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y 김우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1.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

그의 저서뿐 아니라 에세이, 삶의 양식 등 다양한 방면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소위 흥행 보증 수표 작가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하루키의 세계에 입문했다. 어쩌면 이제는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어도 ‘하루키’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읽지 않았어도 에세이를 접한 적 있는 독자도 많을 테고. 그런 탓일까. 그의 명성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근본’을 중요시하는 코어 독자들에겐 아마 도달하지 못할 선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몰입력이 강한 소설을 쓰는 작가임은 확실하다. 400페이지가 넘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나는 순수 시간 기준 5시간 이내에 완독했다. 가독성이 뛰어나고, 잘 읽히는 소설이라는 점에 이견은 없다.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묘사는 독자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그려내게 했고, 페이지를 막힘 없이 넘기게 만들었다.

반면 지나친 묘사나 장면 설명은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그 이상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텍스트에 여백이 없다는 느낌. 쓰쿠루가 과거의 비밀을 찾기 위해 쉼 없이 내달리고, 독자들은 선택 없이 그를 따라가게 된다.

소설 이야기로 잠시 새어가자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철저히 3인칭 시점을 고수한다. 마치 쓰쿠루의 시점처럼 느껴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쓰쿠루의 내면과 감정은 3인칭을 가장한 채 주관적으로 전달된다. 플롯 자체가 쓰쿠루의 여정, 즉 친구들을 찾아가 과거에 묻어두었던 질문의 답을 얻는 것(물리적 의미)과 과거의 상처와 마주해 스스로를 회복해가는 것(상징적 의미)이 중심인 만큼,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는 방식은 중요하다. 극단적으로 독자와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아예 확실한 1인칭 시점으로 감정을 전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특징은 감정의 진폭이 절정에 이르러야 할 후반부, 핀란드에서의 에피소드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서의 누적이나 심리적 반추가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고 패턴화되는 구조는, 결국 귀납적 결말로 귀결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2. 소설 속에 등장한 텍스트


(1) 다섯이라는 완전함에 대한 판타지

극 중 쓰쿠루를 포함한 다섯 명의 친구들은 스스로를 완벽한 공동체라 부를 만큼, 균형 잡힌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이들 역시 그 균형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는 의식된 판타지다. 이상적인 관계를 꿈꾸지만, 그것이 언젠가 깨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품고 있는 상태. 이후 20대가 된 쓰쿠루 앞에 하이다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초현실적이고 유령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하이다는,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전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여섯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다. 여섯 손가락은 유전적으로 우성이고 진화된 특징이지만, 인간은 그걸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섯 손가락이 ‘정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이것은 결국 완전함을 넘어선 존재는 사회적으로 결함이 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이는 쓰쿠루와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결국 이 소설은 완전함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고, 불완전함을 감당하는 관계야말로 진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해가는 과정이다. 진짜 삶은 불완전함을 견디는 일이며, 그 불완전한 채로 살아가는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2) 10대, 20대, 30대의 쓰쿠루 – 시간 구조를 축으로 한 내면의 레이어

이 작품은 단순한 연대기적 플롯이 아니다. 쓰쿠루의 자기 정체성이 해체-방치-회복되는 과정을 시간적 구조로 분할해 표현하고 있다.

- 고등학생 쓰쿠루는 공동체 속의 정체성에 기댄 존재였다.

- 20대 쓰쿠루는 자아가 무너진 이후 방치된 시간을 살아간다.

- 30대 쓰쿠루는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자기화해가는 시기를 맞는다.

‘순례’라는 제목은 단지 여행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따라 자기를 되짚는 의식의 여정이다.


3. 문학의 기능과 의미 – 문학은 어떻게 인간 내면과 현실을 사유하고 감각하게 하는가

이 소설은 끝내 시로를 강간한 범인이나 살해의 경위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독자는 질문하게 된다. “과연 쓰쿠루는 성장했는가?”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문학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이 남긴 정서의 궤적을 기록하는 예술이다. 쓰쿠루와 함께 30여 년의 시간을 동행하며, 우리는 단지 해답이 아니라 그의 감정과 방황, 무력과 소생을 감각하게 된다.


1-1. (다시 작가로 돌아가) 그렇다면 하루키 작가의 의도는?


하루키는 이와 같은 문학의 기능에 충실했을까? 그는 오랜 시간 사소설적인 내면 탐구와 개인 중심 서사를 추구해왔다. 이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인기 있지만, 문학적으로는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문학의 의미를 덧붙이자면, 모든 텍스트는 뛰어난 시대 감각을 가져야 한다. 대문호라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은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드러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일본은 버블 붕괴, 동일본 대지진, 고베 대지진 등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며 문화·예술 전반의 정서와 어조가 바뀌었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개인의 감각과 고립의 세계를 탐색해왔고, 그의 소설은 종종 현실과 단절된 것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에서는 1995년 도쿄라는 시공간의 명시적인 언급을 통해 현실과의 연결을 시도하려는 작은 몸짓이 보인다. 이는 하루키 문학에서 드물게 시대적 컨텍스트와의 접점을 보인 사례로 읽힌다. 문학과 시대는 절대 단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오히려 독자는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그가 다시 삶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이는 단순한 자기 치유의 서사가 아니라, 개인이 시대와 맞닿는 방식, 즉 시대를 살아내는 하나의 태도일 수 있다. 문학이란, 그렇게 직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현실과 세계를 비추고, 인간을 사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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