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더로 살아낸다는 것 (4)
그런 말이 있다. 학사는 자신이 세상 모든 지식을 통달한 줄로만 알고, 석사는 자신이 전공 분야의 아주 얕은 지식만을 향유함을 깨닫고, 박사는 자신이 정말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렇기에 학문에는 나아감만이 존재하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 트레이딩과 금융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금융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분야의 학사를 전공하다 말았고, 이 길고 깊은 여정에서도 여전히 아득한 초행길을 걷고 있지만, 내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큼은 매해,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깨달음은 언제나 뼈아픈 패배와 고통을 수반하며 나에게 경종을 울려왔다.
쓰라린 상처의 감각이 여전히 생생할 만큼 최근의 기억이기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나의 무지를 자각할 수 있었던 가장 최근의 사례는 이렇다.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엎고 실물경기의 붕괴와 금융시장의 폭락을 야기하자 위기에 처한 미국 중앙은행은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다. 그것은 양적완화, 유동성, 저금리 등 다양한 이름으로 재해석되었지만 본질은 동일했다. 그들은 경기가 회복할 때까지 규모를 산정하지 않고 무한하게 달러를 찍어내 경기를 억지로 부양하기로 결심했다.
FED의 밸런스시트가 하늘 높이 치솟을수록 시장에 대한 내 의문은 커져만 갔다. 화폐를 무한하게 발행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제아무리 기조 화폐의 권위를 앞세운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부채와 버블을 키워 크레딧 마켓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그로 인해 세계 경제는 더 큰 증시 붕괴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 나는 단정 지었다. 그것이 내가 대학과 텍스트북을 통해 배운 경제학이었고, 짧은 시간 경험한 시장의 역사에서 배운 정답이었다. 나는 글로벌 증시에 막대한 규모의 숏포지션을 취했다.
*FED(Federal Reserve): 미국 중앙은행
*밸런스시트(Balance Sheet): (대차대조표) 중앙은행이 시장에 투입한 자금의 규모
*크레딧 마켓(Credit Market): 국제 채권 시장
*숏포지션(Short-Position): 가격이 하락하면 수익을 얻는 매매
시간이 흘러 중앙은행의 밸런스시트는 경이로운 숫자 단위로 커져만 갔고, 세상의 부채는 이에 버금가게 늘어났다. 동시에 막대한 자금이 풀린 주식 시장 역시 매서운 속도로 상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상승하는 주식시장에,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선 "Do not fight the FED (미국 중앙은행에 대적하지 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낙관론이 팽배해 있었지만 나는 나의 관점을 고수했다. 지금 세상 전부가 거짓된 환상에 극도로 심취해 있는 것이며 오직 나만이 현재 세상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드디어 세상이 미친 건가?
어떻게 확진자 수는 나날이 늘어가고
실물 경기의 회복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렇게 마구잡이로 주식을 사들일 수 있는 거지?
시간이 흐르고 점차 포지션의 만기일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 자신이 아닌 세상에만 의문을 품었다. 상승과 하강, 두 가지 모두를 거래하는 트레이더가 하나의 관점에만 집착하게 되면 모든 일이 틀어진다. 나와 같은 의견을 향유하는 이들의 글만을 게걸스럽게 탐독했고, 그런 글들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포지션에 대한 확신과 오만만을 키워갔다. 트레이더가 종목이나 포지션과 사랑에 빠지면 그 말로는 언제나 동일하다. 단 한 번의 과오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트린다. 그것이 역사의 뒤안켠으로 사라진 패자들의 피로 물들은 이 세계의 원칙이다.
포지션의 만기일이 지나고 자동적으로 포지션은 손실로 마감되었다. 가장 취약한 유럽의 은행주들에 숏포지션을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금전적인 손실이 크지는 않았지만, 내 자존심의 손실은 막대했다. 그럼에도 패배의 상흔을 딛고 일어나 무언가 변화를 물색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이 세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천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롱포지션에 편승하자 시장에서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급락하는 국채금리와 실질이자율. 달러의 장기적 약세 흐름. 시장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 내가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이 찬란하게 빛나며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고 스위칭한 나스닥 롱포지션으로 손실을 모두 만회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한번 나의 무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배움의 양식은 다르지만 그 속에 담긴 직시하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본질은 반복된다. '나는 여전히 시장에 무지하다는 것', 그리고 '나는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것'.
나는 내가 만약 끝까지 나의 관점을 고수했을 때의 일을 생각했다. 주가지수는 하늘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모두가 환희에 찬 시간을 보내는 지금, 내 계좌는 홀로 녹아내리며 나는 이 악물고 고통을 감내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노이로제에 걸려 깊은 무기력에 빠졌을 것이고 우울은 암세포처럼 자라났을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르고 증시가 다시 하락의 사이클로 회귀하더라도 이미 그때쯤 나에게는 무언가를 다시 시도해볼 만한 경제적-심적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멍청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 무지함을, 내 한계를 명확히 인지했기에 트레이더로 살아낼 수 있었다.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배운 교훈이라고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배운 게 아니라 이미 수천번의 패배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일이 남긴 것이라고는 여느 때와 같이 그저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통, 좌절과 불안감, 저릿한 열패감만이 한 줄기 상흔을 더했을 뿐이다.
이미 지나버린 고통에서 고개를 돌리고 나와 혼곤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퇴근길에 나섰다. 비 내리는 퇴근길 영동대교를 지나치며 장대 같은 빗줄기에 갖은 사념에 휩쓸렸다. 아무 곳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흐르는 강물에 몸을 실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수많은 내 선후배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에 대한 완전한 확신, 그 한 번의 확신에 찬 과오로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빗물이 그려낸 파문에 나의 모습이 비친다. 나 또한 저곳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트레이더로 살아낸다는 것>
박 상원 | Edgar Valentine
열아홉 살부터 금융업계에 몸을 담아왔다. 피비린내 나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매일 같이 전쟁을 치르며 손 끝의 위태로운 베팅에 목숨을 맡기면서, 오늘도 질깃질깃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화려함과 비밀스런 낭만으로 점철된 이 업계의 가장 어둡고도 암울한 이면을 퇴폐적인 문체로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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