷들이 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 도살당하는 양의 눈동자...  죽음의 이미지는 몽타주 이후에도, 영화 전반적으로도 다양하고 가장 강력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이란 완벽한 침묵, 절대적인 진실이다. 거짓된 삶에 회의하는 자의 시선으로는 그 불타오르는 베트남 승려의 뉴스영상이 두려우면서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11. 종교적인 이미지도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람의 손, 아니 사람의 몸으로 고통받은 신이겠지? 어쨌든 내게는 그 이미지가 섹스와 죽음의 합성?처럼 느껴졌다. 내가 꼭 변태라서 그렇게 느낀 아니라... 나도 그것만 따로 떼 놓고 봤다면 함부로 신성모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몽타주의 일부로서 앞선 이미지, 섹스와 죽음과 또 꿈틀거리는 거미(꿈틀거리는 손과 왠지 닮아보이는) 덕분에 살과 뼈로 이루어진 손바닥 정중앙에 대못이 박혀 꿰뚫린 구멍으로 음부의 피처럼 흘러내리는... 말해놓고 보니 결국 변태같은데 뭐 어쩔 수 없다. 


12. 하지만 내가 또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몽타주 다음에 등장하는 '소년'이다. 시체처럼 잠들어 있다가 문득 깨어나 어머니의 거대한 얼굴'들'을 찾아 더듬는 그 소년 말이다. 소년은 영화 내러티브에서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는다. 암시되거나 추측될 순 있겠지만 차라리 내러티브 바깥에 머무른다는 인상이 짙다. 그러니까 그 소년은 왠지 작가의 자기반영적인 이미지일 것 같다. 난 가급적 작가 개인보다는 관객 개인의 사적 경험으로 영화를 당겨오고 싶어하지만, 이 영화 자체가 '영화라는 작가의 페르소나'를 자의식하고 그렇게 표현하다보니 말이다. 그렇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영화의 도입에서 한 소년이 모성의 페르소나를 찾아 방황하는 그 장면을 (설령 작가의 자기반영일지라도) 또 관객의 자기반영으로 공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모성의 진정한 얼굴을 찾아해맨 적이 있을까? 혹은 모성 자체를 갈구하거나 반대로 의심해 본 적은 있을까? 앞선 몽타주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말로 정리되지 않을지언정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이 영화를 바라보는 다층적인 단서들을 각인시킨다. 여성성에 대한 고민으로, 영화에 대한 고민으로, 표현되거나 표현되지 않은 것 고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죽음 등 다양한 프레임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소년이 모성의 페르소나'들'을 더듬는 과정은 관객이 영화와 더불어 거쳐야만 할 것이다. 


13. 배우 엘리자벳은 문득 연기를 중단했다. 또 말하기를 중단했다. 아무것도 더 이상은 표현하길 원치 않았고 완벽한 침묵, 죽음처럼 미동없는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지만 끝내 눈을 깜빡이고 호흡을 몰아쉴 수밖에 없는 병원의 환자가 되었다. 그런 그녀를 상담하는 의사의 말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를 기본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알려준다. 그 관점이란 내가 1~7번에서 얘기한 내용과 대충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엘리자벳은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가식적이라고 비난한 것만으로 당신이 깊은 괴로움에 빠져들지는 않듯 우선 당신 스스로 깊은 괴로움에 빠져든 중대한 계기가 있어야만 한다. 영화 속에서도 알마가 엘리자벳에게 비슷한 비난을 가하는데 우선 엘리자벳 스스로 그 비난이 자극하는 그녀 내면의 상처가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 상처의 깊이를 파고들어, 페르소나 이면의 페르소나에 가까워지는 이 영화의 과정은 허나 엘리자벳의 변화로 견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아니라 다른 그녀, 엘리자벳을 간호하는 알마의 변화로 이뤄진다. 


