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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인언니 Aug 28. 2024

유럽의 와인 메이커, 새로운 땅에 꿈을 심다

찰스 크루그(Charles Krug) 이야기


나파밸리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와인 생산지가  것은 유럽 이민자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파밸리에 최초로 상업 와이너리를 만든 찰스 크루그(Charles Krug), 인 양조에 있어 최고의  권위자로 여겨지는 안드레 첼리스체프(Andre Tchelistcheff),  와이너리 투어와 시음 문화를 정착시키고 ‘오퍼스원’이라는 최고급 와인을 만들어낸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그 유명한 ‘파리의 심판’의 주인공인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 그리고 워런 위니아스키(Warren Winiarski)까지..  나파밸리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럽에서 건너왔네요? 


이들은 왜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그 배경에는 바로 골드러시(Gold-Rush)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나파밸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어요. 기름진 땅과 따뜻한 날씨 덕분에 농사를 짓기 무척 좋은 곳이었죠. 이 지역 사람들은 주로 곡식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기르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간혹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만들기도 했는데, 판매용이 아닌 가정에서 직접 마시기 위한 와인이었.


그러던 어느 날, 새크라멘토 강가에서 반짝이는 금조각이 발견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인구 이동골드러시가 시작됩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고, 이는 나파밸리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어요.



금을 채굴하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자, 그들을 위한 호텔, 레스토랑 등도 계속 들어섰습니다. 도시는 점점 더 커졌고, 지역 경제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했어요. 게다가 골드러시는 단순히 금을 찾는 사람들만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와인 메이커들도 이 새로운 기회의 땅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3가지나 있었거든요.


첫 번째, 이상적인 연환경 

나파밸리는 포도를 재배하기 무척 좋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어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해, 포도가 천천히 익으면서 복합적인 풍미를 발달시킬 수 있었지요. 모래, 점토, 자갈 등 다양한 토양 덕분에 여러 품종의 포도를 키울 수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주요 와인 생산지와 거의 비슷경이다 보니 유럽의 와인메이커들은 '여기서라면 분명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나파밸리의 땅은 저렴한 편이어서 비교적 넓은 포도밭을  수 있었어요!


두 번째, 골드러시로 인한 수요 증가

골드러시로 막대한 부를 얻은 캘리포니아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이들 사이에서 고급 와인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 출신 와인메이커들에게는 캘리포니아가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보였어요.


세 번째, 유럽의 불안한 상황

많은 이민자들이 나파밸리로 이주한 이유 중 하나는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 때문이었어요.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전쟁, 나폴레옹 전쟁,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 산업 혁명 등.. 19세기 유럽은 많은 혼란과 불안정 속에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나파밸리 와인의 아버지가 된 언론인


찰스 크루그는 나파밸리에 최초의 상업용 와이너리를 설립한 초기 이민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와인을 만들려고 이주해 온 것은 아니었어요.


찰스 크루그는 1847년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고, 처음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어요. 그의 직장은 독일계 미국인들을 위한 신문사였는데 지역 사회에  소식을 전하고, 이민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이민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게 되었고, 캘리포니아 지역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나파밸리의 토양과 기후가 포도를 재배하기 굉장히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와인 양조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나파밸리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포도밭을 운영하며 와인 양조에 대한 경험을 쌓았요.

 

결혼은 나의 행운, 본격 와인 메이킹 시작!


조지 C. 욘트와 그가 소유한 Caymus Rancho


그러던 중, 그는 결혼을 통해 로또를 맞게 됩니다!  크루그가 결혼한 캐롤리나 베일(Carolina Bale)은 나파밸리에서 최초로 포도 재배한 조지 C. 욘트(George C. Yount)의 손녀였어요. (*현재의 욘트빌(Yountville)이라는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녀는 할아버지에게서 거대한 포도밭을 물려받았는데, 그게 무려 12,000 에이커(약 1,470만 평)이나 되지 뭐예요? 이로 인해 크루그는 본격적으로 와인 메이킹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61년에 그의 이름을 딴 ‘찰스 크루그’ 와이너리가 설립니다. 나파밸리 최초의 상업 와이너리였어요. 그는 압착기와 발효 탱크 등 현대적인 장비를 도입하고, 프랑스 오크통을 사용해 와인을 숙성시켰습니다. 프랑스오크통을 사용한 것은 당시 나파밸리에서 큰 혁신이었어요.


프랑스산 오크는 결이 고운 편이고, 와인에 미묘한 풍미를 더해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미국산 오크는 프랑스산 오크에 비해 결이 굵고, 코코넛, 바닐라 등 더 강한 향과 맛을 와인에 더해줍니다.



크루그는 이러한 미국산 오크통 대신 더 섬세한 풍미를 제공하는 프랑스 오크통을 사용해 와인의 품질을 한층 더 높였어요.


그리고 이 것은 단순히 새로운 재료를 도입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와인메이커들은 대부 미국산 오크통을 사용했어요. 프랑스산 오크통을 수입해서 사용하는 것은 비용 면에서 무척 부담이 컸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는 와인의 품질을 우선시했고, 더 고급스러운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프랑스산 오크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나파밸리 와인이 고급 와인 생산지로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업적은, 와인 시음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거예요. 나파밸리 최초로 와이너리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고, 이는 오늘날 나파밸리 와이너리 관광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문화를 대중화시킨 것이 훗날 찰스 크루그 와이너리를 매입한 로버트 몬다비예요.)


그는 미국 와인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아쉽게도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어요. 1860년대는 미국 와인 산업이 초기 단계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와인에 대한 수요가 지 않았고, 대부분 지역 내에서 소비되었어요. '찰스 크루그'는 나파밸리 지역에서 중요한 와이너리로 자리 잡았지만, 대규모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에는 아직 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현재 340억 달러(44조 원) 규모인 나파밸리의 와인 산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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