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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연 May 31. 2017

운명 서사에 대한 불편함


다큐멘터리 <댄서>의 천재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은 이른 나이에 영국 왕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됐지만 내면의 고뇌가 깊다. 본인 의지로 선택한 길이 아니라는 번민, 재능이 큰 나머지 모든 것에 빨리 질리는 괴로움…문신과 마약에 빠진 그는 은퇴를 결심한다. 하와이의 텅 빈 집에서 팝가수 Hozier의 음악에 맞춰 마지막 안무를 녹화한다. 그런데 은퇴식이 돼야했을 춤이 오히려 그를 춤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도록 만든다. 춤 영상이 유튜브에서 19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다시 무대로 돌아오고 다큐멘터리는 끝난다. 비범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자장을 강하게 암시하면서. 


Hozier의 'Take me to the church'에 맞춰 춤 추는 세르게이 폴루닌

운명을 거스르려는 행동조차 운명을 만들어버렸다는 ‘운명 서사’는 울림이 강력하다. 자신의 눈을 찔러 버린 오이디푸스 이래로 운명에 결박된 자들은 넘쳐났다. 특히 뛰어난 인물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를 설명할 때 운명이라는 알리바이는 손쉽게 호명된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보다가 1회 선두 타자가 2루타를 치는 것을 보고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운명적 결심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운명 서사의 수혜자(?)다. ‘당신(노무현)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이 구절은 책 <운명>의 셀링포인트이자, 그를 정치로 끌어들인 강력한 방아쇠였다. 


문제는 사회 전반에서 운명 서사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기업의 자기소개서가 대표적 예다. 지원자는 누가 더 ‘귀사에 입사하는 운명’을 지녔는가 증빙해야 한다. 언젠가 자기소개서 특강에 참여했을 때 강사가 모범사례로 보여준 한 식품회사 지원자의 자기소개서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이 어려웠을 때 해당 회사의 이벤트에 당첨돼 무상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그때의 도움으로 집안은 다시 회생할 수 있었으며 그런 운명으로 귀사에 지원하게 됐다는 지원동기였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에는 지금-여기의 나 대신 운명을 향해 달려온 나만이 있다. 그냥 공고가 떠서 지원한 사람이 분명 태반일 텐데 말이다. 


에피파니 덕에 소설가가 된 하루키

그나마 운명의 양상이 성공이라면 다행이다. 약자와 실패자에게 적용되는 운명 서사는 더 끔찍하다. 그것도 운명이니 다 받아들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낙인으로 돌아온다. 자살한 19살 콜센터 직원은 부모님에게마저 ‘조금만 참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그만두면 될 일이지, 자살까지 할 일이냐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콜센터는 어린 그녀에게 벗어날 수 없는 전부이자 운명이었다. 지금 포기해도 괜찮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쩌면 가장 필요했을 이 말을 어떤 어른도 해주지 못했다. ‘수저계급론’ 역시 속삭인다. 모든 건 다 결정돼있으니, 너는 운명의 영향력 아래에서만 움직이라고. 


한강의 시 ‘서시’에서 운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힌트를 얻는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운명은 삶의 과정에서 섣불리 깨닫거나 결정지을 것이 아니다. 죽음의 앞에 갔을 때야 비로소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미디어가 쉽게 만들고 기대어버리는 운명 서사가 불편한 이유다. 우리에겐 그럴싸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보다는, 지금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더 필요하다. 누구도 자신의 현재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부정하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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