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더 성장하는 중이라고
요새 필요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3박 4일 동안 (강제) 묵언수행 비슷하게 하고 있는데도 더 하고 싶다. 이거 주세요, 감사합니다. 음식을 주문하거나 무언가를 구입할 때만 말을 한다. 하루에 고작해야 10마디 남짓. 그 외의 시간은 침묵과 함께하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를 잔뜩 듣고, 길을 가다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멈춰서 머무르고, 남기고 싶은 사진을 찍고, 너무 좋은 곳에서는 그림을 그린다. 오롯이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순간.
고요 속에서 오직 내 마음에만 귀 기울이는 이 순간들. 침묵과 고요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원래 혼자 잘 놀기는 하지만 이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아무래도 요즘의 내가 꽤 지쳐있었나 보다.
신경 쓰이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 꽤나 많다. 그래서 혼자 떠나는 김에 그 고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막상 제주에 오니 그럴 새가 없었다. 눈에 담고 마음으로 느끼고 싶은 풍경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 생각 정리를 하러 온 거니까 생각을 꺼내 늘어놓아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가 고이 접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생각이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쫓아냈다.
여긴 제주야. 그러니 그냥 보고 느껴. 그게 무엇이든.
생각이 떠오르면 아주 잠깐 생각을 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은 순간들. 흙탕물을 가만히 두어야 침전물이 가라앉는 것처럼 어지러이 뒤섞인 생각들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도. 캐리어에 책 두 권을 담아 떠났는데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다. 그게 또 참 좋았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中
'닥치는 대로' 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원망할 수 없다. 세상은 제 갈 길을 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 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와 기쁨을 느끼고 싶다.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무엇인가 바꿔야 한다.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中
떠나보면 알게 된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만약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사라진다면, 그런다 해도 지금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이 중요할 것인가.
만약 이 풍경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없다면, 그런다 해도 지금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에 매달릴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좋은 마음만 간직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머리로는 아는 뻔한 이야기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매일 같이 부딪히는 그것들로부터 단절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한 발 떨어질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당연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은 낯설게 바라보기 위해.
말을 하지 않다 보니 느낀다. 참 말 많은 일상이다. 이런 말 저런 말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세상이다. 쑥덕쑥덕과 수근수근이 난무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회피가 넘쳐나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했다. 말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누군가를 해치기도 하고, 따뜻한 한 줄기 빛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위로의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배려의 표현이 나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내 입에서 비롯되는 말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늘 신경 써야 할 일이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던 옛 성인들의 조언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필요한 말을,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하는 지혜를 더 쌓을 필요를 느낀다.
지혜롭게 잘 살고 싶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다치게 하면서 아등바등 밟고 올라가려는 그런 삶 말고, 함께 존재함으로써 더 풍요롭고 따뜻하고 행복한 삶. 내 결핍과 불안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까. 끝없이 놓이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
사람들은 저마다 삶을 선택한다. 나 역시 내 삶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매 순간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선택지들과 마주한다. 그 속에서 용서를 선택할지 사랑을 선택할지 희망을 선택할지 감사를 선택할지는 내 몫이다. 수많은 다양성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도,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내 몫이다. 언제나처럼. 내가 사랑하는 내 삶이니까.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풍경에 여러 번 감탄했다. 감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 고요함과 적막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나에게 상처를 준 모든 것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중이라고. 또 한 번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진심으로.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건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눈 앞에 성과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분명 더 나은 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멈추지 않고 가고 있다. 그거면 된다.
위로. 늦가을의 제주가 나에게 건넨 건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