14. 바닷가 둘 만의 별장에서 알마는 말하고 엘리자벳은 듣는다. 알마는 계속해서 떠들고 엘리자벳은 묵묵히 경청한다. 그러므로 두 여자의 dialogue(대화)는 한 여자의 monologue(독백)가 되어버린다. 두 사람 사이 오고가는 대화가 되었어야 할 말은 한 사람이 점점 자기 내면을 파고드는 '생각의 말'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알마가 엘리자벳에게 떠들어대는 장면들의 연쇄는 장면 사이사이 다소의 비약이 생겨난다. 그 비약은 알마의 페르소나가 또 다른 페르소나, 그녀의 더 깊은 페르소나로 변화하면서 비롯되는 비약이다. 일례를 들어 앞선 장면에서 알마는 지금의 남친에게 충실하다고 말했지만 다음 장면 둘 만의 침실에서 알마는 과거 여기와 다른 해변에서 낯선 여자와 낯선 남자들과 함께 난교를 벌인 일화를 털어놓는다. 알마는 그때의 쾌락이 남친과의 섹스에서 얻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말한다. 엘리자벳은 여전히 말이 없지만 그녀의 표정과 눈빛은 강렬하게 알마의 고백에 반응하고 동요한다. 


15. 말하는 알마의 페르소나가 변화하면서 점점 말하지 않는 엘리자벳의 페르소나에 가까워진다. 


16. 한편 그것은 영화와 관객 or 배우와 관객의 입장이 역전된 장면들이기도 하다. 엘리자벳은 이제 연기하지 않는다. 엘리자벳의 관객이었던 알마는 이제 엘리자벳 앞에서 신이 나서 다채로운 자신의 모습을 연기한다. (연기는 단지 가짜가 아니다. 연기는 가짜를 통해 진짜를 드러내는 다양한 층위이며 고로 우리 모두 연기하며 연기할 수밖에 없다.) 배우였던 엘리자벳은 알마를 구경하고 감상한다. 심지어 극장을 빠져나온 관객이 배우 뒷담화하듯 알마에 대한 평가와 뒷담화를 편지에 기록한다. 그 편지는 알마에게 들통난다. 알마는 상처받고 분개한다. 그런데 알마가 상처받고 분개했다면 그 역시 엘리자벳이 배우로서 먼저 경험해봤을 것이다. 알마는 과거에 관객으로서 엘리자벳을 평가하거나 뒷담화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두 여자는 서로 닮아가고 있다. 두 여자는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갈등하고 반목한다. 침묵하는 자는 말하는 자를 관찰하고 평가하며 그것에 화가 난 말하는 자는 침묵하는 자에게 보복하려 든다. 


17. 침묵하는 나는 말하는 나를 관찰하고 평가하며 그것에 화가 난 말하는 나는 침묵하는 나에게 보복하려고 든다. 


18.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진다는 게 단지 서로 좋아하게 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동시에 또 미워지는 게 '보통'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모습이다. 어지간히 해탈한 승려라면 몰라도 어지간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 앞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화해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타인과 관계에서 가까워질수록 자기 내면의 갈등과 화해를 자기 바깥, 그 타인과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해로 재현하기도 한다. 가끔은 소름끼치도록 자기 안의 관계와 자기 바깥의 관계과 서로 닮아있다. 


19. 그러니까 영화가 진행되며 알마와 엘리자벳이 서로 누가 누군지 헷갈려지는 양상은 초현실적이지만 또 현실적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알마는 계속 말하고 엘리자벳은 계속 침묵한다. 알마는 말하는 엘리자벳이다. 엘리자벳은 침묵하는 알마다. 엘리자벳의 남편이 방문했을 때 엘리자벳 대신 알마가 그 남편과 말을 나눈다. 남편과 아들을 걱정하고 사랑하고 그들에게 돌아가겠다는 알마(엘리자벳)의 말을... 말하지 않는 엘리자벳은 싸늘한 침묵으로 관찰한다. 엘리자벳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엘리자벳,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가식이고 엉성한 연기이며 가짜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녀이면서 또 다른 그녀처럼 괴리되어 있다. 엘리자벳은 엘리자벳을 의심한다. 


20. 왜일까? 이유는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절정이랄 수 있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말하는 자의 말과 침묵하는 자의 침묵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두 번이나 반복해서 영화에서 보여줬는데 내가 세 번째로 말해야 할까? 사실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긴 하다. 사실 그 장면 때문에 이 글을 쓴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그 장면은 비단 이 영화 뿐 아니라 이 영화로부터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의 영화들, 오늘 이 시대와 관련해서도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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